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왕조 역대 황제 | ||||
21대 카바드 1세 | → | 22대 호스로 1세 | → | 23대 호르미즈드 4세 |
사산 왕조의 22대 황제. 제위기간 531 - 579년
1 개요
사산 왕조를 최전성기로 끌어올린 그야말로 명군. 사산 왕조는 이 시기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시기 정점에 도달한 사산 왕조의 문화는 여러 민족에게 영향을 끼쳤다.
2 내정
카바드 1세 의 널리 알려진 네 아들 가운데 3남. 큰형은 카베(Kaveh), 둘째형은 자마습(Zamasp), 바로 밑 동생은 크세르크세스(Xerxes).
어머니는 에프탈 추장의 딸로 투란도트 전설의 주인공이 되는 네완도트(Newandokht)이다. 당시 에프탈의 군주였던 에프탈 3세[1] 의 딸 혹은 손녀이다. 페르시아어로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투란저지대를 의미했던 투란의 공주(dokht) 라는 의미의 조어이다. 사산 왕조 황실에 에프탈의 피를 가진 황후는 그녀 이외에도 한 명이 더있는데, 바로 호르미즈드 4세의 황후 후라드도트(Khuraddokht)이다. 에프탈은 다섯 명의 추장이 통치하였는데 1세인 쿤한, 3세인 네완, 5세인 후라드의 이름만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후원으로 큰형 카베를 마젠데란지방으로 은퇴시키고 제위를 승계하였다. 부황 카바드 1세 시절 국경사령관을 지낸 아다르 곤바드(Adar Gonvadh)란 자는 발라시 의 제위 찬탈 당시 카바드 1세 즉위를 도왔던 노장으로 상당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카바드 1세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발라시 파였던 사촌 귀슈나셰프다드(Gushnaspdad)를 살해하고 동북호라산 총독이 되어 있었는데, 531년 카바드 1세가 사망하자 호스로 1세 즉위를 반대하고 호스로 1세의 형 자마습의 아들 카바드를 옹위하였다가 아들 바흐람과 함께 처형되었다.
즉위후 부왕 카바드 1세 시대에 마즈다크에 의해 야기되고 있던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켜 조로아스터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내의 여러 개혁을 실시하여 황제권을 강화시켰다. 그 외에도 토지대장을 완성하고 세제를 확립하고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수도 크테시폰의 조영도 완성하였는데, 그 장대한 유적의 일부는 오늘까지도 남아 있다.
3 외치
[1]
호스로 1세 치하의 사산 제국 영토
대외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여 안티오크를 공략하고 이후 로마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국력면에서 우위를 확보하였고, 동으로는 돌궐과 손을 잡고 에프탈을 쳐서 에프탈 족을 박멸하였으며, 남으로는 아라비아의 예멘을 병합했다.
호스로 대제 치하에서 활약했던 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아라티우스 (Aratius)
- 탐 호스로 (Tam Khosrau)
- 바라즈 브주르 (Varaz Vzur)
- 아다르 마한 (Adar Mahan)
- 주라크(Zuraq) 카바드 1세에 이어 호스로 1세를 섬겨온 노장. 일명 아자레테스(Azarethes). 대장군. 544년 에데사 공략전을 이끔
- 카르다리간 (Kardarigan) '검은 매' 라는 뜻. 호스로 1세 후기 ~ 호르미즈드 4세 시기의 장군. 동명의 아들은 호스로 2세를 섬겼다. 훗날 아들 카르다리간은 아르다시르 3세를 보호하다가 샬바라즈 파로칸에게 살해되었다.
- 미흐로에 (Mihroe) 555년 사망.
- 바흐리즈 (Vahriz) 예멘 총독을 지낸 해군제독.
4 평가
한마디로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 사실 사산 왕조측의 기록에도 상세한 설명없이 단순히 '이러이러했다.' 식의 기록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만큼 그 업적에 대해서 만큼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식대부터 서서히 까먹어서 문제지...
5 이름의 유래
이렇듯 완벽한 성군으로 묘사되고 있는 호스로 1세이나 현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대단히 씁쓸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바로 그의 명칭인 '축복받고 정의롭고 불멸인 영혼'이라는 뜻의 아누시르반의 유래이다. 그의 명칭은 외치나 내치에서 엄청난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 아닌 백성들을 학살해서 탄생한 것이다.
위에 언급된 마즈다크에 의해 야기된 혼란을 수습했다로 간단히 설명되는 이 이야기는 많은 사실을 생략한 것으로 호스로우 1세 즉위 전 사산조 페르시아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있었다. 제어되지 않는 귀족과 사제층의 권력, 고통받는 농부와 평민들, 경제적 고통 등 이런 현실을 개혁하고자 마즈다크라는 귀족은 마니의 평등주의적 이원론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즉 세제 개혁, 귀족과 사제 층의 권력 제한, 사제수의 감축,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의 구축. 하지만 이는 귀족과 사제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키며 마즈다크는 시리아에 2년간 유배 당하기도 하는 등 고난을 경험했고, 이에 분노한 마즈다크주의자로 명칭된 평민들은 마즈다크의 정책 시행을 주장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호스로우는 그런 세력을 반동분자로 몰아붙이고 수만에 달하는 무리를 전원 학살하는 것이 '마즈다크에 의해 야기된 혼란을 수습했다.'이다.
물론 워낙 사회가 뒤숭숭하다보니 어느정도는 마즈다크의 주장이 도입되어 사회 개혁을 이루어 냈지만, 기본적으로 호스로 1세는 대단히 반혁명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런 호스로 1세를 찬양하고자 귀족과 사제들이 붙인 이름이 '축복받고 정의롭고 불멸인 영혼'이라는 뜻의 아누시르반이다. 실로 역사는 귀족들이 쓴다는 쓰디슨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사례.- ↑ 본명 쿠슈-네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