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인

조선의 역대 영의정
하연황보인이유

皇甫仁, 1388~1453

조선 초기의 문신. 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때는 북도 제찰사로서 김종서와 더불어 6진을 개척하고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1452년 문종이 승하하고 그의 유언을 받들어 김종서, 정분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였다.

항상 선왕의 유지를 받들려 노력하였고, 권력에는 전혀 욕심을 품지 않았고 강직하였다.

또한 성품이 인자하고 자애로워 자신보다 낮은 이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 다른 이들에 호감을 많이 샀는데 일례로 계유정난에 휘말려 가문이 멸문의 위기에 처하자 그 집 여종인 '단량'이 황보인의 손자를 데리고 포항까지 피신하여 평생 숨어 키움으로써 가문에 대를 잇게된다.

눈치가 빨라 수양대군의 야심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길 힘이 없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1]

수백년이 지난 후 숙종이 다시 벼슬을 올리고 영조에게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명회가 이 사람의 사위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황보인이 한명회를 한 번 보고는 '국사'(國士)라고 생각을 해서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도 아닌 한명회의 묘지 비석에서 출토된 것이기 때문에 100% 신뢰하기는 곤란하다.

뱀발로, 똑같이 단종을 보필하다 살해당했는데도 같이 일했던 김종서보다 좀 많이 묻히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종서는 그나마 기록이 남아 있는데 비해, 이쪽은 그런 거 없다(...) 지못미.

묘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에 있는데, 인근이 황보씨의 선산인 듯. 곳곳에 산재한 황보씨의 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크다. 가파른 돌계단 위에 조성된 무덤은 어지간한 신라 왕릉은 명함도 못내민다.

  1. 물론 이건 걸러 들어야 한다. 당시 주류세력의 영수 중 한명이고 실권도 갖추고 있는 영의정이 힘이 없으면 누가 힘이 있다는 것인지 말이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조정 대신들은 안평대군 일파와 손을 잡고 수양대군 일파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걸 뒤집으려고 하니 정변이 벌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