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 | |||
날짜 | 1945년 4월 1일 ~ 1945년 6월 22일 | ||
작전명 | Operation Iceberg (빙산 작전) | ||
장소 | 일본 제국, 오키나와 현 | ||
교전국 | 미군 미국 | 일본군 일본 제국 | |
지휘관 | 사이먼 버크너[1] 로이 가이거 윌리엄 홀시 체스터 니미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 우시지마 미츠루 조 이사무 오타 미노루 미카와 군이치 이토 세이이치 | |
결과 | 미군의 승리 | ||
영향 | 몰락 작전을 위한 마지막 받침대 피해를 크게 본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됨. | ||
전력 | 보병 183,000명 -제7보병사단[2] -제27보병사단[3] -제77보병사단[4] -제96보병사단 -제1해병사단[5] -제2해병사단[6] -제6해병사단[7] 제5함대 소속 함선들(51,57,58기동부대) | 보병 120,000명 -제24보병사단 -제28보병사단 -제62보병사단 제2함대 및 연합함대 함선들 | |
피해규모 | 20,195명 전사 군함 36척 침몰 및 기타 함선 300여척 손상 항공기 760기 손실 | 95,000여명 전사 군함 16척 침몰 항공기 1,430기 손실[8] 민간인 10만 명 이상 사망 |
일본어 | 沖縄戦(おきなわせん) 沖縄の戦い(おきなわのたたかい), アイスバーグ(氷山)作戦 |
오키나와어 | 沖縄戦(うちなーいくさ) |
영어 | The Battle of Okinawa, Operation Ice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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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에 깃발을 꽂는 미군. 1945년 5월 30일, 오키나와 나하.[9] |
목차
1 개요
찰스 터너 조이 :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일본군은 전쟁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구역에서는요.체스터 니미츠 : '제정신이 아니다'는 말만 빼고 다 취소하도록.
- 오키나와 상륙 직후 터너 조이 제독과 니미츠 제독의 대화.
철의 폭풍(鉄の暴風)[10]
이오지마(행정구역상 도쿄도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해 있다)를 제외하면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유일하게 현재의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11]
이오지마 전투에서 지옥을 체험했던[12] 미군은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상륙을 감행한다. 이후 6월 말에 함락될 때까지 약 2개월 간 오키나와는 생지옥이 되었다. 오키나와 점령 이후 류큐 독립은 일어나지 않았다(...).[13]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될 무렵, 유럽 전선에선 동부 독일을 제외한 전 독일 지역에 서부 연합군이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독일의 '라인강 방어선'이 무너졌고 루르 지역에 갇힌 B집단군은 포위되어 수 주 후 항복을 하게된다. 라인강과 베를린 사이엔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할 지형적 이점은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막을 수 있었던 부대들은 그 간의 전투로 포위되어 소멸된다.
2 전략적 배경
2.1 1944년 말~1945년 초의 태평양의 정세
1944년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태평양 전선의 승패가 명확히 갈린 해였다. 마셜 제도 강습을 시작으로 라바울 무력화, 사이판 전투[14],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의 항모 기동부대를 재기불능으로 빠뜨리면서[15] 미국은 이제 태평양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 시간을 정해놓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2.2 대만에서 오키나와로
오키나와 침공에 대한 플랜을 처음 내놓은 것은 미국의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사이판 전투 이후 체스터 니미츠와 어니스트 킹의 회담 자리에서 킹 제독이 괌 이후에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은지 물었고 스프루언스는 그 자리에서 "오키나와"라고 답했다.
미 해군의 기존 계획은 마리아나 제도 점령 이후 괌을 거쳐서 대만으로 가서 최종적으로 중국에 상륙, 중국군과 합세하여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을 축출해 내고서 일본의 gg를 받아 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으로 인해 이 대만 침공론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해 버리고 만다. 태평양 해역군에서는 대만침공론의 전략적 의의가 없어지자 팔라우 제도의 펠레리우 섬 침공 이후에는 차후 전략적인 목표가 없었고, 이대로면 필리핀의 루손 섬을 점령, 필리핀을 발판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명확한 마스터플랜을 가진 맥아더 장군이 본인의 소원대로 대일전의 단일 총사령관이 되어 태평양 함대가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떨어질 수도 있는 판이었다.
이 변화를 태평양 함대 내에서 감지한 것이 스프루언스 제독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니미츠가 태평양해역군[16]의 육군 관계자들에게 이를 물었고,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10월 3일, 합동참모본부에 3월 1일까지 오키나와 상륙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아내게 된다.
