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크 그린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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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
이름행크 그린버그(Hank Greenberg)
출생~사망1911년 1월 1일 ~ 1986년 9월 4일
국적미국
출신지뉴욕주 뉴욕
포지션1루수, 좌익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30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소속팀디트로이트 타이거스(1930~1946)
피츠버그 파이리츠(1947)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영구결번
- 2 5 6
타이 콥찰리 게링거행크 그린버그알 칼라인
11 16 23 42
스파키 앤더슨할 뉴하우저윌리 호튼재키 로빈슨
※ 모든 MLB 팀이 유니폼 번호을 쓰기 시작한 건 타이 콥이 은퇴한 뒤인 1937년부터다. 대신 코메리카 파크 왼쪽 담장에 그의 이름이 존재한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행크 그린버그
헌액 연도1956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84.97% (9회)
1935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미키 코크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루 게릭
(뉴욕 양키스)
1940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1 소개

흔히 메이저리그의 첫 유태인 스타라고 알려져있다.

통산 13시즌 동안 타율 .313, 331홈런, 1276타점을 기록한 30~40년대 최고 타자 중 한 명. 193cm 98kg에 달하는, 지금의 관점에서도 건장한 체구에서 뽐어져나오는가공할만한 파워를 바탕으로 통산 장타율 6할을 넘겼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은 실제 저 누적 스탯은 9.5 시즌 동안 만들어 낸 성적이라는 것.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때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4년 2개월을 군에 입대, 전선에서 보내는 바람에 약 200홈런, 600타점을 손해를 봤다.[1] 군복무가 없었다고 가정하면 550홈런 1900타점이 가능했던, 디트로이트의 두번째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타자.[2]

2 생애

1911년 1월1일 뉴욕에서 루마니아 출신 유태인 이주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린버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양키스타디움이 있는 브롱스에서 자란 그린버그의 꿈은 야구선수였다.

1930년 9000달러를 받고 디트로이트에 입단한 그린버그는 3년만인 1933년 메이저리그에 올라서 첫 시즌 타율 .301 12홈런 87타점의 인상적인 성적을 남겼다. 그리고 1934년부터 대폭발. 타율 .339 26홈런 139타점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많은 63개의 2루타를 날렸다. 이해에 디트로이트는 25년만에 아메리칸리그 정상에 오르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세인트루이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다. 이듬해인 1935년, 타율 .328 36홈런 170타점의 눈부신 성적을 올린 그린버그는 만장일치로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고 디트로이트는 전해에 이어 또 다시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이 해에 시카고 컵스를 꺾고 창단 35년만에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부상으로 추춤했던 1936년을 제외하고 1937년 타율 0.337 40홈런, 183타점 / 1938년 58홈런 / 1940년 .340의 타율과 함께 2루타(50) 홈런(41) 타점(150)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며 2번째 MVP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941년 입대를 받아들여 스타급 야구선수 중에서는 처음으로 군에 입대한 그는 1941년 12월5일 '만 28세 이상자 제대' 조치에 해당이 돼 군복을 벗었다. 그렇게 군생활은 1년으로 끝나는 듯했지만 그린버그가 제대한 지 이틀 후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린버그는 다시 군복을 입게 되었다. 미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군(United States Army Air Forces)에 자원 입대한 그린버그는 사관후보생 졸업 후 중위로 임관했고, 3년반 동안 중국-버마-인도 전선에서 B-29로 폭격을 진행한 제20항공군 예하 제58폭격비행단에서 체련 교관으로 복무했다.[3]
1945년 7월, 4년2개월만에 리그에 복귀하여 복귀 첫 경기에서 홈런을 날렸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지금도 디트로이트 역사상 최고의 홈런으로 남아있는,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9회초 역전 만루홈런을 쏘아올렸다. 이해 디트로이트는 1935년에 이어 다시 컵스를 꺾고 2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46년에도 44홈런, 127타점으로 두 부분에서 1위에 오르며 제몫을 다했지만 연봉 협상에서 이견을 보인 디트로이트 구단은 그린버그를 3만5000달러에 피츠버그로 트레이드 했다. [4]

