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제13 의용산악사단 '한트샤르'
(13.Waffen-Gebrigs-Division der SS 'Handschar'(kroat.Nr.1))
독일군 무장친위대에 속해 있던 외인부대 중 하나. 순혈 아리아인으로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SS는 달지 않았다.
1 사단의 창립
유고슬라비아 침공 직후인 1941년 4월에 독립한 괴뢰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인구 630만명의 소국으로 가톨릭 크로아티아인이 330만, 그리스정교도의 세르비아인이 200만, 무슬림 보스니아인이 70만명으로 복잡한 국가 형태를 가졌다. 보스니아인은 수적으로 열세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크로아티아 내무성 직할부대우스타샤와 세르비아 왕정복고주의 파르티잔(체트니크) 쌍방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등 보스니아인의 불만은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었다. 친위대 제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이 불만을 대 파르티잔전에 이용할 것을 계획하였고 아민 알 후세이니의 도움 하에 1943년 2월 10일 총통명령이 떨어져 약 15,000명의 보스니아 의용병으로 1개 SS 사단 편성이 개시되었다. 편성지는 프랑스 리옹 남쪽의 멘데 주변으로 정해졌고 '크로아티아 SS 의용산악사단'으로 명명되었다. 8월 9일에는 칼-구스타프 자우버츠바이크(Karl-Gustav Sauberzweig) SS 소장이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초기 사단편성은 2개 산악엽병연대(4개 대대), 1개 산악포병연대(4개 대대), 1개 전차엽병대대(3개 중대), 1개 정찰대대, 1개 고사포대대(3개 중대), 1개 공병대대, 1개 보충산악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2 SS 의용병의 반란
1943년 9월 17일, 무장 SS가 생긴 이래 미증유의 사건, SS 의용병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주모자는 SS 공병대대 소속의 소대장 펠드 드챠니크 SS 상급사관후보생으로 드레슨 SS 공병학교 시절부터 세르비아 인민해방전선과 프랑스 무장 레지스탕스 마키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에 다른 소대장 2명이 동조하였고, 16일 밤의 보초임무 당번병 14명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17일 새벽 5시에 주둔군이 묵던 호텔 '모단'에 침입하여 독일인 장교, 하사관 9명을 구속하고 SS 공병대대장을 포함한 5명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보스니아인인 SS 공병중대장 하림 말코치 SS 중위의 설득에 시간이 걸리게 되었고, 결국 긴급 소집된 제1공병중대 제1소대가 호텔로 들이닥쳐 드챠니크 SS 상급사관후보생외 1명이 사살되었고 반란은 허무하게 진압되었다. 이후 군사재판에서 반란에 가담한 병 14명은 전원 총살형에 처해졌고, 정치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 825명의 장병은 무장해제되어 다하우 수용소를 거쳐 대부분이 토트 기관에 편입되었다. 사단은 독일 본국의 노이하마로 이동되었다. 한편 반란부대의 설득에 최후까지 응하지 않은 말코치 SS 중위에게는 1급 철십자장이 수여되었으나 1947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3 작전 투입
1943년 10월, 사단은 SS 제13 의용산악사단으로 개칭되어 2개 산악엽병연대는 SS 제27, 제28 의용산악엽병연대(SS27, SS28GJR)로, 나머지는 부대번호 13이 부여되었다. 1944년 2월초, 마침내 110량 이상의 열차에 탑승한 완전무장 병력 약 2만명은 빈을 경유하여 크로아티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사단은 3월 10일부터 사페 북방의 파르티잔 출몰 지역에 투입되어 제42 엽병사단과 함께 소탕전을 전개하였고, 5일후에는 사페강을 돌격보트로 도하하여 도리나강을 따라 좌익은 SS27GJR, 우익은 SS28GJR이 중심이 되어 남진하였다.
그후 사단은 4월 11일부터 '부활절 달걀' 작전에 참가하여 츠보니크 부근에서 제Ⅲ 보스니아 파르티잔 군단과 교전하였다. 부대 통솔은 극히 힘들어 약탈과 살해 등이 자행되었지만 소수의 독일인 장교로는 올바른 보고가 되지 않았다. '3년전 파르티잔에 약탈된 소 3마리를 찾기 위해 '사단의 일부에 출동 명령이 떨어지는 등 작전 지휘 또한 혼란스러웠다. 1944년 7월 7일 '만월' 작전이 실시되어 포사비아 지방에 집결한 3개 파르티잔 사단군에 대하여 사단은 북방에서 공격을 가하였다. 한편 각 연대의 제Ⅳ대대 등의 사단 주요 병력이 새로 편성된 SS 산악사단 '카마'의 모체로 전출되고, 자우버츠바이크 SS 소장도 SS 제9 산악군단장으로 전출되었다. 새 사단장에는 SS27GJR 연대장인 데지데리우스 함펠(Desiderius Hampel) SS 소장이 취임하였다. 이무렵 파르티잔에 의한 도로망 파괴공작이 급격히 증가하여 철도 복원과 보안이 사단의 주임무가 되었다. 하지만 사단의 사기는 저하하여 탈주병이 잇달아 병력은 장교 346명, 하사관 1,950명, 병 11,967명으로 감소하였다. 여기에 비해 사단의 장비는 일급품이었다.
