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義親王
1877. 3. 30 ~ 1955.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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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군 시절
작위의친왕(義親王)
군호의화군(義和君)
만오(晩悟)
강(堈)
생몰기간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
제 1대 대한적십자사 총재
다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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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 제복 차림

1 개요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이다.[1] 휘는 강(堈)[2],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 가톨릭 세례명은 비오.

2 일대기

2.1 고종의 왕자

귀인 (덕수) 장씨(張氏) 소생이다. 어머니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의친왕을 낳은 이후에 궐 밖으로 축출되어 궐 밖에서 살다가 명성황후가 죽은 후인 1900년에야 숙원, 1906년에야 귀인으로 추증되었다.

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으며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9년 미국 유학을 갔는데, 다음 해 8월에 의친왕으로 승격되었다.[3] 1901년 3월에는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등을 만났으며, 그해 6월에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후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다. 당시 LA에 기거하던 안창호와는 김규식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보태기도 했다.

을사조약이 있던 1905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4] 등을 지냈다. 한편 이 때 의친왕은 도쿄에서 손병희를 우연히 만났다. 손병희가 마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다가 마침 의친왕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하였는데 이 때 시종관이 영어로 무언가 의친왕에게 아뢰자 손병희가 "내 나라 국왕을 모시는 놈이 어디 감히 외국말로 아뢰느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다!!"라고 일갈했다. 이에 의친왕이 "그대가 옳다."며 다독였고, 이러한 손병희의 의개에 감복해 통교하게 되었다.

1907년 1월 15일에 의친왕이 북한산성에 문관 3명, 군관 105명, 민간인 120명 등 총 228명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의병 봉기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실제로 이들 중에는 의병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다. 대체적인 기록은 참가자 중 하나였던 목형신(睦衡信)에 의해 남아있으나 228명 전원의 명단은 남아있지 않다.

1909년 10월 의친왕이 경남 거창군의 정태균을 방문하여 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이 지방의 뜻있는 사람들과 북상의 사선 대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확보하기 위해 일부 땅을 매입하려다가 발각되어 서울로 호송되었다. 1911년 봄에 의친왕과 손병희는 극비리에 우이동에서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했다. 이어서 8월에 손병희가 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하였고, 그 이듬해에 봉황각을 세웠다. 봉황각은 바로 3.1 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황자 순위로는 순종황제 다음이었으나 영친왕를 밀던 엄귀비와 이준용 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져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이미 나라는 망해가는데 잘들 하고있는 짓이다.

2.2 일제강점기의 행적

1915년 의친왕은 신한혁명당[5]고종황제베이징으로 망명시키려 한 보안법위반사건[6]에도 연루되었다.

1916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 임병찬이 타계하자, 이에 의친왕이 추모제문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로 임병찬 등 독립군과 연통 혹은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의친왕의 처소인 사동궁에는 일본 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사무관이 파견되었으며 의친왕의 처소에는 감시를 위한 유리창이 달렸다.

그런데 이러한 삼엄한 감시를 받아 가면서도 의친왕은 3.1 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모의했던 사실이 1919년 11월 24일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공은 즐겨 시정잡배와 왕래하였는데, 올 봄 독립운동의 주모자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라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1919년 늦가을 의친왕과 최진동 장군[7]과 연통했다. 이후 독립군 단체인 군무도독부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의친왕은 3.1 운동을 통해 침략한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 독립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고 "최진동 장군"에 나와 있다. 후에 1939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이 아들을 얻자 족자를 보냈는데, 이 족자 사이에 항일독립운동에 관련한 밀서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

