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苯, 1394~145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문으로 현대까지 명망이 높은 교은 정이오와 안동 권씨 사이에서 나온 4형제 중 장남이다. 자는 자유(子㕀), 호는 애일당(愛日堂) 또는 성재(省齋)이며, 부인은 하동 정씨로 정인지의 누나이다. 영월 장릉 배식록의 삼상신 중 하나로 다른 둘은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이다.
처음에는 문음으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이후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는 우찬성까지 진급했다. 이후 문종이 승하하자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그 유지를 받들어 단종을 보필했고, 김종서의 추천을 받아 병으로 사직한 남지의 뒤를 이어 우의정이 되는 등 세종과 문종의 총신이자 충신이다.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고 문신임에도 토목에 조예가 깊어 왕실의 건물 건축이나, 제방공사같은 토목공사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우의정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토목공사를 지휘 하러 많이 나갔기 때문에 다른 신료들이 체신머리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불평불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공사를 함에 있어 크고 아름답게 했다고 한다. 숭례문을 개축했고, 서산시의 해미읍성도 그의 작품이다.
강직한 김종서와 달리 황보인처럼 성격이 원만했다.
계유정난 때는 하삼도의 도제찰사가 되어 밖에 나가있다가 상경하던 중 유배를 당했고, 이후 처남인 정인지를 통한 지속적인 회유를 모두 거부하고 결국 사사되었다. 이렇게 비교되는 자형/처남간의 충절
이후 숙종 때 황보인, 김종서와 같이 벼슬이 환원되었고, 이후 영조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무래도 영의정까지 한 황보인이나 여러모로 유명한 김종서에 비해 인지도는 낮다. 공주의 남자나, 관상에는 안나왔고, 왕과 비에는 조금 나왔는데 수양대군 빠돌이 작가 때문에 힘없는 노인으로 묘사된다.
후사는 사촌 형인 홍주목사 정효안에게 당부하여, 오촌 조카인 정지산[1]이 입적하여 이었고, 도망가서 미친 척 하며 숨어 살던 아들의 후손이 나중에 나타나 같이 복권됐다.
묘는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진주시 상대동에 있으며,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는 그와 그의 양아들인 정지산을 함께 모신 정려와 사당이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