4 SS 제13 의용산악사단 '한트샤르(Handschar)' 전투서열
사령관: 데지데리우스 함펠(Desiderius Hampel)
-사단본부: 사단본부중대(75mm 대전차포 3문, 81mm 박격포 2문, MG 4정) 외
-SS 제27 의용산악엽병연대(3개 대대): 37mm 대전차포 6문, 81mm 박격포 12문, 50mm
박격포 24문, 경보병포 2문, 산악 20mm 고사포 3문, 10cm 네벨베르페 6문, 화염방사기 10기,
기관총 162정
-SS 제28 의용산악엽병연대(3개 대대): 27연대와 동일
-SS 제13 산압포병연대(본부중대: 4연장 20mm 자주고사포 4량)
제Ⅰ대대: 75mm 산악포 8문, 기관총 4정, 경산악수송단렬
제Ⅱ, 제Ⅲ대대: 제Ⅰ대대와 동일
제Ⅳ대대: 105mm 산악포 12문, 기관총 6정, 15t 포병수송단렬
-SS 제13 정찰대대(2개 중대): 81mm 박격포 4문, 기관총 22정
-SS 제13 전차엽병대대(3개 중대): 75mm 대전차자주포 10량, 견인식 75mm 대전차포 9문,
견인식 50mm 대전차포 9문, 기관총 28정
-SS 제13 고사포대대(3개 중대): 20mm 고사포 12문, 37mm 고사포 9문, 88mm 고사포 4문,
기관총 8정
-SS 제13 공병대대(3개 중대): 화염방사기 12기, 기관총 31정, B형가교단렬 외
-SS 제13 야전보충대대, SS 제13 통신대대 외 지원부대
이후 2차에 걸쳐 파르티잔 소탕작전에 참가한 사단은 사단본부는 자그레브에, 나머지 부대는 아그람~시리 가도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10월 21일, 이번에는 사단본부 보안중대가 반란을 일으켜 101명의 병이 20mm 고사포 3문, 기관총 4문, 트럭 수량과 함께 파르티잔측으로 달아난 사건이 발생하였고, 10월 16일부터 23일의 1주일동안 자그레브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에서 소총 881정, 기관총 22정, 권총 104정과 기관단총 15정이 사라져버리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5 헝가리 방어전
1944년 11월초, 헝가리의 아파틴 부근을 돌파한 소련군이 도나우강 서측에 교두보를 마련해 남동전선 전체가 위기 상황에 빠졌다. 교두보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SS27GJR 제Ⅰ대대, SS28GJR 제Ⅱ, 제Ⅲ대대, SS 제13 산악포병연대 제Ⅲ대대와 공병대대의 일부가 SS28GJR 연대장 한스 하케 SS 중령의 지휘하에 전투단 '하케'(Kampfgruppe Hanke)로 편성되어 바티나 교두보로 긴급수송되었다. 이것이 보스니아 의용병으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동부전선이었다. 하지만 교두보에 대한 반격은 모두 격퇴되었고, 처음 보내진 1,200명의 병력은 200명으로 감소하였다. 11월 30일, 소련군의 대공세로 전선이 붕괴되자 전투단 '하케'는 남쪽의 도리나 전선에서 구원하러 달려온 제1 산악사단과 합류하기 위해 서쪽으로 혈로를 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9월에 프랑스에서 무장해제된 병력이 의용보조병으로 사역되었고, 즉시 교섭하여 전투단에 배속되었다. 12월에 전투단은 크로아티아에서 후퇴해 온 사단과 발크스 부근에서 합류하여 재편성이 행해졌고, 콘라트 대장 휘하의 제57군단에 배속되어 힘겨운 후퇴전 끝에 바라톤호 남방의 말가리타 진지까지 후퇴하였다.
1945년 3월 6일에 개시된 독일군 최후의 공세 '봄의 새싹' 작전에서, 바라톤호 남방전선에 있던 제2 전차군은 SS 제6 전차군의 주공세 개시와 동시에 견제와 양동작전을 겸해 보조공세를 실시하게 되었고, 제57군단도 중앙에 SS 제13 의용산악사단, 좌익에 제71 보병사단, 우익에 SS 제16 기갑척탄병사단 'SS 장관(Reichsfuher-SS)'의 서열로 나니카니쟈 부근에서 동쪽으로 공세를 개시하였다. 하지만 해빙으로 인한 진흙으로 고생하다 주공세력과 마찬가지로 실패하였다. 3월 27일 사단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이미 전선에서의 작전은 무리로 판단하여 후방의 방어선 구축 임무로 변경되었다. 4월 3일에 사단은 무르강을 도하하였고, 독일 국경을 건너 카크 부근에서 '제국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병력은 한줌의 보스니아 의용병과 국민돌격대로, 반공주의 헝가리병과 미벌중대의 이탈리아병 165명이 보충되어 배속되었다.
보급은 상당히 악화되었지만 다행히 소련군의 주공격 목표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빈으로, 향했으며, 이 방면에는 2선급인 불가리아 제1군이 대치중이었다. 사단은 제57군단 일부, 즉 제118 엽병사단, 제71 보병사단과 함께 말부르크 동쪽에 간신히 방어선을 유지하였다. 1945년 5월 3일, 사단장인 함펠 SS 소장, SS27GJR 제Ⅱ대대장 알베르트 슈템베델(Albert Stenwedel) SS 소령, SS 제13 정찰대대장 헬무트 킨츠(Helmut Kinz) SS 소령, SS27GJR 연대장 카를 리케(Karl Liecke) SS 중령, SS28GJR 연대장 한스 하케(Hans Hanke) SS 중령, 이렇게 5명에 대해 장년의 수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2일후, 최후의 생존 보스니아 의용병에 대해 행동의 자유가 떨어졌고, 사단 잔여는 3개로 나누어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5월 7일, 케라스도르프 부근의 '울스라 진지'에 도착하였고, 미군에 투항하여 종전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