3 전투 개요
3.1 10・10 대공습
1944년 10월 미군은 오키나와에서의 본격적인 작전에 앞서, 오키나와에 주둔한 일본 해군력 및 방공 전력 등을 미리 손보기 위해서 폭격을 계획하였다. 목표는 일본 군함이 다수 정박해 있는 나하항 및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 여러 활주로 등이었다. 44년 10월 9일 밤 미국 항공모함이 오키나와 근해에 도달하였고, 다음날 오전 6시 경에 출격, 공습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레이더 및 초계기의 부족 등으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공습이 있었던 10일에 오키나와를 담당하던 제32군의 도상연습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 각지의 사령관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지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병사들도 "정말 훈련 실감나게 하네"(...)라고 생각하다가 대처가 늦어지기도 했다. 주민들도 공습을 훈련으로 오해하고 있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공습으로 일어난 화재가 11일까지 지속되어 나하 시가지의 9할이 파괴되는 등. 오키나와는 이 공습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주둔한 일본군의 전투력은 심각하게 깎여 나갔다.
3.2 육상 전투의 양상
펠레리우 전투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오지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은 해안 수비를 포기하고 내륙 수비에 주력해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자체는 대단히 순조로웠다. 그러나 일단 내륙 점령을 위해 진격을 개시하자 각지에서 일본군이 격렬한 저항을 감행했으며, 그 결과 미군의 피해도 급속히 늘어났다. 이 당시 섬에서 농성하는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한 미군의 전술(함포로 해안 방어선 제거→상륙 후 거점 확보→공격해 오는 일본군 격멸)은 43년과 44년의 경험으로 이미 완성된 상태였으나, 이오지마의 일본군은 애초에 미군 격퇴 같은 건 아예 포기하고 최대한 동굴 진지에 틀어박혀 시간을 끄는 것을 택했고 소탕전이 이어지면서 미군 측의 피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오키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군은 류큐 왕국의 요새였던 우라소에 구스쿠(浦添城)를 주요 방어 거점으로 삼아 틀어박혔는데, 12세기 무렵 지어진 이 성이 완전 천연의 요새였던지라 미군의 육상작전을 지휘한 존 하지 소장[17]으로부터 '구조물을 폭격으로 싸그리 날려 버리지 않는 한 이곳의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소리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18] 또 류큐 왕국의 궁성이었던 슈리성은 일본 육군 제32군의 사령부로 개조되어 방어를 담당하였다.[19] 한편 오키나와는 석회암 지대로서 가마(ガマ)라고 불리는 석회동굴이 많이 발달해 있는데, 일본군은 이 가마들을 기지로써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가마에 피난민들이 들어차 있는 경우에는 이들을 내쫓고 점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미군은 여러 차례 이런 전투를 겪어 어느 정도 대처 방안을 마련한 상태였고, 이오지마에 비해 큰 섬인 오키나와는 오히려 대규모 병력이 활동하기 용이했다. 따라서 병력을 집결하고 수송하기도 편리했기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일본군을 아작내기 쉬운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은 동굴 진지를 엿 먹이기 위해 이곳으로 보병용 화염방사기와 M4 셔먼의 화염방사기 장착 모델[20]들을 대량 공수해 왔으며, 덕분에 미군이 이오지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섬인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데에는 겨우 3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가지 더 결정적인 요인은 일본군의 큰 전술적 실책에 있었다.
원래는 최종방어선인 오키나와에서 게릴라전으로 시간을 벌어서 미군을 소모시키는 목적으로 보내졌으며, 시간 끄는 동안 민간인을 비전투지역으로 피난시키고 있는데, 대만에 방어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정예사단이 대만으로 빠졌고, 부족한 인원수를 민간인과 학생으로 보충하라고 명령받는다. 또한 상륙을 초기단계에서 막기위해서 동굴과 참호같은 방어시설을 만들어 놨는데, 갑자기 항공전으로 싸울것이니 비행장을 만들라는 명령이 오고, 기꺼히 비행장을 만들어 놨더니, 그 비행장에서 항공기를 보내지 않고 카미카제 공격에 갈아놨더니, 상부에서 해군[21]이 용감하게 돌격하면서 싸우는데 육군도 돌격해야지!라며 오키나와 방어부대에게 당초 작전의미를 망각한 공격작전을 명령한다. 현지에 있는 부대원도 상부에 대한 빡침에 미칠 지경이다. 게다가 지휘부와의 연락이 단절되면서, 패퇴하는 지휘부는 오키나와 북부에서 민간인을 피난시킨 남부로 퇴각해버리면서 미군의 공격을 유도해버렸다. 애시당초 거점을 확보한 상태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강력한 화력으로 역관광하는 것은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군의 기본 전술이자 특기로, 야습을 막기 위해 방어선에 피아노 줄을 걸어 두고 발견되는 즉시 있는 화력을 다 쏟아 부었다. 결국 이런 반격은 오히려 방어선만 말아 먹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 하지만 일본 측 입장에서도 다행인 게 오키나와에서 시간을 더 오래 끌었다면, 일본에 떨어진 원자탄이 두 개에서 끝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역사에선 투하 시까지 완성된 원자폭탄이 둘 뿐이었지만, 만약 이 시기가 더 늦춰졌다면... 사실 일본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전쟁이 빨리 끝나야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도쿄까지 공습받고 있던 마당에......
