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메유리 학도대

ひめゆり学徒隊(ひめゆりがくと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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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오키나와현의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오키나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의 교사, 학생으로 구성된 부대의 간호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여자 학도대이다. 통칭 히메유리 부대라고도 불렸다. 제 1고등여학교의 교지명이 '오토히메(乙姫)', 오키나와 여자사범학교의 교지명이 '시로유리(白百合)'였고, 이 둘의 이름을 합쳐서 '히메유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을 목전에 둔 1945년 3월 23일, 양 학교의 여학생 222명과 인솔교사 18명 총합 240명이 학도대로서 오키나와 육군 병원에서 간호요원으로서 복무하게 되었다. 당시 징집된 여학생들은 졸업이 2일 남은 학생들이었으며, 이들 중에서도 10여 명은 오키나와 주둔 제32군 사령부 소속 장교들을 위한 전속 타이피스트 및 군무원으로 차출되었다. 그나마 이들은 5월말 32군 사령부가 키얀반도로 철수하기 직전에 사령부 동굴에서 동원해제되어 귀가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6월 18일, 미군에 포위당한 히메유리 학도대에 군부로부터 돌연 해체명령이 내려져 전쟁터에 내버려지게 되었다[1]. 다음날 6월 19일부터 히메유리 학도대는 약 일주일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지하 참호에서 나오다가, 혹은 나온 이후에 폭격 내지는 자살 종용으로 인해 사망한다. 최종적으로 교사와 학생 240명중 136명 사망.

부대 해체 명령 후, 공식적으로 10명은 아라사키 해안에서 집단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였으며, 또한 한 동굴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3명의 사망,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강제징집이 아닌 자원이라고 발표하고 있으나, 생존자 인터뷰에선 군 당국에서 강요한,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극우세력은 이들을 미군의 희생양인 양 미화시키고 있으나, 실상은 계속되던 본토의 오키나와 차별과 더불어 오키나와의 인간방패 작전 등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히메유리 학도대 또한 일본군의 희생자이다. 게다가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만큼, 아니 그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해야 했다.

전후 이들을 기리기 위한 히메유리의 탑이 건립되었으며, 이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The Boom의 리더이자 보컬이었던 미야자와 카즈후미는 오키나와를 여행하던 중 한 '히메유리 학도대'의 생존자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시마우타(섬노래)를 작곡하게 되었다.영어 번역이 함께 곁들여 있는 영상 다음은 미야자와의 인터뷰 내용.

"오키나와 전쟁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단자결과 히메유리 학도대 같은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 무지에 대한 분노와 당시 군사하의 교육에 대한 의문 같은 것에 화가 나서, 지하에 남겨진 그들의 혼을 하늘로 해방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쿄에서 시마우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일본 우익들은 이 노래를 2차대전 당시 미군의 잔혹함을 비난하는 노래라고 호도하고 있다. 이 노래 가사 중 "반복되는 슬픔은 섬을 건너는 파도와 같이 / 사탕수수 밑에서 영원히 안녕"이라는 부분에서 볼 수 있듯, 외부의 침략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희생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데 이것을 미군이 와서 사탕수수 밭에서 몰살시킨 것으로 곡해하고 있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참고로 오키나와 사범학교는 여자부 말고도 남자부 역시 현내의 전문학교, 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철혈근황대(鐵血謹皇隊)'라는 학도병대에 징집되었다. 공식적으로 오키나와 사범학교에서는 386명 중 224명, 철혈근황대 전체에서는 1780명 중 890명이 전사하였다. 전투로 학생, 교사, 시설을 모두 잃은 오키나와 사범학교와 오키나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는 폐교 절차도 없이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 전체 사망자의 80%는 해산 이후에 나왔다. 전쟁 시에도 패주 때 대부분의 희생자가 나온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건 그냥 군대상층부에서 버린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