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프 브로즈 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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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요시프 브로즈 티토
(Јосип Броз Тито, Josip Broz Tito)
생몰년1892년 5월 7일 ~ 1980년 5월 4일
출생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로아티나-슬라보니아 왕국[1] 크메로베크
사망지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르주베자나
정당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종교없음(무신론)
배우자펠라지자 브로즈
헤르타 하스
주반카 브로즈

유고슬라비아리즈시절을 이끈 인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대통령. 본명은 요시프 브로즈이며, 티토는 그가 젊은 시절 노동운동에 몸담을 때 썼던 가명이다. 크로아티아어로 "네(Ti)가 이것(To)을 해라" 라는 농담구 어조에서 따온 이름이라고.영어로 쓰면 You do네? 뭐요?

북한에서는 러시아어식 표기로 이오씨프 브로즈 찌또로 표기하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기이다. 세르보크로아트어는 러시아어와 달리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띠또라고 적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잘 모르고 러시아어 키릴문자 표기를 그대로 쓴 모양. [2]

1 생애

1.1 공산당 입문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3]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기술공으로 발칸 반도를 떠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오스트리아 육군에 강제 징집되었고, 러시아군에 생포된다. 포로수용소에서 러시아 혁명을 목격하고, 이때부터 공산주의의 이념에 동조하게 된다.

1.2 반나치 지도자로

귀국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당에 입당해 티토라는 가명으로 활동했고, 각 공장의 파업을 주도하다가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5년 간 복역한다.

이 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4]하는 등 해외를 배회하다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군대가 이탈리아, 헝가리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귀국해 빨치산 부대를 이끌며 게릴라전으로 나치 군대와 맞서 싸운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실이 나치군에게 그리스로 가는 도로를 내주고 세르비아민병대체트니크가 나치와 협력해 빨치산 토벌에 치중하는 등 병크를 범한지라 유고 국민들의 민심은 급속도로 티토로 쏠렸다고 한다. 물론, 1930년대 독일은 세르비아인의 용맹함을 높이 평가한 히틀러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경제적 편익을 제공했던 터라 섭정인 파블레 대공[5]으로서는 독일의 요청을 대놓고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때쯤에는 이탈리아가 배후지원하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운동이 거셌고 헝가리도 슬슬 1차대전 시기 뺏긴 땅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했기 때문에 무솔리니호르티를 제압할 수 있는 히틀러의 도움이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유지에 필수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꽤 고집을 피워서 추축국에 가입하는 대신 그리스로 향하는 군대의 유고 통과를 막는 등, 나름대로 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어떤 이유를 들어도 유고슬라비아 왕실이 독일에 협력한 사실은 지울 수 없는 것인지라 실제로 개전 며칠 전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뒤바뀌고,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는 등의 대소동이 있었다.

티토가 지휘하는 파르티잔은 매우 효율적인 유격전을 벌였으며, 이탈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는 자기네 구역만 지키고 있었으므로 다른 전선에도 병력이 부족했던 나치는 이미 점령했다고 생각한 유고에 30만의 병력을 박아놔야 했다. [6][7] 하지만 어쩼든 간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땅이 가진 실제 가치에 비해서 엄청난 양의 독일군 병력이 이곳에 주둔해야 했고, 전쟁후반에 독일군의 극심한 인력부족에도 이곳에서 병력을 빼낼수가 없었다. [8] 오죽 히틀러가 열받았으면 티토를 붙잡기 위해 오토 슈코르체니가 지휘한 특공대가 투입되어 티토의 본거지를 급습하기까지 했고, 실제로 거의 붙잡힐 뻔 했으나 여기서도 살아남았다. 이후 잠시 아드리아 해의 휴양지 비스 섬에서 기거하면서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군 최고위층 인사들을 만나 파르티잔 임시정부의 지위를 놓고 회담을 하는 등, 거의 동맹국 수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 전에는 무명인사에 불과했던 티토의 명성은 점점 빠른 속도로 높아졌고, 나치 고관인 하인리히 힘러 조차 "독일에 티토같은 지휘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뇌부가 당신들이잖아? 어차피 안돼... 만슈타인 구데리안 어리둥절행

