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포 페데르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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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이름아돌포 알프레도 페데르네라
(Adolfo Alfredo Pedernera)
생년월일1918년 11월 15일
사망년월일1995년 5월 12일
국적아르헨티나
출신지아베야네다[1]
포지션인사이드 레프트
신체조건171cm / 70kg
등번호-[2]
소속팀리베르 플라테(1935~1946)
CA 아틀란타(1947)
CA 우라칸(1948~1949)
미요나리오스 FC(1949~1954)
CA 우라칸(1954~1955)
국가대표21경기 / 7골(1940~1946)
감독콜롬비아(1960~1962)
보카 후니오르스(1967)
아르헨티나(1969)
산 로렌소(1978)

1 아르헨티나

아버지도 축구 선수였던터라 4살 때부터 페데르네라는 축구장에 들락거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그를 훌륭한 선수로 키우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다. 어린 시절에는 라 플라타와 CA 우라칸 등 여러 클럽을 전전하였지만 그의 실력은 대단했고 16살에 리베르 플라테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페데르네라의 주 포지션은 인사이드 레프트였지만 그는 기타 다섯 공격 포지션 어디에서도 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17세부터 정규 1군 멤버로 뛰기 시작하였고 같이 입단한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기존의 공격수들과도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1939년에 베르나베 페레이라 대신 앙헬 라브루나가 들어왔고 아웃사이드 라이트의 자리에도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가 들어오면서 리베르 플라테는 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1942년에 루스토까지 들어오면서 전설의 라 마키나가 완성되었다. 비록 5명이나 되다보니 모든 선수가 모인 경기가 드물기는 했지만 그들 하나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선수였고 리베르 플라테는 강했다.

호세 마누엘 모레노가 잠시 멕시코로 외도한 후에도 네스터 로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의 전설적인 선수들이 팀에 들어왔지만 리베르 플라테는 3위에 그쳤다. 결국 이에 실망한 페데르네라는 이적을 주장, 100만 페소에 아틀란타로 팔려갔다.

CA 아틀란타에서는 강등으로 인해 오래 머물지는 못했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라칸에 가서 2시즌을 보낸 뒤 디 스테파노, 네스터 로시와 함께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FC로 이적했다.

2 콜롬비아

5000여 명이 공항에 나가 환영해줄 만큼 미요나리오스 팬들의 환영 열기는 대단했고, 그 기대를 충족하듯 페데르네라는 데뷔전에서 아틀레티코 무니시팔을 6:0으로 작살을 내놓았다. 디 스테파노와 네스터 로시에 따르면 그들이 이끌던 미요나리오스는 5 and dance 전략이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5골 이상 차이가 벌어지면 더 이상 골을 넣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들은 이것을 9연승을 하면서 지켜왔다.

그리고 미요나리오스의 전력 역시 강력해서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라피드 빈, 그들의 원 소속팀 리베르 플라테와 우라칸 등 강팀들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당시 콜롬비아 리그의 최강팀으로 발돋움하였다. 1952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누에보 차마르틴[3]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4:2로 꺾기도 하였다. 이에 화가 난 레알 마드리드는 복수를 노리지만 오히려 2번을 더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는 여기에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게 꽂혔다

하지만 그는 리마 팩트[4]에 의해 1954년 미요나리오스를 떠나게 되었고 우라칸에서 한 시즌을 더 보내고 은퇴한다.

3 국가대표 커리어

국가대표에서도 그는 40년대에 아르헨티나가 코파 아메리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 주축 선수로 자리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볼 컨트롤과 상대 수비수의 허점을 파고드는 패스에 대단한 능력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IFFHS의 20세기 선수 랭킹에서 남미 선수 중 12위에 올랐다.

내 축구 인생에 있어 최고로 기억되고 있는 선수는 바로 아돌포 페데르네라다. 마라도나가 매우 특별하고, 환상적인 선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선수다. 또 한 명의 최고 펠레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렵다. 하지만 페데르네라야말로 모든 면에 걸쳐 가장 완벽했던 선수였다고 생각한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5 수상

5.1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5회: 1936, 1937, 1941, 1942, 1945(이상 리베르 플라테)
캄페오나토 프로페셔널[5] 우승 4회: 1949, 1951, 1952, 1953(이상 미요나리오스)
콜롬비아 컵 우승 1회: 1952-53(이상 미요나리오스)

5.2 국가대표

코파 아메리카 우승 2회: 1941, 1945
  1. 1934년 월드컵의 레전드 라이문도 오르시와 같은 고향이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원래 이름
  4. 비정상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뛴 선수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40년대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돈 문제 등으로 인해 구단과 선수 간의 충돌이 잦았다. 이 때문에 페데르네라를 포함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아르헨티나를 넘어 다른 나라로 많이 갔는데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가 특히 수혜를 많이 입었고 그들로 인해 미요나리오스는 ballet azul-파란 발레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51년 FIFA는 이렇게 넘어간 선수들에 대해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고 그들 또한 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비정상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미요나리오스는 페데르네라와 디 스테파노 등 주축 선수들을 돌려주게 되었는데 페데르네라와 네스터 로시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갔지만 디 스테파노는 스페인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평가는 현재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게된다
  5. 콜롬비아 축구 최상위 리그인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의 옛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