오키나와를 수비하는 일본 육군 제32군에게 실제로 오키나와 본섬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했던 것도 비교적 신속한 전투 경과에 한몫했다. 제32군에 배속된 전투부대는 보병사단 4개, 보병여단 5개라는 방대한 것이었으나, 정작 오키나와 섬에 배치된 병력은 9, 24, 62사단과 44여단뿐이었고, 그나마도 9사단이 대만으로 차출당하면서 새로 보충해 준다는 84사단도 수송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견되지 않았다. 만약 84사단이 히메지에서 오키나와로 배치되고 미야코 섬에 배치된 28사단과 나머지 4개 여단(일본군 여단은 보병연대 2개가 기본편성이다.)이 모두 오키나와 본섬에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보병대대의 숫자만으로는 미군보다 더 많아지기 때문에 오키나와를 미군이 2개월 만에 점령을 완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곳의 일본 육군 중 2개 사단만이 완전 장비를 갖췄고, 전차도 95식 경전차 하고와 97식 전차 치하로 구성된 1개 연대뿐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오키나와 일본군에게 주어진 행운이 있었는데 일본군 치고는 비교적 넉넉한 포병 전력이었다. 본래 일본군 사단 및 여단 포병대는 미군에 비하면 양과 질 모두 열악하여 보병 부대에 제대로 된 화력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군과의 교전은 2차대전 내내 고난 그 자체였다. 당시 미국/독일/소련 육군은 사단포병을 4인치 대의 야포를 주력으로 6인치 대의 대구경 야포를 지원 화력으로 구성했지만, 일본 육군 보병사단들은 대부분이 95식 75mm 야포나 동구경의 산포로 사단포병의 주력을 구성했다. 4인치 야포는 그야말로 지원화력이고, 그나마도 포병연대 전체의 야포수는 미/독/소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편이다. 사실 75밀리 야포라고 갖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62사단은 아예 사단포병대가 없었다! 보병여단의 포병대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10cm 이상의 중포는 아예 배치되지도 않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섬에 주둔한 24보병사단의 포병대에게 100mm 야포와 150mm 곡사포가 배치된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필리핀으로 가야 할 중포병 화력들이 수송로의 안전 문제 때문에 배치되지 못한 채 오키나와로 몰렸기 때문으로 일본군에게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행운이었다. 말 그대로 사단포병이 없던 62사단에게 포병 화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군단포병조차 열악하던 당시 일본육군에게 야전군 직할로나 배치되는 중포들이 군단에게 무더기로 굴러들어 온 것. 거기다 근거리에서 미군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던 98식 중박격포도 있었는데, 최대사정은 1.2km로 매우 짧지만 거대한 쓰레기통에 작약을 가득 채운 듯한 포탄 때문에 한번 터지면 파편량이 엄청나서 모여 있는 보병에게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건으로도 도저히 오키나와 방위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일본군과 미군의 전력차는 컸다.
