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공족

王公族

1 개요

일제강점기에 구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갖게 된 신분. 일본 정부가 구 대한제국의 황족을 나름대로 예우하기 위해 일본의 신분제에 편입시켜서 만든 것이다.

2 탄생

왕공족의 성립은 1910년의 한일 병합과 동시에 이뤄졌다. 한일 병합 조약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제 및 그 친족들에게 일본제국 체계 내에서 적절한 신분을 부여할 것을 명기했으며, 이에 따라 고종 본인과 순종, 순종의 후계자인 영친왕을 왕족에 봉하고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고종의 차남 의친왕을 공족에 봉했다. 그 외 가까운 왕족들은 조선귀족에 봉해졌다.

3 구성 및 역대 작위자

왕족은 일본 직계 황족을 모델로, 공족은 일본의 방계 황족들로 구성된 궁가를 모델로 삼았다. 성립 당시에는 일본의 황실전범을 준용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운영했지만 이후 1926년의 왕공가궤범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왕-왕비-태왕-태왕비-왕세자-왕세자비-왕세손-왕세손비-공-공비의 순서로 반위가 정해졌다. 이외에 왕의 자녀와 태왕의 자녀, 왕세자의 자녀 및 그 부인들이 왕족의 대우를 받았다.

왕공족이 성립될 당시에 왕족에 봉해진 사람은 합방 당시의 대한제국 황제인 순종과 태황제 고종, 황태제인 이은(영친왕)이다. 또한 공족으로는 고종의 아들이자 영친왕의 형인 이강(의친왕), 고종의 형인 이재면/이희(흥친왕)로, 1왕가 2공가의 구성이다.

친일파 행위를 보인 인물은 ★

  • 창덕궁(왕)
이척(융희황제, 1910~1926)-이은(의민황태자, 1926~1947)
  • 덕수궁(태왕)
이형(광무황제, 1910~1919)
  • 사동궁(공)
이강(의친왕, 1910~1930), 이건(1930~1947)[1]
  • 운현궁(공)
이희(흥친왕, 1910~1912)★, 이준(영선군, 1912~1917)★, 이우(흥영군, 1917~1945)

4 소멸

왕공족은 1945년 일본의 항복 및 조선의 독립 이후에도 존속되었으나 1947년 연합군 GHQ의 지침에 따라 귀족제도를 폐지하며 함께 소멸되었다.

5 관련 신분제도와의 관계

5.1 일본 황족과의 비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신분제도는 황족-화족-사족-평민의 4민 구성이었으나 왕공족이 창설되면서 황족-(왕공족)-화족-사족-평민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왕공족의 서열은 '황족에 준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족과 화족 사이에 해당하지만 특권 및 예우, 훈작에서 보면 왕은 일본의 친왕, 공은 일본의 왕과 동등한 대우를 하는 등 일본 황족 내에서 한 단계 낮춘 것과 같다.

비록 망국인 대한제국의 황족이 왕공족으로 전락한 것이라고는 하나, 왕공족 역시 하나의 특권계급인 것은 사실이며 신분에 상당하는 혜택과 예우를 받았다.

단 황족과는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천황위에 오를 권리 및 섭정에 임명될 권리, 황족회의 의원이 될 권리 및 추밀원과 귀족원에 등원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즉 대우는 황족과 마찬가지이되 제위 계승이나 일본 정치에 끼어들 가능성은 철저히 배제한 셈이다.

5.2 조선귀족

조선귀족 역시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하면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별도로 만든 귀족제도로, 조선인만이 봉작되고 왕공족의 방계가 조선귀족으로 새로 일가를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왕공족 제도 아래의 하위 신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귀족의 예우는 일본 귀족원의 화족의원이 될 자격이 없는 것[2] 외에는 화족과 동일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즈 귀족의 성격과 흡사하다. 즉 왕공족과 황족이 느슨한 연계는 있을지언정 분명히 분리 운용된 것과는 달리 조선귀족은 실질적으로 화족과 동일하게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귀족 역시 화족과 마찬가지로 오등작의 품계로 이뤄졌으나 실제로는 공작 수작자가 없었다. 그래서 공족이 공작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공족은 서양의 '왕족 공작'과 마찬가지로 왕을 계승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공족과 조선귀족은 분명한 신분상 차이가 있다.

6 논란

6.1 친일 논란

조선귀족의 반열에 오른 조선 및 대한제국의 인사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에 오른 데 반해 왕공족은 친일 논란에서 큰 주목을 받지 않은 편이다. 이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망국의 군주라는 점이 한국인들의 동정을 산 데 상당히 기인한다. 여러 왕공족이 일본육군사관학교을 졸업해 일본군에 군적을 두고 있었으므로, 한국인 일본군 장교 중 상당수가 친일파로 분류되었는데 왜 그보다 계급이 높았던 왕공족이 들어가지 않느냐는 의견이 학계에서 제기되기도 했는데, 당시 논의 끝에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 제국이 만든 신분이 왕공족이긴 하지만, 위에 적혀 있다시피 일본 내에서 대한제국을 편입하기 쉽게 하려고 만든 거지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대 운현궁 이희과 2대 운현궁 이준과 같이 친일행위자 명단에 오른 이와 2대 사동궁 이건공처럼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도 있지만, 초대 사동궁 이강과 3대 운현궁 이우처럼 반일 의사를 보이거나 반일인사로 여겨진 인물도 있기 때문에 전체 왕공족에게 친일의사가 있었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점이 있다. 그래서 왕공족에 있던 이들은 왕공족에 들어갔다는 이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친일 행적이 있는지 여부로 친일파인가를 판단했다.

덧붙이자면 영친왕과 이건은 1947년 신적강하 전까지 왕 및 공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우는 전쟁 중 원폭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쭉 조선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단 영친왕과 이우는 워낙 어릴 때 일본에 간지라 인질에 가깝다고 평가되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6.2 일본의 조선 왕가 단절 기도?

일본이 체계적으로 조선 왕가를 단절시키려고 기도했으며, 영친왕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은 마사코 여왕이 불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3] 또한 영친왕의 장남 이진의 변사 역시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한국에서는 우세하다.

그러나 왕공가궤범에 따르면 왕가가 단절될 경우에는 공가가 왕가를 잇도록 되어 있고, 실제로 아들이 없이 사망한 이준의 뒤를 이강의 차남이 이었으며 왕공가에 대한 전반적인 처우가 견제 및 관리에 치우쳐 있던 것으로 볼 때 일본 지도층의 의도는 조선 왕가를 단절시키는 것보다는 자연스레 일본의 체계에 흡수하고 이를 통해 내선일체를 강화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일제의 지배가 시작된 뒤에도 조선 왕가는 상당 기간 동안 조선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으며, 전근대적인 충(忠)의 상징이자 복위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고종 황제장례식, 순종 황제장례식이 범 민중적인 운동을 촉발시킨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일제는 조선 왕족을 굳이 저항을 부르면서 제거하기보다는 적절하게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대로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의 주구로 전락하는 구황족에서 벗어나 공화주의를 모토로 삼게 되었다.

물론 말을 잘 듣지 않는 인물들을 '보다 말을 잘 듣는' 인물로 대체하고자 했을 수는 있다.

  1. 다른 왕족들이 한일합방 이전에 군호 등의 조선식 작위를 받았거나 이후 조선 왕족으로서 추존되었지만, 이건은 일본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조선식 작위가 없다.
  2. 단 칙임의원은 가능하며 이외에도 귀족원 내에 조선 및 대만 칙선의원을 따로 배정했다.
  3. 이방자 여사 본인도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