1919년 11월 9일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려던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3.1 운동 직후인 4월 13일,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은 드디어 세를 규합해 상해임시정부를 창설한다. 이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아직 미약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해임시정부에게 내부적으로는 구심점, 대외적으로는 정당성을 강화하고 조선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의친왕 망명을 계획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조선 황족의 입을 통해서 조선인들은 마음으로 일본의 통치를 원한다는 일본의 선전전에 대항 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되었다. 게다가 의친왕은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이전부터 의친왕 이강은 독립운동세력과 접촉한다든지 독립자금지원이 있었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연락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하여 변장하고 거처를 탈출했다. 그 날 밤 10시 쯤 궁의 후문을 감시하던 일본인 리와가 어둠속에서 의친왕과 비슷한 용모의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급히 시내로 향하는 것을 보고 이를 미행하였으나 이동문 부근에서 이들을 놓쳤다.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고 이에 궁내 사무관 구로사와가 결재를 핑계로 의친왕을 만나려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거듭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막무가내로 의친왕을 만나려 하였고, 결국 의친왕의 탈출은 발각되고 만다.

이에 일본은 필사적으로 의친왕의 행방을 추적했다. 의친왕 일행은 다음날 밤 고종황제가 남긴 150만원의 채권을 전달받는데 성공하는 등 일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결국 의친왕은 11일 만주 안동에서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요네야마 경무에게 적발되어 붙잡히게 되고, 상해임시정부행 탈출은 실패하게 된다.애첩 최효신과 동행하려다가 시간이 지체된 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이후 일본은 그에게서 한반도 내에서의 여행의 자유[8]를 빼앗아 사실상 연금 당했다. 이 시기에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사법적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런 상태에서도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했다. 이후, 총독부 관사에 연금된 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일본 측의 수사기록에 의하면 의친왕은 자의로 탈출한 것이 아니고 돈이 궁하던 의친왕이 일금 3만원을 빌려준다는 꾐에 넘어가 궁을 몰래 나섰다가 납치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3.1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의 사정과 이후 일본이 의친왕에게 대한 태도를 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한다. 가뜩이나 뒤숭숭하던 차에 조선 땅에 거처하면서 황족 중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9] 그가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본이 수사기록을 조작했던 것이다. 물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의친왕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려 했다고 말했다.

물론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일본 측의 수사기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잘 맞지 않는데다가, 적어도 그의 탈출에 임시정부가 개입된 건 확실해 보인다.

1921년, 대한민국 대표단의 청원 사건에서 연명부에 황족 대표로 서명하였다. 대표단은 국내외 인사들이 1921년 8월에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건의서와 연명부를 만들어 워싱턴 회의에 제출하였다. 연명부에는 13도와 260여개 군과 기타 각 사회단체 대표자 372명이 서명하였다.

경주 최 부잣집 12대 마지막 부자로 알려진 최준을 돕기도 했다.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에 따르면 최준의 호 문파(汶坡)도 의친왕이 지어준 것이며, 최준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막대한 자금을 송금해 주다가 정작 자신의 백산무역회사가 100여만 원의 부채를 급히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채무를 조정하는데 의친왕이 나섰다는 것이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공족으로서의 작위와 전 재산을 장남인 이건(李鍵)에게 넘겼다. 이에 대해선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그가 하는 일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일제에 의해 작위가 박탈당한 거라는 주장과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의친왕 스스로가 물러난 거라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이후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규슈에 옮겨가서 살게 되었으나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자료에 의하면 이 때 일본어로 쓴 각서가 있는데 "친왕은 은퇴하고 공(公)의 칭호와 모든 재산을 큰 아들인 이건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일본에 머물기로 하며, 일본 국내에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다. 의친왕에게는 당시 화폐로 30만원을 지불하고 의친왕비에게는 생활비로 1년에 12만원씩을 지불 한다"는 등의 내용이라고 한다.

1930년대에 귀국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때는 알 수 없다.

참고로 1940년 창씨개명 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이에 대해 창씨개명이 자발적이라고 모양새를 보여주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내버려두었다는 말이 있다.

2.3 해방 후 말년

해방 후에는 김구김규식상해임시정부 각료들과 방문하기도 했다. 딱히 정치적 스텐스를 취하거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단순한 사회원로 정도로 말년을 누리고 있었으나 황족 재산이 국유화되고 황실 인사를 배척하던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당한다.

