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平翁主
1727(영조 3년)~1748(영조 24년)
1 출생
영조가 영빈 이씨(선희궁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3녀 중 장녀이다. 화완옹주와 화협옹주의 동복 언니이고 사도세자의 동복 누나이며 따라서 혜경궁 홍씨의 시누이가 된다. 영조가 자식들 중 특히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유독 총애했던 것은 유명하다.
2 유순한 성품
어질고 온화한 성품으로, 남동생 사도세자는 물론 다른 여동생들과의 사이도 좋았던 듯하다. 혜경궁 홍씨의 저서 한중록에는 화평옹주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슬기롭게 중재하여 그녀 생전에는 부자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을 수 있었다고 하는 부분이 있을 정도다.
3 혼인
12세에 금성위 박명원[1]과 혼인하였는데, 원래 혼인하면 궁 밖으로 나가는 게 원칙이나 영조가 화평옹주를 아껴서 혼인한 후에도 예외를 적용하여 계속 궁 안에서 살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영조가 화평옹주를 편애해서 한 행동은 거의 병적일 정도.
4 남다른 총애
사실 영조는 자식들을 비정상적으로 편애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모두 영빈 이씨의 소생임에도 불구하고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만 유달리 편애하고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미워했다고 한다.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에는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서 대답을 들은 뒤에 귀를 씻고 양치질을 한 다음에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 방향으로 버리면서 부정을 미리 씻어내려는 듯한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흠좀무. 한중록의 기록이다.
5 이른 죽음
향년 22세에 첫 딸을 낳다가 난산으로 요절했는데 당시의 기록만으로도 사랑하는 딸을 갑자기 잃은 영조의 충격과 상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빈소에 찾아가 밤을 새우며 통곡했는데 날씨가 무더워 임금의 옥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한 신하들이 환궁을 권유해도 듣지도 않았다고 한다. 화평옹주를 염하는 것도 직접 보고 장례도 호화스럽게 치르려다 신하들에게 너무 지나치다는 간언을 들었는데, 당연히 그것도 듣지 않고 오히려 간한 신하들을 파직시켰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으며, 영조의 친필로 비석을 세웠다.
5.1 그 후에
게다가 영조는 화평옹주의 3년상이 끝나는 달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첫 자녀이자 자신에게는 첫 친손자가 되는 의소세손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는 체도 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효장세자 사후 7년만에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고명아들이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에 남자 후손이 귀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납득하기 힘들 정도다. 평소에 영조에게 사랑받던 며느리인 혜경궁조차, 저때는 시아버지를 두려워할 지경이었다고. 심지어 영빈 이씨가 초산을 겪은 혜경궁을 간호하자, 죽은 딸은 잊고 손자가 태어난 것만 좋아한다며 일갈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세손을 예뻐하기 시작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영조가 의소세손의 어깨에 있는 점을 보고 화평옹주도 여기에 점이 있었다며 이 아이는 화평옹주의 환생이라고 주장했다는 야사가 있다. 워낙 총애한 딸이라 그 사후에도 오랫동안 쉽게 잊지 못한 듯하다. 근데 그 요절한 고모의 환생이라는 세손은 요절한 한을 풀기는 커녕 고모만큼도 못 살고 아기일 때 죽었다.(...) 여담이지만 의소세손이 요절했을 당시에 혜경궁은 둘째 아이(정조)를 임신 중이었는데, 영조는 이때도 상중에 아이를 가졌다며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