추축군 한복판에서 빈약한 장비를 가지고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이상의 전과를 올린 한편,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서방측의 지원을 적지않이 받은데다가, 소련과의 관계도 좋지만은 않았던 관계로 양측의 사이에서 정치적 협상도 적지 않이 벌여내었다. 이후에도 티토는 동유럽권에서 냉전내내 서방측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낼수 있었을 정도.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 영토 내로 진입하여 독일군을 몰아낼 때, 수도인 베오그라드 탈환을 소련군과 함께 함으로서 파르티잔의 손실을 줄임과 동시에 독일군을 유고슬라비아에서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소련이 파르티잔 투쟁 기간중 제대로 된 도움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는 것과, 티토 자신의 명성이 서방세계에서도 높다는 점을 바탕으로 해서 심지어 소련군이 오래 주둔하면 소련군과도 싸울 생각이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 상징적인 병력만 남기고 철수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다른 공산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1.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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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부르는 미소 저 미소에 얼마나 많은 추축군들이 피를 보았을까

해방 이후 티토는 연합군 측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 유고 과도정부의 수상이 되었고, 체트니크 계열과 나치에 부역한 왕족들을 숙청한 뒤 1948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 군사적 영향을 행하려는 소련스탈린과 갈등을 빚어 같은 해에 코민포름에서 영구제명되고,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비동맹주의 외교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냉전시대 제3세계, 자유진영, 공산진영을 넘나드며 어느 국가와도 극단적으로 척을 지지 않는 실용주의 외교로 위기를 반전시킨다. 그 일례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방진영의 장 폴 사르트르까지도 남한이 북침했다는 소련과 북한의 발표를 지지했는데도 유고 혼자서 남침설을 고수했고 1950년대에는 주력 전투기로 미국제 F-86을 도입했을 정도.

또한 과거의 역사 내내 민족, 종교, 언어의 갈등때문에 툭하면 내부에서 서로 싸우던 유고슬라비아의 사정을 감안해서 형제애와 일치 정책(brotherhood and unity)을 펼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등의 민족주의를 철저히 제거하였으며, 각 구성 공화국내의 거주민들이 타 구성 공화국 내에도 거주해서 살아가도록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여 성과를 이룩하였고, 이렇게 민족이 혼합된 상태를 가칭 유고슬라비아 민족이라고 설정하여 해당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킴으로서 단일 국가로서의 정체를 확립함으로서 더 이상의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위의 구상이 일부분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성과도 있었으며, 티토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사실 살만큼 살았다. 위에서 생몰년을 다시 보고 오자. 진짜로 그런 가능성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전이 터진 다음에 여러 나라 사람들은 티토 시절이 좋았지 하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실제로 티토 시절엔 여러 민족들이 제법 화합을 이루며 잘 살았다는 증언이 많다.

아울러 공장, 공기업의 경영권을 공산당에서 노동자 자치위원회로 넘기는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를 도입해 공산주의의 단점인 과도한 정부의 개입, 낮은 생산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했고[9][10],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르비아계를 견제하고 낙후된 보스니아 지역 발전을 위해 사라예보 천도를 계획했다.

이런 행보를 보면 정적에 대한 탄압만 빼면, 그 당시로서는 베트남이나 중국의 개방정책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동구권 대신 제3세계를 중점으로 비핵화와 후진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고쳐 나가는 첫 모델을 티토가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덤으로, 티토는 유럽의 68혁명 당시 기존 정치체제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운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한 유일한 국가 지도자이기도 했다.[11] 이 면에서는 급진적인 개혁 요구에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단,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소련의 간섭에 위기를 느끼던 티토의 입장에서 소련군의 프라하 진주에 격렬히 반대하던 68년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가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는 점[12].

