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하지통[1]을 3번이나 겪어야 했던 여인[2]
혜경궁 홍씨 못지않게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영조의 후궁, 며느리와 손자를 위해 친아들을 죽여달라 간청해야 했던 비정한 어머니
조선 영조대의 인물.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의 생모이며 정조의 친할머니.
본관은 전의(全義)로, 증찬성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한양 김씨(김우종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보통 그녀의 처소를 따 선희궁(宣禧宮)이라 불렸다.
2 궁녀에서 후궁으로
1701년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1726년 11월 16일 영조의 승은을 입고 아이를 갖게 되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 1727년에 장녀 화평옹주를 출산하고, 1728년에 내명부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다. 마침내 1730년 11월 27일에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暎嬪)이 되었다. 이후 1733년에 차녀 화협옹주를 출산했다.
3 사도세자의 탄생
1735년에 마침내 모두가 고대하던 왕자를 출산하였는데, 이 왕자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장남 효장세자를 일찍 잃고 오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영조는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출산하던 당일에 직접 그 곁을 지키고 있다가 태어난 아이가 아들이란 소식을 듣자 당연히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곧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됐으며 세자로 책봉됐다. 그리고 1737년에 3녀 화완옹주를 낳았다.
4 자녀들의 불행한 삶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평옹주는 22세에 첫딸을 낳다 난산으로 요절해 영조를 상심하게 만들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영빈을 닮아 미색이었다는 화협옹주 역시 20세에 병으로 요절했다.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낳은 두 딸들은 옹주 봉작조차 받지 못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고명아들인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성격,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수시로 영조와 갈등했다.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한 중압감 때문에 정신병까지 발병해 살인과 같은 온갖 비행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에 사도세자에게 아들들이 연달아 태어나자 영조는 아들을 건너 뛰고 손자들 중에서 후사를 택하려 했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이후로도 계속 심해져서 자신의 후궁을 폭행해 살해하고, 영조의 시해까지 운운하기 시작했다. 이에 영빈은 며느리와 세손을 살리기 위해 친아들의 단죄를 결심하고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했다. 이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로 결심했을 때, 자신의 꿈에 정성왕후 서씨가 세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예지해 준 적이 있다면서 법적 모친인 정성왕후의 계시와 생모 영빈의 밀고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아들의 죽음 후 영빈은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였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평생을 가슴앓이를 했고, 그 죄책감으로 손자인 정조를 지극정성으로 대했다고 한다.[3]
5 비극적인 삶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조선시대에 궁녀로 입궁해 왕에게 승은을 입고 후궁 첩지를 받은 것은 궁녀 신분으로서 최대의 출세이나 이는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며, 후궁 첩지를 받더라도 왕에게 계속 총애받으며 왕의 자녀들을 낳아 기반을 다지는 건 당연히 더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 아들이 장차 왕통을 이을 국본이 된다면? 그런데 영빈은 이 일을 모두 해냈다. 영빈은 나이 서른이 돼서야 영조에게 승은을 입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중년에 가까운 나이였다. 이때 운 좋게 화평옹주를 가져 후궁 첩지를 받은 것만도 천운이었는데 딸 셋을 내리 더 낳았는데도[4] 계속 영조에게 총애받았다. 그러다 마침내 40세에 사도세자를 출산하고 2년 뒤에 화완옹주까지 낳았다. 실제로 영조에게 가장 많은 자녀들을 안겨 준 후궁도 영빈이었다. 이것만 봐도 영조와 영빈의 부부애가 극진했음을 알 수 있다. 한시라도 빨리 후사를 봐야 하는 왕으로서는 나이도 있는데다 줄줄이 딸만 낳는 궁녀 출신의 후궁보다는 더 어리고 배경도 좋은 후궁을 얼마든지 맞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빈이 저렇게 오래 총애받은 건 분명 특별한 일이었다.[5]
그러나 영빈의 인생은 행복하지 못했다. 사실 궁중 여인은 처소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왕만 바라보며 살아야 했다. 게다가 사도세자 역시 여느 후궁 소생 왕세자들처럼 생모가 아닌 아버지의 정실부인인 왕후의 아들로 입적돼 왕후를 모후로 모셔야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정성왕후와 돈독한 사이라 그녀를 극진히 모셨고, 정성왕후 역시 사도세자를 친아들처럼 아껴 영조의 구박으로부터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었다.
물론 사도세자는 생모에게도 극진했다. 외롭고 마음고생이 심한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겨 후궁의 가마를 크게 개조해서 영빈을 태우고 창덕궁 후원을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그 때가 두 모자의 마지막 시간이었으나, 한창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받던 시기였다보니, 오히려 영빈은 아들의 정신병 증세가 더 심각해진 건 아닌가 의심하며 더욱 불안해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영빈 소생 자녀들은 거의 다 요절했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부모보다 먼저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 정치달을 1달 간격으로 연달아 잃었다. 게다가 말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서인으로 강등된 뒤, 유배형을 받고 정처(鄭妻)로 격하되는 불행을 겪었다.
6 한 맺인 죽음
영빈은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1764년 음력 7월 26일에 먼저 간 아들을 뒤따르듯 한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69세. 영조는 영빈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연희궁(衍禧宮) 자리[6]에 의열묘라는 이름으로 조영되었으며,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영빈의 묘소도 묘에서 원으로 승격되어 수경원(綏慶園)이라는 원호를 받고 정자각과 비각이 새로 건립되었다. 1969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천장해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연세대학교 루스채플이 들어섰다. 천장할 때 정자각과 비각은 그대로 두고 비각 안에 있는 비석만 옮겼다.
7 자녀
8 사극
- 김윤경 - MBC 1988년 ~ 1989년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
- 정혜선 - MBC 1998년 <대왕의 길>
- 이항나 - KBS2 2015년 《드라마 스페셜 - 붉은 달》
- 전혜진 - 영화 <사도>
- ↑ 자식을 잃은 슬픔
- ↑ 영조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영아기에 숨져 옹주 작위를 받지도 못한 딸이 둘이나 있다. 즉 자신이 낳은 1남 5녀 중 막내딸인 화완옹주를 제외한 다섯 자녀를 생전에 앞세웠다.
- ↑ 하지만 정조는 살아 생전 할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유가 어찌됐건 어린 나이에 친할머니가 아버지를 죽여달라 간청한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 ↑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낳은 두 딸은 일찍 죽었다.
- ↑ 실제로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정비인 효의왕후가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자 즉위한 후에 후궁을 간택한 바 있다.
- ↑ 지금의 서대문구 신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