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협옹주

和協翁主

1733년~1752년 11월 27일

1 출생

조선 영조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1남 3녀 중 차녀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차녀가 아니라 4녀이다. 본래 영조와 영빈 이씨는 1남 5녀를 두었다. 그러나 장녀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태어난 두 딸들은 5세 즈음에 모두 요절해서 옹주로 봉해지지도 못해 왕실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것. 어쨌든 영조와 영빈 이씨의 여섯 자녀 중 장성한 자녀는 넷뿐이라 기록상으로는 1남 3녀를 두었다고 나온다. 동복 언니가 화평옹주, 동복 남동생이 사도세자, 동복 여동생이 화완옹주이다.

어머니 영빈 이씨를 닮아서 미색이 뛰어났다고 한다.

2 혼인

11세가 되던 1743년에 화협옹주로 봉해지고 영의정 신만의 아들 신광수와 혼인한다. 혼인하던 해에 가뭄 때문에 영조가 화협옹주의 혼례를 미루러 하였다가 검소하게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3 각별한 남매사이

영조영빈 이씨 소생 자녀 중 화평옹주화완옹주는 유독 사랑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에게는 냉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화협옹주는 세자처럼 집요하게 부왕의 꾸지람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화협옹주가 병으로 위독하자 영조가 친히 그 곁으로 와 임종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하지만 차별 받는 자식이었던 건 사도세자와 마찬가지라 남동생과 만나면 서로 아버지의 미움을 받는 처지에 대해 자조하곤 했다. 당연히 사도세자와 각별한 사이였으며 화협옹주가 사망했을 때 사도세자가 몹시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4 이른 죽음

20세의 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하였으며 후사는 두지 못했다. 동복남매인 화평옹주사도세자도 각각 22세, 2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인 화완옹주만이 장수하여 부모보다 오래 살았으나 남편인 정치달이 요절하여 직접 낳은 후사는 두지 못했고 대신 정후겸을 양자로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