티토가 장기집권을 하기는 했지만, 김일성이나 스탈린과는 달리 정적에 대해서도 매우 신사적인 대접을 했다. 1950년대 이래, 당내에서 티토의 반대파들이 추방되기는 했지만, 이들은 처형이나 투옥이 아니라 그저 고액의 연금을 수령하는 야인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티토의 과거 부하이자 최대의 정적인 밀로반 질라스는 "티토가 나치독일과 뒷거래를 했다"는 비화를 터트려 파르티잔 투쟁을 정통성으로 삼는 티토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여러차례 투옥되었다. (그래도 처형은 당하지 않았다. 질라스는 티토 사후까지 살아남았다가, 자신과 티토가 세운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되고 동족상잔을 하는 와중에 사망했다)

1.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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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티토 사망 2주기를 맞아 소련 체신청에서 발매한 우표 굉장한 미남이다
주목할 점은 소련과 유고는 티토 재임시에 거의 앙숙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고이즈미나 아베 사망후에 그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핬다는 점인데, 아마도 티토 사후 소련이 유고와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낸듯 하다.그러나 둘다 망했다.

1974년 헌법 개정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었고, 1980년 다리의 혈행장애로 입원해 오른발 절단수술을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그 해 5월 4일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4명의 국왕과 22명의 수상 31명의 대통령, 47명의 외무장관이 참석하여 당시기준으로 가장 많은 나라의 국가지도자들이 참석한 장례식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2 사후의 평가

일단 그의 강력한 지도력 덕분에 수많은 민족이 얽히고 설켜 있던 다민족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가 큰 문제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면에서는 비판도 많이 받는다.

우파로부터는 과도정부 수상 당시 유고 내 우익인사들을 처형한[13] 것이나, 자신의 독재노선을 비판한 밀로반 질라스[14] 등에게 콩밥을 먹인 것 등으로 인해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이민자 사회에서도 욕을 많이 얻어먹기도 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소련을 배신하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례로 코민포름 제명 이후 영국 정보국에 소련의 군사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등 뒤끝있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래도 흐루쇼프 집권기 이후부터는 소련과의 사이는 우방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호전되었기는 한다. 그러나 유고 연방이 당시 다른 사회주의 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아니라 독자 노선으로 제3세계의 지도국이 된 점, 그리고 그런 등거리 외교정책으로 서방국가와 많은 교류를 하여 유고 인민의 생활수준이 꽤 높았던 점을 들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고연방 붕괴 이후에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그가 과거의 유물로서 한동안 잊혀졌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가 종교와 지역간 갈등으로 인해 구유고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데다가 그 결과로 7개의 소국으로 찢어지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과정에서 독립한 국가들이 과거의 유고연방 시기보다 훨씬 못한 경쟁력을 지녔기 때문에[15][16] 크로아티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국민통합과 비동맹 운동을 이끌었던 그를 다시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이 현재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등 舊 유고 연방 소속 국가들 사이에서 크게 일어나고 있고, 티토 시절에 대한 향수 또한 강하다.[17] 아울러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 소련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배짱있는 외교정책,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양하려고 노력했던 경제정책, 복지정책 등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조국인 크로아티아에서 평은 나쁘지 않지만, 비판도 많이 듣는다. 그 중 하나가 항구도시 네움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게 넘겨준 것. 내륙국이던 보스니아에게 행정개편 당시 선심쓰듯 작은 항구인 네움을 넘겨줬는데 덕분에 내륙국에서 벗어난 보스니아와 대조적으로 크로아티아 영토가 동강나버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위에서 설명된 민족통합을 위해 거주자를 섞어놓은 것과 비슷한 맥락의 문제이다. 정말 계획대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통합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분할되어 버리자 영토나 거주자를 재조직한 부분에서 분쟁이 발생한 것. 유고연방이 붕괴하면서 내전 당시 인종청소가 빠르게 행해지게 된 이유가 이러한 통합정책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섞여 살게된 것도 있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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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와 김일성.

