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의 영구결번
1234567
빌리 마틴데릭 지터베이브 루스루 게릭조 디마지오조 토레미키 맨틀
891015162023
빌 디키 &
요기 베라
로저 매리스필 리주토서먼 먼슨화이티 포드호르헤 포사다돈 매팅리
32374244464951
엘스턴 하워드케이시 스텡겔마리아노 리베라 &
재키 로빈슨
레지 잭슨앤디 페티트론 기드리버니 윌리엄스
이름조지프 폴 "조" 디마지오(Joseph Paul "Joe" DiMaggio)
생몰년1914년 11월 25일~1999년 3월 8일
국적미국
출신지캘리포니아주 마르티네즈
포지션중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 입단1934년 뉴욕 양키스 자유 계약
소속 팀뉴욕 양키스(1936~1951)[1]
별명양키 클리퍼(The Yankee Clipper)
한때는 마릴린 먼로의 남편이기도 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조 디마지오
헌액 연도1955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88.84% (4회)
1939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지미 폭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194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조 고든
(뉴욕 양키스)
1947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루 부드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 개요

I want to thank the good lord for making me a Yankee.

내가 양키스 선수가 된 것을 신에게 감사드린다.

오늘도 당연히 양키스가 이겼을 거다. 양키스에는 그 위대한 조 디마지오 선수가 있잖니. 그러니 양키스가 졌을 리가 없어.

― 소설 《노인과 바다》 中

5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한 전설.

1930~1940년대 미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이자 베이브 루스의 뒤를 이은 뉴욕 양키스의 간판 프랜차이즈 스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5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으며 리그 최고 타율 2번, 최다 홈런 2번, 최다 타점 2번과 함께 리그 MVP 3회, 전 시즌 올스타전 출장, 월드 시리즈 우승 9회를 기록했다. 별명은 양키스의 범선이라는 뜻인 '양키 클리퍼(The Yankee Clipper)'.[2]

통산 성적은 13시즌 동안 타율 0.325, 출루율 0.398, 장타율 0.579, OPS 0.977, 순장타율 0.254, BB/K 2.14, wRC+ 152, 2214안타, 361홈런, 1537타점.

또한,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으로도 유명하다.

2 뉴욕 양키스 입단 이전

1914년, 샌프란시스코 근방의 어촌에서 9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난 디마지오는 평범한 어부가 되기를 꿈꿨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야구에 흥미를 갖게 된다.

1932년, 형인 빈스 디마지오가 뛰던 샌프란시스코 실즈에서 마지막 3경기를 남기고 유격수에 공백이 생기게 되자 조 디마지오는 형의 추천을 받아 실즈에서 뛰게 되었고 3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실즈와 계약을 하게 된다. 1933년에는 마이너리그 2위에 해당하는 61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시카고 컵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 수많은 팀의 영입 대상이 되었으나 다음해, 디마지오는 택시에서 내리다가 무릎에 금이 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게 된다.

결국, 한 팀을 제외하고 다른 팀들은 디마지오 영입에서 철수하는데, 그 한 팀이 바로 뉴욕 양키스였다. 양키스는 실즈에서 원래 가격의 1/3인 25000달러만 지불하여 디마지오를 영입한다.

3 양키스의 새로운 황제

이 후, 부상으로 인한 기량 저하를 불식시키며 디마지오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936년,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디마지오를 향해 언론은 베이브 루스, 타이 콥 등의 뛰어난 타자들의 이름을 거론하였고 엄청난 부담 속에서도 디마지오는 시범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를 상대로 4타수 1안타를 기록했고[3] 첫 시즌에 타율 0.323, 29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며 루 게릭과 함께 새로운 강타선을 결성한다.

다음해에는 타율 0.346, 46홈런, 167타점을 기록하며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디마지오가 기록한 46홈런은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2005년에 48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양키스의 오른손 타자가 기록한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이 당시, 양키스의 홈 구장이었던 양키 스타디움은 양키스의 간판 타자 베이브 루스를 위해 철저히 왼손 타자 친화로 꾸며져 있었고, 반대로 오른손 타자들에게는 홈런을 때려내기가 상당히 어려운 구조였기 때문에 더 돋보이는 기록이다.

디마지오는 이후에도 3할,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하며 루스의 뒤를 잇는 새로운 간판 스타로 입지를 굳혔고, 1939년에는 타율 0.381, 30홈런, 126타점으로 최고 타율과 리그 MVP를 차지했으며 1940년에는 타율 0.352로 또다시 최고 타율을 기록한다.

4 56경기 연속 안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디마지오에게 가진 인식은 돈 밝히는 놈이었는데, 이는 디마지오가 구단과 연봉을 두고 갈등을 벌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1년, 디마지오는 이 모든 것을 불식시키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전미의 최고 스타이자 국민적 기쁨으로 활약한다.

