韓嵩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한 말의 문관. 자는 덕고(德高)로 의양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세상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삼공의 명에 응하지 않고 친구 몇 명과 역서의 산 속에 은거하여 지냈다.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한숭은 난을 피해 형주로 갔다. 유표가 그를 초빙하여 별가로 삼았다가, 종사중랑으로 옮겼다.
유표가 천지에 교사(郊祀)를 지내고 황제의 의복을 쓰며, 두기에게 황제의 음악을 만들게 한 다음 자신이 쓰는 등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일삼았다. 한숭이 바른 말로 간언했지만 유표는 따르지 않았고, 유표의 비위에 거스르게 될 뿐이었다.
199년 조조와 원소가 싸우며 둘 다 유표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유표는 아무도 도우지 않으면서 사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유선과 함께 "만약 천하를 재패해야 할 것이면 지금 여기서 군사를 일으켜 둘이 싸우는 틈을 타야 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조조가 이길 것이 뻔하니 조조에게 항복하여 형주를 보존함과 동시에 천수를 누리고 자식에게 후사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라는 진언을 올렸다.
괴월도 그들의 계책을 편들었고, 유표는 한숭에게 허창의 상황을 보고 오라고 명했다.
"제가 가지 않아도 이미 조조가 이길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다만 제가 사신으로 가게 되면 천자에게 관직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어 유표님과는 예전의 관계만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유표는 듣지 않고 그를 허창으로 보낸다.
허창으로 간 한숭은 과연 그의 예측대로 시중에 영릉태수 작위를 받았고, 유표에게 돌아와서 조정과 조조를 있는데로 찬양했다.[1] 유표는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둔 후 참수하러 하였다. 한숭은
장군께서 이 한숭을 책임지셔야 하는 거지, 한숭이 장군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라며 가기 전에 자기가 했던 말을 되새기게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표는 화가 식지 않았으나 채부인이 한숭이 하는 말이 맞으니 죽여봤자 소용없다며 만류해 결국 유표는 한숭을 죽이는 걸 그만두었다.
208년 유종이 후사를 이은 후에 조조가 쳐들어오자 부손, 괴월과 함께 항복을 주장했다. 조조는 형주를 접수한 후 한숭이 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대홍려 벼슬을 내린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유표군의 문관으로 등장하며 삼국지 12 일러스트에는 유표에게 왔다가 감옥에 갇힌 상황을 그려놓았다.
삼국지 9에서는 무엇때문인지 희귀한 병법인 석병을 가지고 있다. 그거 외엔 혼란을 가지고 있으며 능력치는 31/16/72/74의 C급 문관. 석병 외에는 별 의미없는 장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28/18/72/74/58에 지명도에 비해선 특이하게 군사 특기를 가지고 있으나 통솔이 워낙 낮아서 사기캐까진 안된다. 기술 특기가 있으니 기술 셔틀로는 유용.- ↑ 연의에서는 이에 더해 유표의 아들을 볼모로 보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