서방과 친했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 합작도 많이 진행했었다. 할리우드 영화 철십자 훈장은 당시 현역이었던 유고연방군의 T-34가 소련군으로 대거 출연한다. 파르티잔 투쟁을 다룬 영화 네레트바 전투도 할리우드 배우들을 출연시킬 정도였다.[18] 율 브리너도 나온다. 리처드 버튼이 티토 역할을 수행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여러 번 공중파를 탔는데 화염병으로 탱크를 불태우는 장면은 80년대에는 삭제 방영되었다. 심지어 조지 오웰1984, 동물농장이 유고슬라비아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정도로 서방과 적절하게 지냈다. 흠좀무

비단 할리우드 영화 뿐만 아니라 본인의 성향 자체가 전쟁 중 추축국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으면서도 항상 깔끔하게 손질한 정복과 반짝이는 구두,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위의 사진과 같은 활짝 웃는 살인 미소로 사람을 대하며 좋은 와인과 파이프 담배를 즐기는, 공산주의 혁명가 이전 영화 배우 같은 미중년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호남아 기질이 다분했다. 이념적으로 대치하면서도 티토의 깔끔하고 호방하면서도 세련 된 자기 이미지 관리에 매료된 영국 측의 시선에서는, 반면 티토의 라이벌인 체트닉의 지도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전형적인 발칸 반도 산적(...)으로 밖에 안 보였던 것도 티토를 지원한다는 결정을 내린 요소 중 하나였다. 지금도 구글 등에서 티토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항상 말쑥한 제복이나 정장에 얼짱 각도로, 흔한 공산국가 서기장의 이미지보다는 영화배우에 더 가까운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찍은 티토의 사진들.[19]

그리고 이탈리아와 합작하여 찍은 영화 슬픔은 어느 별 아래 (Andremo in Citta)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딸 제랄딘 채플린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전쟁 때 동지이자 이념으로는 사실상 적이었던 영국 수상 처칠에 대해 호감을 느꼈고, 영국에도 자주 방문을 했을 정도다. 반면,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경우 그가 사석에서 비겁한 짓을 하는 것을 티토가 목격하고 같은 공산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혐오했을 정도. 친한 척 했을 뿐이다

소련에 반대하는 노선 때문에 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레프 트로츠키와 더불어 공산권에서는 공공의 적으로 불리운 적이 있었다. 소련의 노선에 삐딱선을 타는 정치인을 티토주의자로 매도한 것이 대표적.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수감자들의 정치활동에 냉소적인 사람은 동료죄수들이 티토주의자라고 집단 괴롭힘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도시전설에 가까운 이야기긴 하지만 티토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한장이 훗날 꽤나 주목을 모았다. 이 편지를 보내기 전에 스탈린이 티토를 암살하려고 자객들을 파견했는데 티토가 그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있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Стаљину, прекини са слањем људи да ме убију. Ухватили смо их већ пет, једног од њих са бомбом, другог са пушком... ако не престанеш слати убице, ја ћу послати једног у Москву и нећу морати да шаљем другог.

스탈린, 나를 죽일 암살자들을 보내지 마시오. 우리는 소총과 폭탄으로 다섯 명과 또 다른 한 명을 체포했소... 만약 당신이 암살자 보내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나도 (암살자) 한 사람을 모스크바로 보낼 것이고, 두 번째로 보낼 일은 없을 거요. [20]

이 편지가 주목받은 이유는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인들이 그의 집무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라 하는데 사실 도시전설 맞다. 실제로 스탈린 사후에 집무실 서랍에서 발견된 티토의 편지 내용은 단순히 소련의 내정간섭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고, 간섭이 계속될 시에는 군사적 갈등을 감수하더라도 대항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을 뿐이다. 내용이 어쨌든간에 강철의 대원수에게 몸소 편지를 부치는 티토의 깡은 정말 대단하지만. 나의 용감함을 보여주지. 스탈린 죽고 나서 30년이 지나서야 "스탈린은 내 친구요" 드립을 친 김일성보단 훨씬 낫다

