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왕공족 | ||||||
이왕가(李王家)로 격하 | ← | 이재면 | → | 이준용 |
1845 - 1912
1 개요
본명은 이재면(李載冕), 친왕으로 봉해진 후 고친 이름은 이희(李喜). 조선의 왕족이자 친일파로 흥선대원군의 적장남. 고종황제의 친형이다.
1845년에 서울 안국동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과 군부인 여흥민씨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뒤에 배다른 동생인 이재선과, 친동생인 이명복 등이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 김병기의 의심을 피해 바보인척 하면서 고의로 장남인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했다고...
그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집권때 문과에 급제하고, 규장각과 예문관 등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한다. 1874년 아버지 대원군이 축출당한 뒤에도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는 성격 덕택에(...) 관직을 유지했다. 사실 대원군의 축출 과정에서 아버지가 축출당하는 것을 방조했는데 명색의 왕의 친형인데 상대적으로 푸대접받는 것이 불만스러워서 그랬다는 말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사적으로 교류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 바로 이재면이었다고 한다.[1] 1882년 중국으로 끌려간 대원군은 그에게 살려달라는 편지를 여러통 띄워 보낸다. 부친의 편지를 전해듣고 그는 바로 중국 텐진으로 달려간다. 아버지 귀국 후, 대원군이 정변을 기도할 때마다 이런저런 관직에 임명됐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축출당했다.
1898년 대원군이 죽을 때 어가가 궁궐을 출발했느냐는 질문을 연발했지만,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전했다가는 동생 손에 죽을 것이 두려워서 끝까지 입다물고 있었다고...
이런 무능한 아버지라서 그랬던가, 자기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도 도와주지 못한 무능한 아버지를 원망한 것인가, 그의 장남 이준용은 아버지 이재면이 죽을 때 눈물 한방울도 흘리지 않아서 무루공자[2] 라고 조롱받았다고 한다.
고종은 대원군과 함께 여러차례 쿠데타 모의를 했던 조카 이준용을 상당히 미워했고, 이는 그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이재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재면은 동생 고종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가하지 않았는데도[3] 동생한테 찬밥대우를 받는다.[4]
1907년 고종이 퇴위하기 직전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지고, 1910년에 육군 부장에 임명되면서 흥친왕(興親王)으로 봉해진다. 그러나 두 달 만에 한일합병으로 왕공족이 되어 친왕에서 공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2 평가
한일병합 당시 특별하게 행동한 것은 없지만, 어째서인지 일본은 그에게 다른 인사들의 몇 배나 되는 거액의 은사금을 줬고 그는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별 말 없이 이걸 그대로 받았다(...). 결국 이 때문에 심한 비난을 받고 친일파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덕분에 아들 이준용과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의 엄밀성을 고려하면 거의 확정범.
고종의 친형이었으니 외모나 생김새도 상당히 많이 닮았다. 단 흥친왕이 더 얼굴에 양미간 팔자주름이 깊고, 어깨가 넓고 통통한 편이 그나마 두 형제를 구별할수 있는 차이점.
3 창작물에서
- ↑ 소설가 장덕조에 의하면 그가 '오랫동안 불우한 환경에서 염량세태의 무정함과, 인간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껴온 대원군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좁은 범위 안의 복심인물(復心人物)과 골육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 ↑ 눈물없는 사나이
- ↑ 하지만 대원군이 일으킨 쿠데타 모의에서 왕으로 추대된 것이 2번이다. 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 사건 시에는 이재선이 역적죄로 처형된 것을 고려하면, 이재면이 죽음을 면한 것은 쿠데타 모의의 주도자가 친아버지, 대상자가 친형이라고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대원군이 주도해서 죄를 못 물은 것이지, 조선시대에 왕의 인척이 역적모의로 죽어나간 것이 하나둘이 아니란 것을 고려하면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다.
- ↑ 이건 대한제국 수립 직후 고종의 세 아들이 완친왕, 의친왕, 영친왕에 바로 임명된 것에 반해 이재면은 대한제국이 선포된지 10년만에 겨우 군 작위를 받고, 13년차 됐을 때 친왕이 됐으니 그 대우가 어땠을는지는 안봐도 비디오..
- ↑ KBS의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인물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