피츠버그는 그린버그를 내셔널리그 최초의 10만달러 선수로 만들어줬으며, 그린버그가 홈런을 펑펑 넘길 홈구장 포브스필드의 좌측 펜스 뒤 불펜을 'Greenberg Gardens'로 명명하는 등 그린버그를 위해서 엄청난 대우를 해줬지만 그린버그는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리면서 타율 .249 25홈런 74타점에 그쳤고, 그 해 만 36세의 이른 나이임에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5]

3 인성

그린버그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당시로는 엄청난 거구에 평발이어서 달리는 것도 쉽지 않고 운동 신경도 다소 부족했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self-made' 슈퍼스타였다. 그린버그는 경기 전 아침 8시부터 4시간 동안 방망이를 휘둘렀고 경기가 끝나면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시 타격 연습을 했다. 배팅볼 투수들이 그린버그만 보면 도망다닐 정도였다.

또 슈퍼스타였음에도 팀을 위해서는 본인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40년 디트로이트 구단은 수비력이 형편 없는 루디 요크를 기용하기 위해 그린버그에게 좌익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그린버그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데뷔 시절 심각했던 1루 수비를 평균 이상으로 끌어올린 상황이었고 팀내 최고 스타인 그는 팀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또다시 좌익수 수비 훈련에 돌입했다. 결국 1940년 MVP 수상시 그의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루마니아 출신 유태인 이주민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야구계 최초의 유태계 스타였다. 1930년대 유럽에서 반유태인 정서가 확산되는 가운데, 미국내 유태인들은 그린버그를 희망으로 여겼고, 그린버그 역시 이를 자신의 막중한 임무로 생각했다. 훗날 샌디 쿠팩스가 월드시리즈 1차전 등판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켰던 '욤 키푸르' 날에 처음으로 출장 불가를 선언한 것도 바로 그린버그였다.

메이저리그의 첫 흑인선수였던 재키로빈슨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한게 1947년, 바로 재키로빈슨이 다저스에서 데뷔를 한 해였는데, 이때 그린버그는 슈퍼스타였고, 로빈슨은 경기장 안팎에서 갖은 인종차별을 겪어가면서 분투를 하고 있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흑인만큼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유태인으로써의 차별을 접해봤던 그는 경기중에 상대팀 선수였던 재키로빈슨을 만났을때 "너한테 인종차별적 야유을 보내는 저 사람들을 너의 실력으로 이겨버려라"고 격려 해주었다고 한다.

4 은퇴후

1946년 뉴욕 백화점 재벌의 딸과 결혼한 그린버그는 은퇴 직후인 1948년 빌 빅이 구단주로 있는 클리블랜드의 팜디렉터를 맡았고 1950년 단장으로 부임하여 1954년 클리블랜드의 최고 시즌(111승)을 이끌었다. 이후 1958년 빅을 따라 다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부회장이 됐고, 화이트삭스는 이듬해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이후 본거지를 캘리포니아로 옮기고 싶었던 그린버그는 LA 다저스의 지분 매입을 희망했지만 월터 오말리가 이를 거부하자 야구계를 떠났다.

1963년 고향 뉴욕에서 은행업에 투신, 성공적인 은행가가 됐다. 얼마 후 그린버그는 자신의 회사를 캘리포니아주 비버리힐즈로 옮겼고, 1986년 비버리힐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 그린버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 풀타임 5년간, 연평균 41홈런 152타점을 기록했다.
  2. 첫번쨰 전성기는 타이 콥이 이끌었던 1905~1926 시기
  3. 밀덕후라면 알겠지만 이 20항공군은 바로 일본 본토 공습,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단행한 부대다. 미군이 사이판을 확보하기 전에는 히말라야를 넘어다니며 인면전선 폭격을 진행했다.
  4. 이 소식은 운전 중 라디오로 처음 접한 그린버그는 엄청나게 분개했다고 한다.
  5. 원래 그린버그는 디트로이트가 본인의 연봉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때 이미 은퇴를 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