3.3 해상에서의 전투 양상
3.3.1 기쿠스이 작전
"의욕 있는 건 좋은데, 이거 정말 성공할 수는 있는건가?""-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카미카제 공격을 받고 불타오르는 미 해군 항모 벙커힐[22] |
미 해군 내 오키나와 상륙 반대론자들은, '이오지마에서도 일본 앞마당에 가니까 육상 발진 항공기의 항공 위협에 계속 시달렸는데, 큐슈에서 채 1000km도 떨어지지 않은 오키나와는 카미카제 등을 비롯한 일본군의 육상 발진 항공기에 의한 항공 위협은 이오지마에서 겪었던 것과 견주어도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항공 위협의 차단을 위해서 미 해군은 영국 태평양 함대까지 끌여들였으며,[23] 평소에 별로 사이도 안 좋던 육군 항공대에 사정해서 제21폭격사령부 소속 B-29를 동원해 카미카제 특공기가 이륙할 것으로 예상되는 비행장을 쉬지 않고 폭격해서 아예 비행기를 띄우지도 못하게 하려고 했다.[24]
이런 피눈물 나는 노력에도 미 해군은 4월 6일부터 6월 22일까지 시행된 기쿠스이 작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격침 26척에 피격에 의한 피해는 164척이었다. 기쿠스이 작전에 동원된 일본 항공기 수가 육해군 항공대 합쳐서 약 8,000대[25]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로 관한 미 해군의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육상 전선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서 해군 지원 함대가 붙잡힘으로써 점점 더 카미카제에 노출된다고 생각한 니미츠 제독은 4월 23일 시찰 나온 자리에서 오키나와의 육군 총사령관 버크너 중장에게 전선을 조금 움직이라는 압박을 주었으나 버크너 중장은 "육군 소관인데 해군이 상관 마셈." 했다가 짤릴 뻔 했다. 미 해군이 카미카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는지 알만한 사례.[26]
기쿠스이 작전 자체는 카미카제를 이용해서 최대한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였고, 비용 대비 효과로 보자면 상당한 낭비였다. 이 작전의 일부로 행해진 천 1호 작전에서 전함 야마토와 상당한 해군 전투함들도 상실되었다. 야마토를 이용한 기쿠스이 작전의 요지는, 해군 선박을 먹이로 내주고, 미군 항공기를 대공포로 격추, 이후 항공기로 인한 호위를 잃은 미군 항모를 카미카제로 요격, 격침한다는 것이지만[27], 실제 전과는 일본군은 전함 야마토, 경순양함 야하기, 구축함 4척 침몰 외에도 구축함 4척이 크고 작은 손실을 입고 야마토에서만 전사 3,055명, 그 외 함선에서 1,187명이 전사했지만, 미군은 전투기 3대, 헬다이버 4대, 어벤저 뇌격기 3대가 격추되었고 조종사 4명과 항공 승무원 8명이 전사하였다. 한마디로 해군의 반자이 어택!
4 그 이후
일본군의 잔혹성이 자국민에게도 예외가 없음을 보여준 전투이기도 하다. 이전부터 류큐인들을 차별 대우해 오긴 했지만 그 전에 사이판 전투 때도 있었다.
이 전투 내내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영예롭게 죽기를' 강요[28]하여 수많은 무고한 오키나와 도민(島民)이 희생당했으며[29], 전쟁 통에 끌려온 조선인 다수도 이 전투 도중에 죽었다. 현재는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일본군에 의한 학살에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오키나와 전투로 희생된 다수의 민간인을 기리는 평화 공원이 있으며, 당시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위한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30]
오키나와전투 중 조선인 군속, 위안부와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일본군의 만행을 재일교포가 오랜 시간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제목은 '오키나와의 옥편'.
일본군은 이외에도 류큐어 사용자나 미군의 삐라를 주운 주민들을 스파이로 규정해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또 병사들 가운데 이동이 힘들 정도로 중상을 입은 자들을 청산가리가 든 우유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기어이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강간 및 학살을 저지른 전적이 있다. 이래서 미국은 뻔뻔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랍시고 지껄이자 열 받은 미의회가 대동단결하며 위안부 성명을 통과시켜버렸다.[31]
다만 미군의 공격으로 인해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 많은 수가 눈 먼 포탄에 목숨을 잃었다. 또,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는 일본군을 끄집어 낸답시고 위해 연막탄[32]을 사용했는데, 사용이 금기시 돼있는 생화학무기는 아니었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독성이 너무 강한 탓에 그 속에 숨어 있던 민간인들이 다수 사망하였다. 물론 일부 병사들의 일탈로 강간이나 살인이 저질러졌지만, 이런 짓을 한 미군 다수가 총살당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33]일본이 욕 먹은 건 이걸 미국 정부가 주도하거나 모른 척했다는 투로 말했기 때문. 원래 사람은 자기 수준에서 남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뿐만 아니라 영양 실조 및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도 매우 많았다. 