그 후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제대로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끼니를 거르다가 얻은 영양실조에 노환이 겹쳐, 1955년 8월 15일, 79세로 타계하였다. 임종하기 며칠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 성당 제3대 주임 박우철 바오로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10] 과거의 인기가 무색하게, 신문들은 짤막하게 "사동궁주 이강이 졸했다"라는 기사만 한 귀퉁이에 내걸었다고 한다.

사후 어머니 귀인 장씨의 묘소가 있는 서삼릉 묘역에 매장되었다가 의친왕의 자녀들이 홍유릉 묘역에 매장된 의친왕비(김덕수)와의 합장을 추진해 1996년 유해를 이장해 합장묘로 조성했다.기사

3 인물됨

술을 잘 먹고 여자를 좋아하고 권총을 잘 쏴서, 젊을 때는 파티 장에서 권총을 빼들고 샹들리에의 등불을 쏘며 쇼를 벌인 적도 있다고 한다. 확실히 범생이 스타일은 아니고 탕아 기질은 있었던 듯. 다만 탈출극 이전에나 이후에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상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면에서 외모도 그렇고 성격 쪽도 아버지 고종보다는 비교적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기질을 더 닮았던 것 같다.[11]

사실 대한제국의 황실 인사 중에는 의외로 자동차를 좋아하던 인물로,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풍류 적인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드라이브를 하다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게 바로 위에 적힌 대로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의 행적을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 이전에는 자전거 광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탔다고 알려진 차는 미국의 오버 랜드.[12]

민족문제연구소 소속의 윤덕한[13]에 의하면, 방탕한 생활 덕에 이토 히로부미에게 여러 차례 꾸지람을 당했다고 한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건 탈출 사건으로부터 10년이나 이전이다. 확실히 당시에는 미국에서 사랑에 빠져 '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황족도 포기 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윗사람들 뒷목 잡게 하는 행동을 했었다. 그래서 윤덕한은 그가 임시정부로 가려고 한 걸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윤덕한 뿐만 아니라 고종을 부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의친왕의 행적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같은 저서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하자 순종은 통감부로 가서 그를 조문한 뒤, 의친왕을 도쿄로 보내 이토의 장례식에 참가토록 했으나 일본 정부가 거절했다는 말도 있다.

판단은 알아서... 고종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국제 감각과 경험이 많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면이 있어 보이지만, 일제 하에서 감시라는 명목하에 사실은 어느정도 보호받고 대우받으면서, 즉 호의호식하면서 호색한으로 살았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조선은 망했어도 왕조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침략에 저항했다면 광복 이후, 왕실의 대우가 그리 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이 왕조를 싫어했어도 개인적 감정으로만 왕조를 배척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런 이승만에게 왕실의 무책임함은 왕족들을 배척하는 데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 결국 왕실은 일제의 보호를 받으면서 신망을 잃어 갔고, 그런 왕조에 실망한 양반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상당수가 아나키스트로 급진화된다. 의친왕이 과연 그런 왕조의 무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적어도 의친왕이 천수를 누리고 14명의 공식적인 부인들에게서 12남 9녀의 자손을 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후손

위장이었든 진짜 모습이었든 탕아답게 그는 여러 처첩을 두고 자식도 많이 낳았다. 정실인 김덕수[14]에게서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바람에 의친왕의 후손들은 전부 서자 출신. 워낙 자식이 많아서 아들 중 몇 명은 대가 끊긴 다른 왕족의 양자로 보냈다.[15] 그래서 현재 대가 끊기지 않고 생존한 고종황제의 후손은 모두 의친왕 계열이다. 순종황제는 후손이 아예 없었고 영친왕의 아들 이구는 후손 없이 사망. 덕혜옹주의 외동딸 소 마사에도 후손 없이 자살(로 추정)했기 때문.