1941년 5월 1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디마지오는 기나긴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워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 과정이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라 상대 내야수의 얼굴을 맞고 생긴 행운의 불규칙 안타로 기록을 이어나간 적도 있으며 마지막 타석에서 극적인 안타를 기록하는가 하면, 상대 투수가 승부를 피해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난 공을 어거지로 때린 적도 있었고 다른 팀에서 뛰던 동생 돔 디마지오가 다이빙 캐치로 타구를 잡아내 기록이 중단될 뻔한 적도 있는가 하면[4] 기록원이 실책과 안타의 갈림길 중에서 안타를 선택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45번째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기존 기록인 44경기 연속 안타를 뛰어넘었던 6월 29일, 워싱턴 세네터스전에서는 누군가가 디마지오의 방망이를 훔쳐간 적도 있었다. 결국 디마지오는 동료의 방망이를 빌려 신기록을 세웠고 경기가 끝난 후, 장내 방송까지 동원한 후에야 간신히 자신의 방망이를 되찾을 수 있었다.

7월 16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까지 디마지오는 56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갔고 7월 17일, 인디언스전에서는 상대 내야진의 호수비에 의해 3타수 무안타로 물러나면서 기록을 마감한다. 그러나 이후, 7월 18일부터 8월 2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전까지 또다시 16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갔다.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디마지오가 7월 17일에 안타를 기록했다면 도합 73경기 연속 안타라는 기록을 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기록으로 디마지오는 타율 0.406을 기록한 테드 윌리엄스를 이기고 2번째 리그 MVP를 차지한다.

이 시기 디마지오의 인기를 상징하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인들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던 인사가 바로 "오늘도 디마지오가 안타를 쳤습니까?"였다.

5 입대, 그리고 은퇴

1942년 시즌을 보내고 디마지오는 미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전선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으나 방망이를 들고 부대에 위문을 하러 다닌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1946년부터 디마지오는 다시 팀에 복귀한다. 복귀 첫 해, 3년 만에 서는 메이저리그 무대에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데뷔 시즌 이후 처음으로 3할을 기록하는 데 실패했으나, 다음해에 타율 0.315, 20홈런, 97타점을 기록하며 3번째 리그 MVP를 수상한다. 이때는 테드 윌리엄스의 기록이 디마지오보다 좋았으나 기자들이 자신들과 관계가 훨씬 원만했던 디마지오의 손을 들어줬다. 1948년에는 타율 0.320, 39홈런, 155타점을 기록하며 2번째로 최다 홈런과 최다 타점을 기록한다.

그러나 1949년, 발꿈치 통증으로 인해 디마지오는 전반기를 쉬어야 했고 이 당시,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팀의 간판 스타였던 디마지오와 윌리엄스를 맞트레이드하려 하였으나 레드삭스에서 양키스에게 주전 포수 요기 베라까지 요구하여 이 트레이드는 결렬된다.

그리고 1950년, 타율 0.301, 32홈런, 122타점으로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했으나 1951년에는 타율 0.263, 12홈런, 71타점으로 부진했고, 결국 그는 양키스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은퇴한다. 이후 양키스 중견수의 계보는 미키 맨틀로 이어진다. 참고로 디마지오의 말년에 우익수로 맨틀이 들어오면서 디마지오는 자신이 밀려날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미키 맨틀 문서 참조.

6 은퇴 후

은퇴 후, 디마지오는 철저한 은둔 생활을 한다.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으로 다시 한 번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274일 만에 이혼을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디마지오와 먼로는 친구로서 지냈고, 세월이 흘러 디마지오는 먼로와의 재결합을 원했다. 먼로 역시 디마지오와의 재결합에 응하였는데 재결합 3일 전 돌연사한다. 디마지오는 먼로의 죽음이 케네디 가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케네디 가문에게 등을 돌린다. 그리고 권력자의 성추문을 혐오했는데, 늘그막에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이 성추문을 일으키자 격렬하게 비난했다.

먼로가 죽은 뒤에 디마지오는 먼로의 장례를 주관했으며 평생 혼자 살았다. 그 후에도 디마지오는 먼로의 무덤에 1주일에 3번 찾아가 장미꽃을 놓았으며 늘그막에 몸이 아파서 무덤으로 가지 못할 때도 남에게 부탁하면서 꽃을 놓게 했다. 그리고 서서히 죽음이 찾아올 때도 두렵지 않다면서 마릴린을 만날 텐데 뭐 걱정이냐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왔다. 결국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도 "이제야 마릴린의 곁으로 갈 수 있겠군"이었다.