상당수 피난민들은 오키나와 북부 얀바루(山原) 밀림 등으로 몸을 피했는데, 이곳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되었고, 영양 부족 및 의약품 부족으로 인해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항복 후 미군 감시정으로 이동하는 일본군, 1945년 5월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유일하게 일본군 투항자가 만 단위를 넘기고 좌관급 장교[34]가 포로가 된 전투이다. 최종 집계된 일본군 포로의 수는 약 1만 5천명으로, 일본군 수비대의 8%에 달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이전에 벌어졌던 전투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고[35], 일본군 병력의 상당수가 현지 징집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수의 일본군이 포로가 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36] 미군이 놀랄 정도로 많이들 항복했는데, 심지어는 몇백 명 단위로 몰려와서 항복하는 통에 함정이 아닐까 의심까지 했을 정도였다. 미군의 심리전이 상당히 통한 탓도 있으며, 상당수의 일본군이 이미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소위 '옥쇄'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했던 것. 설령 본토 결전이 벌어졌더라도 일본 군부가 주장한 '최후의 한 명까지' 저항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인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2011년, 일본은 이걸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 주민들이 미군이 두려워 집단 자결했다고 교과서에 실었다.[37] 이때 주일 미군은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구조와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어그로 키핑은 세계적인 선진국 일본 미군이 상륙하자 주민들의 집단 자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38] 그 이유가 일본군이 귀축영미 운운하며 미군이 상륙하면 남자들은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강간당한다며 주민들에게 계속 세뇌시켜 놨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수준에서 생각하고 말을하고 행동한다. 완벽한 일본의 자기 소개 이걸 믿은 주민들은 미군이 오기 전에 딸과 부인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
물론 일본군이 떠들어댄 말들은 당연히 얼토당토않은 개소리였고 미군과 접촉을 해 사실을 알게 된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에게 상당히 협조적인 태도로 응했다. 퍼시픽 논픽션 소설판을 보면 미군의 대민 작전이 나오는데 오키나와 주민들이 협조적으로 나와서 수용 구역내에서 나오지 않으면 자치권을 보장해 주고 미군의 작업을 돕는 대신 식료품 등을 받아가는 장면도 나온다.[39] 지나가던 오키나와 농부에게 게이샤는 어디에 있냐고 묻자 농부가 유창한 영어로 여기에는 없고 시내에 가 보라고 해서 미군 병사들이 놀라기도 했다. 그 농부는 미국 농장에서 취업한 경력이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한편 이오지마에 이어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학을 뗀 미군은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는 일본 본토 공격을 감행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미국은 소련의 대일 참전을 강력히 주문하는 한편 원자탄을 이용해 일본에 압박을 가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또 오키나와는 이오지마와 함께 몇 안 되는 미군에 전투를 치르고 점령당한 일본 본토이기에, 1951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뒤에도 오랫동안 미국(미군)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문서 참고. 이오지마는 1969년에야 일본으로 복귀했으며, 오키나와는 1972년에 일본 본토로 복귀, 큐슈에 속한 오키나와 현이 되었는데 현재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하며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이에 대해서는 류큐 독립 운동 항목을 참고하자.
오키나와 섬의 교통에 있어서도 이 전쟁은 전환점이 될 만큼 굉장히 중요한데, 이 전쟁을 계기로 오키나와 섬에 있던 모든 철도 노선이 쓸 수 없을 지경으로 박살이 났고, 전쟁 이후 섬을 접수한 류큐 열도 미국민 정부가 도로 교통 복원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전쟁 이후 미군 및 미군정이 섬에 자가용 문화를 전파했고, 철도는 복구하지 않음으로써 오키나와 섬은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자동차 사회로 변모하였다.
5 창작물에서
- 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 (激動の昭和史沖縄決戦) (영화) - 1971년작.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 각종 일본산 서브컬처에서 나오는 적이 7할, 바다가 3할이란 대사가 나온 원작이다.
-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 미 해병대 후반 미션의 배경이 오키나와 슈리성 전투이다. 주인공 C. 밀러가 소속된 중대가 슈리성에 돌입하여 점령하는 장면이 미군 캠페인의 마지막.
- 더 퍼시픽 9화 - 평범한 아낙네(그것도 갓난애를 업은!!)에게 부비트랩을 장착해 터트리고 그 직후 민간인을 인간방패 삼아 총을 쏴 갈기며 개돌하는가 하면, 도민들을 내쫓은 뒤 기관총으로 갈기는 천하의 개쌍놈 일본군의 미친 짓을 볼 수 있다. 유진 슬레지는 이 전투의 후유증으로 PTSD를 심하게 앓게 되었다.