여담이지만, 위 편지의 경우 티토의 무지막지한 깡다구(어제는 히틀러를 엿먹였다! 오늘은 스탈린을 물먹여주마!)를 보여주는 일화로도 유명하지만, 스탈린에게 어찌저찌 남아있던 인간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인들이 스탈린의 집무실 서랍에 고이 짱박혀있던 편지 세 통을 발견했는데 한 통은 자기 아내에게 난폭하고 무례한 짓을 한 스탈린에게 격노해서 사과를 요구한 레닌의 편지, 또 한 통은 평생동안 친구이자 동지였던 부하린[21]이 스탈린에게 숙청당하기 직전에 보낸 편지(내용은 딱 한 줄이다. '코바, 당신에게 왜 내 죽음이 필요하지?' 말하자면, 스탈린에게 숙청당해 곧 죽을 상황에서조차 스탈린을 애칭으로 부르면서, 원망하기보다는 왜 굳이 자신을 죽여야 하는지 오히려 의아해 하는 편지다.), 그리고 마지막이 '우리나라 일에 자꾸 간섭하면 군사적 갈등이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참지 않겠다!'는 티토의 편지다. 다시 말해서, 내정 간섭에 항의하는 티토의 편지는 평생 지도자로 섬기고 따랐던 레닌의 편지, 그리고 평생의 친구였지만 자신이 배신한 부하린의 편지만큼 스탈린에게 충격을 안겨 준 편지였다는 것.

'코키'라는 이름의 유황앵무를 길렀었다(정확히는 조카 선물로 사준 앵무였다). 코키는 티토보다 오래 살았으며 티토 사후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서 주변을 안타깝게 했었다. 그러나 이내 곧 차기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며 갈아타기를 했다고(...). 최근까지도 살아서 동물원에서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22]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무너지면서 독립한 몬테네그로의 현재 수도인 포드고리차는 과거 티토의 이름을 따서 티토그라드라는 이름을 썼다.1946년~1992년.

3.1 티토주의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당시에는, 티토의 노선은 티토주의라는 이름으로 분류가 되었다. 워낙에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튀는 노선으로 유명했고, 앞서 말한 독자노선으로 유명했기 때문. 특징은 노동자 자주관리, 비동맹노선, 중공업 편향적 산업화 지양, 탈권위주의 등.

다만 실리주의적인 비동맹 외교같은 경우, 티토의 독특한 정치외교 노선이라고까지는 할 수 있지만 사상이라고 불릴만한 이론적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티토 노선의 성과가 제법 훌륭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독립된 정치 사상으로서 '주의'라고 부르기는 좀 힘들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표현도 스탈린에게 워낙 심하게 데인 반소 사회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보다는 좀 나아보이는 사회주의 노선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용한 표현이고...

인상주의처럼 티토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티토의 노선을 높이 평가하는 의도보다는 멸칭으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집권 공산당 보기에 꼴보기 싫은 놈인데 차마 트로츠키주의자라고까지는 부르기 뭐한 반대파를 티토주의자라고 부른 격. 이말의 원조는 이웃나라의 독재자이자 한때 티토와 함께 파시스트와 싸웠던 알바니아엔베르 호자였다. 엔베르 호자는 티토가 자기나라를 유고 연방에 편입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열심히 국가와 당선전기관을 이용해 티토를 깠다.