하지만 정작 디마지오 본인도 결혼 생활 동안에 먼로를 수없이 폭행했다. 어찌나 맞았던지 먼로는 늘 흉터와 멍을 감추기 위해 짙은 화장을 했을 정도였고, 폭력의 강도는 점점 세져서 야구배트로 맞은 날도 있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위에 언급된 먼로의 사후에 그가 했던 행동들을 뒤늦게나마 뉘우친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양반이 1914년 출생자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때리는 게 옳다는 게 아니라, 이 시기에는 부부 간의 폭력을 낭만주의의 격렬한 한 형태로 여기는 괴이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조 디마지오 자신은 그 폭력이 나름 사랑이었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해 뉘우치진 않았다. 얻어맞는 먼로 입장에선 개소리였겠지만 물론 조 디마지오가 먼로에게 폭력을 동원한 이유가 오로지 낭만(....) 실현 때문일 리는 없고, 근본적으로 조신한 아내를 바란 디마지오와 자유 분방한 배우의 삶을 추구한 먼로의 생각이 충돌한 탓이 크다. 또한 디마지오는 은퇴한 선수였는데 먼로는 스타덤에 있는 등 자신의 활동과 비교가 되어 아내의 활동을 못마땅해 했다.
이때 전술한 시대적 이유를 들어 그를 로맨티스트로 미화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저지른 가정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같은 나잇대에 아내에게 친절하게 헌신한 폴 뉴먼이나 루 게릭 같은 인사도 있으며, 이러나 저러나 먼로가 10개월을 못 버티고 '그 사람이 날 때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혼장을 내밀 정도였으니 결혼 생활동안 디마지오의 난폭함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디마지오의 친아들인 디마지오 주니어마저도 자기가 목격했던 가정폭력에 대해 증언하면서 아버지 디마지오를 비난하고, 양어머니였던 마릴린 먼로를 동정했을 정도였다. 참고로 디마지오 주니어는 아버지 디마지오로부터 어떤 관심이나 지원도 거의 받지 못해 비뚤어진 삶을 살다가, 아버지와 같은 해에 사망했다. 조 디마지오는 남편 혹은 아버지로서는 실패한 남자였다고 볼 수 있겠다.

7 평가

베이브 루스의 은퇴 후, 루 게릭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루스와 비견될 만한 화려한 스타를 원했고, 디마지오는 그 공백을 훌륭히 메우며 양키스를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으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한다. 비록 뛴 기간은 13시즌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기간 동안 디마지오는 양키스의 중심 타선에서 루스와 게릭 못지않은 활약을 했으며 팀을 9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유일하게 데뷔부터 은퇴하기까지 올스타전에 한번도 빠지지않고 모두 출장한 선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디마지오의 기록 중 돋보이는 것은 극도로 적은 삼진수다. 361홈런을 기록하면서 당한 삼진은 불과 369개이며, 한 시즌 기록한 홈런보다 더 적은 삼진을 기록한 경우가 7시즌에 달하였고 40삼진 이상 당한 시즌은 한 번도 없다.

사실 타격 성적 자체만 놓고 보면 동시대의 라이벌 테드 윌리엄스에 비해 모든 면에서 뒤쳐진다. 하지만 디마지오가 우승 반지 9개를 차지하는 동안 윌리엄스는 단 1차례 월드시리즈에 나가 세인트루이스에 패한 게 전부였다. 또한 기자들과 원수처럼 지냈던 윌리엄스와 달리 디마지오는 친화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는 MVP 투표에서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디마지오는 3차례 MVP를 따내며 2차례에 그친 윌리엄스에 앞설 수 있었다. 1941년에는 56경기 연속 안타의 임팩트 덕에 4할 타율을 기록한 윌리엄스를 눌렀으며, 심지어 1947년에는 트리플 크라운의 윌리엄스를 단 1점 차이로 제쳤다. 참고로 이해 디마지오의 WAR은 4.85로 9.91을 기록한 윌리엄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근데 그때는 지구상에 WAR가 없었잖아 한국에서는 홍성흔이 이런 식으로 골든글러브를 가져갑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테드 윌리엄스는 루스, 콥과 함께 역대 최고의 타자 3인방에 꼽히는 반면 디마지오는 이후 나온 타자들에도 밀리는 추세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최고의 '스타'를 꼽으면 디마지오가 반드시 거론된다.

1955년, 디마지오는 88.8%의 투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첫 턴 입성이 아니었는데, 이는 디마지오 은퇴 당시만 해도 아직 앞선 시대의 전당감 선배들이 번호표를 뽑고 입성을 기다리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69년에는 메이저리그 100주년을 맞아 '살아 있는 최고의 메이저리거'로 선정되기도 한다. 물론 본인은 이 모든 것을 극도로 꺼려하며 자신의 연속 안타 기록을 넘어서는 선수가 나오기를 원했다.

8 여담

허구연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내용 참조.
  1. 다만, 1943~1945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입대 때문에 빠져야 했다.
  2. 이 별명은 아폴로 12호 사령선의 명칭으로 쓰인다.
  3. 평생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꺼리던 디마지오가 유일하게 자화자찬하던 것이 바로 사첼 페이지를 상대로 4타수 1안타를 기록한 것이다.
  4. 이때 나온 말이 디마지오가 엄마를 고소해야겠군이다. 본격 패드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