- 사탕수수밭의 노래 - 일본 드라마로 오키나와 출신 가족들이 겪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그 본능이 강한 가장과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으로서 겪는 차별이 표현된 작품으로 전반적으로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일본 버전. 본토에서 온 일본군이 오키나와인들을 차별하거나 사진사 출신 아버지가 부상당한 미군 파일럿을 학대하려는 일본군 장교를 막는 등 일본군에 대한 비판과 반전주의를 표하는 작품.
- 핵소 리지 - 항목 참조.
- ↑ 육군 중장, 제10군(미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으로 오키나와 지상전을 총괄지휘했다. 그전엔 2차대전 기간의 대부분을 알래스카 주둔군 사령관으로 지냈다. 전투 막바지에 전선 시찰을 나섰다가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사, 사후 1954년 대장으로 추서됨
- ↑ 참전 전엔 미국 서해안지역의 해안경계부대로 1943년 북태평양 애투섬 전투를 시작으로 1944년 초 마셜 제도의 콰잘린 환초 상륙작전의 주력부대였으며, 이후 필리핀 레이테섬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 종전 후 주한 미군정의 점령군으로 종사하다 48년 일본으로 철수했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이후 1971년 철수 때까지 주한미군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사단이다. 2016년 현재는 사령부 편제만 유지하고 있는 페이퍼 사단.
- ↑ 원래는 뉴욕주 주방위군 부대로 1942년 초 증원군으로 하와이에 보내져 주둔군으로 지내다 1943년 말 마킨 섬 전투를 시작으로 사이판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 마킨과 사이판에서 끔찍한 전투력을 선보여 사단장이 현지에서 해임당한 것으로 유명한(2차 대전 당시 고위 지휘관의 현지 해임 사례는 많으나 이 경우 타군(해병) 상관이 임의로 해임한 것이라 큰 논란을 일으켰다.)사단이다. 이후 사단장이 교체되고 휴식기동안 재훈련을 거듭해서 오키나와 전투 시점에선 무난한 1선급부대로 활약했다. 오키나와 전투 시점에선 초기에 제10군의 예비대였으나 4월 19일 공세에 투입되어 1달간의 전투후 오키나와 점령군으로 배속되어 미 해병대와 교체됨.
이기자 부대와는 관계없다! - ↑ 이 사단은 1차대전 당시 뉴욕시(City)와 뉴저지의 거주자들을 기반으로 부대장병이 꾸려졌고 2차대전 당시의 사단마크가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다. 사단의 후신격 부대(제77유지여단, (2016년 현재?)제77지역 준비태세(readiness)본부)도 이들 지역에 기지를 두고 활동하고있다. 2차대전 시점에선 괌전투를 시작으로 레이테 섬 지상전과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다.
- ↑ 과달카날, 글로스터, 펠렐리우를 거친 태평양 전쟁의 레전설이자 더 퍼시픽의 주인공 부대.
- ↑ 1943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해병대 역사상 최악의 혈투를 벌인 사단으로 역시 태평양의 레전설급 부대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0군의 예비대 역할을 맡다가 전투 후반부에 전선 투입되었고, 10군 사령관 사이먼 버크너 중장이 2사단 예하 8연대의 전투 현장을 시찰하다가 전사하게 된다.
- ↑ 괌 탈환전에 참가했던 제1임시해병여단에 29해병연대를 추가하여 신편된 사단으로, 예하의 제4해병연대는 제1기습연대가 정규연대로 재편된 부대이다. 역시 태평양 전쟁의 레전설급 부대.
- ↑ 수많은 항공기들이 카미카제 공격에 쓰였다.
- ↑ 사진의 성조기를 달기 전에 벌어진 해프닝이 있다. 슈리성을 점거한 미군이 아군 오폭을 방지하기 위해 성조기를 달려고 했으나 마침 성조기가 없었는데, 이 때 미국 남부 출신의 두젠버리 대위가 대체물을 꺼낸 것이 하필이면 한국으로 치면 욱일기나 인공기 같은 들면 욕 먹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맹이 쓰던 남군 깃발이었던 것. 이 남군 깃발을 보고 지휘부는 처음에 뜨악해했지만, 이내 웃어넘기며 진짜 성조기를 전달해 사진처럼 다시 걸게 한 것이다. 여담으로 성조기는 글로세스터 곶과 펠레리우에도 꽂힌 깃발이었다.(출처 :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
- ↑ 오키나와에서 오키나와 전투 당시를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 ↑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소련군이 쿠릴 열도(지시마 열도) 슘슈 섬(슈무슈 섬)에 상륙하면서 치른 슘슈 섬 전투이다.