3.2 매체에서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존 티토로 패러디되었다. 그의 비범하고도 개념찬 행각들은 다 미래를 예지한 덕분이라고. 역시 갓티토
  1.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내에서 헝가리 부분에 속해 있었다.
  2. 미국식 영어 표기가 대세인 한국도 이런점에선 자유롭지 않다. 가령 에이레를 아일랜드라고 한다던지, 에스파냐를 스페인으로...
  3. 아버지는 크로아티아계, 어머니는 슬로베니아계였다고 한다. 참고로 두 나라 모두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많은 지역으로, 티토의 어린 시절에 얽힌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위치한 성당에서 성찬 미사를 치르고 있었다. 신부와 함께 어린 티토가 성찬 미사를 돕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티토가 성찬 미사를 준비하던 도중 그만 실수로 포도주 그릇을 뒤엎고 말았다. 그러자 신부는 몹시 화가 나서 티토의 뺨을 후려치며 "당장 나가! 다시는 제단에 나타나지 마라!" 라고 말했고, 그 후 티토는 더 이상 성당을 찾는 일이 없었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확인 바람.
  4. 이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논란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티토의 내전참가를 부인하였으니. 현재 가장 유력한 주장은 실재로 스페인에서 싸운건 아니고, 국제 여단지원자들을 파리에서 모아서 스페인으로 보내는 코민테른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관리 차 스페인에 여러번 갔다 왔다는 것이다.
  5. 당시 왕이였던 페타르 2세의 5촌 당숙이였다. 페타르 2세의 큰아버지인 조르제 왕자가 있었으나 이쪽은 원래 왕세자였는데 정신병으로 사람을 죽여서 동생에게 왕위를 넘긴 상태라서 섭정을 할 수 없었다.
  6. 출처: 위키페디아
  7. 하지만 스타브카는 30만이 아니라 7만이라 판단했고, 이쪽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8. 사실 유고슬라비아를 잃으면(또는 이곳에 연합국이 들어온다면), 독일의 유일한 유전이었던 루마니아가 위험해지고, 우크라이나까지의 보급로도 위험해진다. 그 자체는 별로 가치가 없지만, 석유나 보급로 확보를 위해 반드시 점유해야 했다.
  9. 다만 그 덕분에 물품이 풍족하게 생산되었기는 했으나 동시기 타 공산국가와는 다르게 물가상승률이 상당해서 이 문제로 골치좀 썩혔다고한다. (참고로 90년대 초반 여러 공산국가들도 체제전환을 하게되면서 이와 비슷한 부작용을 겪게 되었다.)
  10.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체 게바라는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기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쿠바의 산업정책에 적용을 시도하기도 했다.
  11.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도 지지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지지 표명은 아니었다.
  12. 특히 68운동 내에서 기존의 공산당 및 소련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13. 다만 이는 나치부역혐의에 따른 것이다. 대표적인 우익인사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처음에 나치와 항쟁하다가, 주도권이 티토의 파르치잔에게 넘어가자 나치에 부역했고, 종전 이후 파르티잔에 체포되어 처형된다.
  14. 티토와 같이 게릴라 운동을 같이 한 동지에 초기 권력 2인자였으나 티토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면서 반체제 인사로 돌아선 사람이다. 심지어 질라스는 공산당 비판 작품들을 저술하여 투옥, 가택연금 상황 속에서도 정치 민주화를 주장하는 등 티토와 대립하였고 1980년 티토가 죽자 죽어야 할 독재자가 죽었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유고 내전 당시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다 1995년 의문사했다. 정작 질라스 자신은 평생동안 국제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유지했다고.
  15. 다만 유고슬라비아의 분열 혹은 멸망이 티토의 사망만으로 이뤄졌다는 건 아니다. 실제로 티토가 죽고난 뒤에도 유고슬라비아는 11년간 유지되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이 유고 내 여러 국가들을 단일국가로 묶어 통치한 티토가 사망하면서 촉진된 것은 사실이지만, 티토의 죽음 이외에도 불안했던 유고슬라비아 분열의 기미는 충분히 많았다.
  16. 티토 시절의 유고슬라비아는 말 그대로 제3세계를 주도하고, 1세계 국가들과 2세계 국가들을 적절히 중재해주던 국가로 실제 국력에 비해서도 영향력이 엄청나게 강하던 국가였다.
  17. 특히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티토 시절에 대한 향수나 유고슬라비아 해체에 대한 아쉬움이 큰데, 일단 유고슬라비아 시절에 꽤나 풍족하게 살았다는것도 있지만 만약에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지 않은채로 존속되었다면 유고슬라비아의 국제적인 위상에 힘입어 세르비아인이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들도 솅겐조약의 혜택을 돈둑히 누릴 공상이 크기 때문이다.
  18. 한국에서는 1989년 주말의 명화에서 방영해준바 있다.
  19. 카쉬는 윈스턴 처칠, 오드리 헵번 등의 문서의 첫 번째 사진 등을 찍은 20세기 초중반의 전설적인 사진작가다.
  20. 출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의 저서『스탈린 전기(Stalin: A Biography)』. 하버드 출판부, 2005년.
  21. 니콜라이 부하린은 고참 볼셰비키 중에서도 스탈린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고, 스탈린이 당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듣보잡 지도자 중 하나였을 때부터 친구였다.
  22. 티토가 이 앵무를 조카에게 사준 시기는 1977년. 유황앵무는 최대 100년까지 장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