그 중 한 명이 의친왕의 10남 이석 씨다. 이석 씨를 가리켜 마지막 황손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2024-12-17 18:30:51 현재 의친왕의 아들은 이석 씨 포함 총 3명이 살아 있다. 11남 이문길, 12남 이정길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구의 사후, 이구의 양자가 되어 황실의 후계자(황사손)가 된 사람이 의친왕 9남 이갑의 아들인 이원이다. 이갑 씨는 2014년, 12월 13일 미국 뉴욕 롱 아일랜드 자택에서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5 창작물에서의 의친왕

최인호의 황실복원 소설이 아닌불교 구도 소설 길 없는 길의 주인공이 의친왕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라는 설정. 의친왕이 탈출 실패 후 실의에 빠져서 주색잡기에 골몰할 때 하룻밤 인연으로 관계를 맺은 17세 기생(...)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전한 삶을 살다가 우연찮게 출생의 비밀을 알고 방황하고 구도를 통해서 극복해나가는 이야기.

만화 순종황제의 뒤를 의친왕이 도피에 성공하여 독립운동가로 살아오다 황실을 이었다는 설정이다. 국민들이 일본인 왕비를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아 이렇게 설정했다고.

대체역사 <대한독립기>도 일단 불쏘시개에 가까운 망작이나, 주인공이 일본에 납치된 덕혜옹주와 함께 수감 중인 의친왕을 구하고 의친왕과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일본에게 최강 최고 최악의 복수들을 펼치는 설정이다.

  1. 약간 애매하지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려고 시도도 했단 점에서 독립운동가로 볼수 있다.
  2. 고종의 아들들 중 이름을 하사받은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는 모두 휘에 흙 토(土)변을 공유한다. 대개 같은 왕의 아들들은 이름자에 같은 부수를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고종의 사가(私家) 일원인 흥선대원군과 그 형제들의 손자 이름도 항렬자를 제외한 이름 글자에 흙 토(土)변이나 흙 토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그리고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鎔)과 이문용(李𪣢鎔).
  3. 1900년 양력 8월 17일 '친왕' 신분의 '의왕'으로 책봉했다. 중화전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 정식으로 금책을 주는 절차는 의왕이 귀국한 후인 1906년 양력 7월 24일에 거행했다. 의왕 이강에게 옥책과 금보를 주다.
  4. 한국 적십자사 초대 총재다. 그래서인지 가끔 헌혈의 집에 헌혈을 하러 가서 보면 벽에 흑백사진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 본 항목의 2번째 사진일 것이다.
  5. 상하이에서 이상설,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렬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6. 서울로 잠입한 외교부장 성락형을 비롯하여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 김사홍, 김승현, 변석붕, 김위원, 심인택, 박봉래, 정일영, 염덕신, 이경창 등 관련자가 1915년 이후 전부 투옥되었다.
  7. 봉오동 대첩의 주역이다.
  8. 당시는 황족에게 허용된 특권이었다.
  9. 당시의 신문 광고나 전단을 보면 그저 '전하가 칭찬하신 고무신', '전하가 애용하는 위장약' 등의 광고 카피가 보이는데 당시에는 앞에 아무 말도 없이 전하라고 하면 의친왕을 가리켰다고 한다. 광고에까지 이용될 정도의 인기였음을 알 수 있다.
  10. 정실 김덕수도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이복동생 부부 영친왕이방자 여사도 각각 '요셉'과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의친왕과 영친왕의 경우는 정식 세례가 아니라 비상세례(대세)일 가능성이 높다. 대세라는 건 임종 직전의 세례로, 일반적인 세례와 다른 방식이다. 대세에 관한 것은 여기를 참조.
  11. 사실 대원군이 자신과 성격, 기질이 가장 닮았다고 생각한 손자는 장손 영선군이다. 하지만 이쪽은 친일 테크. 외모는 할아버지 대원군보다는 아버지 흥친왕을 닮았다.
  12. 현재는 크라이슬러로 들어갔다.
  13. 김완섭에게 사랑받는 학자이니 알아서 판단 잘 하시길. 해당항목 참조.
  14.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도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한다.
  15. 일본이 인정한 의친왕의 자식은 이건이우 둘 뿐으로, 그 때문에 이 둘은 적통이고 다른 이들은 방계로 취급된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