- ↑ 이오지마 전투가 실질적으로 끝난 것이 3월 26일이었고 이 시점의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의 준비 단계로 오키나와 섬 서부의 게라마 열도에 상륙하여 물밑작전을 벌이고있었다.
- ↑ 왜인지 하면 한반도나 만주, 동남아시아 일대와 달리 오키나와 일대의 섬들은 일본 정부가 식민지가 아닌 내지, 영토로써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이전 문서에는 사이판 탈환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사이판을 비롯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전쟁 전에도 일본령이었던 지역으로 "탈환"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부적절하다. 전전 미국령이던 괌의 경우는 "괌 탈환전"이 맞다.
- ↑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 항모 기동부대가 사실상 무력화 된 것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미드웨이에서 입은 피해는 크기는 했지만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축구로 치면 미드웨이는 동점골정도라는것이다오히려 인적 자원의 피해는 미드웨이 이후에 과달카날과 부겐빌, 라바울 방면에서 조종사를 포함한 항공 정비병들이 손실된 것이 더 컸고, 항모 기동부대 자체는 1943년 후반부 즈음에는 다시 미군과 붙어 볼 만한 전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마리아나에서 일 항모 기동부대가 대패한 것을 두고 "일본군의 등뼈를 부러뜨린 전투"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 해역군(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태평양 함대)과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 해역군으로 나뉘어져 있었음.
- ↑ 미군정 당시 38선 이남의 한반도를 통치했던 그 사람이다.
- ↑ 결국 폭격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끝에 3주 만에 점령당했다. 이후로 우라소에 구스쿠는 아직까지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나 워낙 처참하게 파괴되었기에 복원 작업은 지지부진.
- ↑ 이쪽도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복원된 건 90년대이며, 아직도 복구중인 부분이 있다.
- ↑ 전차포가 아닌 화염방사포를 장착한 후기형 화염 방사 전차로 최대 200m까지 뿜어낼 수 있었다.
- ↑ 당시 항공부대는 해군소속
- ↑ 저렇게 됐는데도 격침은 안됐다.
- ↑ 킹 제독은 영국이 다 해 놓은 밥에 밥숟가락이나 얹으려는 거라며 반대했지만, 현장 지휘관인 스프루언스랑 니미츠가 찬성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었다.
- ↑ 특공기 이륙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뼛속까지 전략폭격론자였던 커티스 르메이는 불만이 가득해서 기회만 나면 다시 산업 시설 폭격하게 해 달라면서 징징거렸다. 여기에 헨리 아놀드 육군 항공대사령관까지 가세해 해군에 불만을 제기하였으나 킹 제독은 그럼 해군 협조 없이 육군 항공대 혼자 잘해 보시던가 라고 배째라 모드로 일관하여 불만을 잠재웠다.
- ↑ 카미카제에 동원된 자살 특공기가 1,900여대 나머지는 호위 또는 통상 공격 임무로 투입됨.
- ↑ 이건 카미카제에 예민해져 있던 것도 한몫 하지만, 버크너 중장의 태도가 더 큰 문제였다. 니미츠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자신을 단순한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아니라 태평양 해역군의 통합군 사령관으로 여기고 있었고, 자기 부하들에게도 해군뿐만 아닌 통합군으로써의 시각을 계속 요구했다. 사이판에서 같은 해군(해병대)였던 홀랜드 스미스 중장이 육군 랄프 스미스 소장을 해임했을 때도 각군의 차이를 간과한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잘못이 더 크다 보고 내친 판에, 저런 식으로 육해군 선을 딱 그으려는 행위는 니미츠 제독의 눈밖에 벗어나기 충분했다. 바로 그날 오후에 이어진 브리핑에서 자기가 어떤 처지에 처해졌는지 낌새를 챈 버크너 중장이 꼬리를 내리는 통에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 ↑ 사실 이래도 당시의 미군 앞에서는 티스푼으로 바닷물 퍼내기 같은, 의미가 없는 행동이다. 왜냐 하니 저 무렵의 미 해군 항공모함 규모가 호위항공모함까지 포함하면 100척이 넘었기 때문. 호위항공모함을 빼고 정규항공모함으로만 쳐도 10척은 넘었던 때다.
- ↑ 어떤 사례에는 영예로운 죽음을 강요해 소년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때려 죽이게까지 했다고 한다. 또 한 사례를 꼽자면 미군에게 욕보일 것이 두려워 먼저 딸을 죽인 한 노인은 미군이 듣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식량과 약품을 지급하자 그것들을 이미 죽은 딸의 시신 옆에 두고 서럽게 펑펑 울었다고 한다. 괜히 아까운 딸의 목숨만 버린데다 그 목숨을 아버지인 자신이 거두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런 사례가 다수라는 점에서 2차 대전 말기의 일본군이 얼마나 광적이었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걸 일본 우익이 자랑스럽게 교과서에 수록하려 하자 생존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한 적이 있다. 사실 전쟁을 앞두고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세력들이 자신의 부인이나 가족을 살해하는 것을 숭고하게 표현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적에게 더럽혀질 바에는 내가 죽인다는 것인데... 가족(특히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일 뿐이지 결코 미화돼서는 안 될 살육행위일 뿐이다. 계백 장군의 행동(이라고 알려진)도 이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황산벌(영화)에서 이를 잘 지적한 것. 어느 나라나 극우 세력은 마사다 요새와 같은 사례를 숭고미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주의하자.
- ↑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으나 19세기 말엽에 일본 땅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 땅이라고는 해도 식민지 취급을 받을 때도 종종 있었고, 그래서 자기네가 불리해지자 본토 취급하여 애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군에 대해 주민들의 반감은 매우 컸다.
- ↑ 오키나와 못지않게 조선인이 많이 희생된 히로시마의 경우 조선인을 위한 공간이 최근까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의 차이를 드러내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 ↑ 이 때 네오콘들이 반대를 하려고 했으나 일본 정부의 저 성명(...)으로 인해 네오콘들도 제대로 격노해서 위안부 성명을 찬성하거나, 일본의 로비를 무시했을 정도다. 네오콘의 아버지 세대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이란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일본 정부의 화려한 패드립 시전. 당연히 네오콘들이 안 빡칠리가 없다. 즉, 일본의 저 성명은 네오콘들의 역린을 건드린 셈.
- ↑ 사실 연막탄에도 어느정도 독성 성분이 있는데 보통 작전시 병력 기동의 은폐용으로 쓰니 넓게 퍼져서 그렇지 좁은 공간(동굴, 참호)에 투척하면 밀집된 짙은 연기로 인해 사람이 숨쉬기가 힘들다..
- ↑ 그러나 추축국의 만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미군은 그들이 가진 풍부한 보급품을 활용, 독일, 일본의 피점령민들과 합법적으로 교류했다.
- ↑ 대표적으로 지구전 계획의 입안자였던 일본 제32군 작전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민간인으로 위장, 섬 북부로 탈출 중 발각)과 오키나와 북부 지역의 방어 책임자로 모토부 반도 전투의 일본군 지휘관이었고 전투 이후 게릴라전을 벌였던 우도 대좌(종전 후 45년 10월에 항복) 그외에도 소위 이상의 계급을 가진 장교가 200명 넘게 포로가 되었다. 장성급들은 전투 막바지에 죄다 자결했다...
- ↑ 일본군은 전투 전, 오키나와 현지 징집을 통해 총 병력(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병력은 약 8만 명)을 10만 이상으로 늘렸으나 섬에 상륙한 미군 지상군은 20만 명이 넘었다.(거기에 별도로.. 해상의 미 해군 병력수는 30-40만 명..),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한 미 육해군 병력의 수는 54만 명으로 이것은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미군의 최전성기 병력과 맞먹는다.
- ↑ 사실 5월 말까지만 해도 포로의 수는 극소수였으나 5월 초에 있었던 일본군의 반격이 그들 자신의 전투 병력 손실을 극심하게 했다. 그래서 비전투병들로 손실을 보충했는데 이 영향이 컸다. 일본군 포로의 대량 발생은 6월이 되면서 작용됐다.
- ↑ 이게 헛소리라는 것은 아주 미 군정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미군에게 합리적인 보수와 먹을거리, 잠자리를 보장받은 후에는 전선에 보급품을 나르는 위험천만한 임무까지 자원해서 참여했다. 자세한 내용은 미 군정에서 주민들에게 보장해 준 것과 주민들의 이에 대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 ↑ 오키나와 전투 이전부터 있었다. 당장 1년전에 있었던 사이판 섬의 전투에서 민간인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부터 보자.
- ↑ 사실 주민들에게 작업을 시키는 것은 미군 측의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다. 주민들이 스스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아가도록 하는 것이 주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