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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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E.S.가 처음 데뷔했을 때, 그들을 처음 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했던 기억이 난다. '쟤들은 완전 일본애들 취향이야', '너무 일본애들 따라하는거 아냐?', '우리나라보단 일본에서 더 뜰 수 있을거 같은데', '일본애들이 원할거 같은데' 등등. 일본 아이돌 쪽을 잘 몰랐던 이들도 S.E.S.를 처음 봤을 땐 막연하게 '일본애들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10대 소녀를 그런 식으로 화사하고 세련되게 포장하는 상업적 감각은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것이었고, SM에서 우리나라보다 소녀를 상품화하는 면에서 몇 발 앞서 있었던 일본 연예계의 유행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로 나미에를 살짝 연상케 하는 유진의 모습이나 일본어에 능한 슈의 면모는 더욱 S.E.S.를 '일본 스타일의 미소녀 그룹'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PC통신 이용자들은 너나 할것없이 일본의 여러 미소녀 그룹들과 S.E.S.를 비교해댔으며, 팬클럽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S.E.S.에 대한 일본 내 한국 가요 팬들의 반응들을 전하며 열을 올렸다. 많은 가요 팬들이 저 일본스러워 보이는 S.E.S.를 진짜 일본사람들 앞에 내놓으면 어떨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들이 등장한지 100일 남짓한 시점에서 그 궁금증은 현실화되었다. 1998년 2월, SM이 S.E.S.의 일본 진출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2 진출 과정
애초에 S.E.S.는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결성된 그룹이었다. 괌에서 살다온 유진이나 일본 태생의 슈를 멤버에 포함시킨 것은 그저 당시 유행하던 '외국물 먹은 혀꼬부라진 애들 한명씩 댄스그룹에 집어넣기'와는 차원이 다른 시도였다. 당초 그룹의 멤버로 예정돼 있었다는 소녀[1]가 중국쪽 교포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SM의 의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에까지 두루 능한 범아시아적 인기 그룹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들의 해외 진출 역시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해외 진출의 첫번째 지역으로 일본이 선택된 것도, 그것이 SM쪽보다 일본측의 제의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S.E.S.는 딱 일본 스타일의, 일본사람들 취향의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 S.E.S.가 일본 진출을 선언했을 때, S.E.S.에 대한 우리나라 언론이나 팬들의 기대는 대단한 것이었다. 미모에 춤실력, 가창력 3박자를 갖추었음은 물론이고, 일본어가 가능한 슈가 있으니 의사 소통에도 문제가 없었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완벽한 진출 조건인 것이다. 이들은 S.E.S.가 등장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모든 가요차트를 싹쓸이했던것처럼, 일본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으며 차트를 석권할 것이라고 믿었다. 오리콘차트 1위나 백만장은 당연한 것이고, SPEED나 MAX가 이들의 라이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S.E.S.의 진출을 지켜봤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 최고의 여성 그룹으로서 S.E.S.가 당당하게 일본 가요계를 정벌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S.E.S.가 일본에 처음 싱글을 내놨을 때, 연일 일본에서 수십만장을 팔아치웠다며 앞다퉈서 보도했던 우리나라 언론의 호들갑이나, 오리콘 차트 3등해서 엑스 재팬을 이겼다느니 하는 소문을 매번 퍼뜨렸던 팬들의 반응들이 S.E.S.에 대한 대단했던 기대감을 말해준다.
2.1 시장 상황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S.E.S.의 일본 진출은 성공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S.E.S.가 우리 나라에서 그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면서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최초의 본격 걸 그룹이었다는 점이 효과적으로 어필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본식 아이돌 그룹들이 하나라도 제대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면 S.E.S.는 데뷔 때 반응의 절반도 끌어내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투야나 밀크를 비롯해 S.E.S.보다 미모나 가창력, 춤실력에서 그리 뒤지지 않았던 여러 그룹들이 그리 반응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건, 이들이 시장에 늦게 뛰어들었던 후발 주자였기 때문이다. 공략 대상 연령층이 고정돼 있는 아이돌 그룹의 세계에서 다른 그룹의 팬들을 빼앗아 와야 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S.E.S.가 일본에 진출했을 당시의 일본 걸그룹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오래 전부터 여성 그룹이 팝 밴드의 일반적인 형태였던 일본 가요계에서, 여고생 그룹은 너무나도 흔한 구성이었다. SPEED, MAX, 퍼피, D&D.. 기타 등등 TV를 틀기만 하면 언제든지 2~5인조로 이뤄진 미소녀들이 생글거리며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상황에서, 좀더 예쁘고 노래잘하는 애들이 나온다고 관심을 가져줄 만큼 일본 대중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2 언어 문제
언어 쪽의 문제도 절대 해결됐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슈가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S.E.S.는 그것만으론 결코 만족스러운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S.E.S.의 리드보컬은 슈가 아니라 바다였으며, 슈가 아무리 일어에 능숙해도 노래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하이라이트를 맡아야 하는 바다가 가사 전달을 제대로 해낼 수 없으면 노래의 호소력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바다의 미숙한 발음은 S.E.S.의 일본 활동 당시에 일본인들에게 많이 지적받았던 부분이다. 'S.E.S.의 일본 노래를 일본사는 친구에게 들려줬는데 노래 가사가 어떤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팬클럽 게시판에까지 올라올 정도였으니, 바다의 일본어 발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언어 장벽이 문제가 되는 건 노래 부를 때 뿐만이 아니다. 곡을 띄우는 것 보다 가수 자체를 띄우는 게 목적인 S.E.S. 같은 그룹은 노래만 잘해서는 쉽게 어필하기 어렵다. 이런 그룹들은 쇼프로를 나오든, 광고를 나오든 할것없이 TV에 부지런히 나와 얼굴을 자주 보여줄수록 유리하다. 필요에 따라선 쇼프로에 나와서 얘기도 재밌게 해야 하고, 웃기기도 해야 하고, 연기도 잘해야 한다. S.E.S.는 그런 점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매번 쇼프로에 출연할 때마다 슈 혼자서만 떠들어대고, 유진과 바다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는 모습이 일본 시청자들에게 그리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일어회화가 가능한 슈가 얘기도 재밌게 하고 잘 웃기고 연기도 잘한다면 모르겠지만,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슈의 말재주나 유머 감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진과 바다가 겨우 띄워놓은 분위기를 한번에 얼려버리는 재주를 한껏 보여줬던 슈가 일본에서 활약해주기를 바랬던 건 애초에 무리한 기대였다. 얼핏 보기에 완벽한 듯 보였던 S.E.S.의 조건은 이렇게도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온 가창력있는 걸그룹'으로 컨셉을 잡아 대형 프로모션 위주의 활동을 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수도 있으나, 그건 그것대로 후술할 '기획사'의 역량 문제와 얽혀있었다.
2.3 기획사 선정 문제
그동안 신중한 행보를 보여왔던 SM 역시 이 때 만큼은 신중하지 못했다. 이후 S.E.S.의 일본 진출에 대해 얘기할 때, SM은 이 과정에서 중대한 두 가지 실수를 범했다고 평가받곤 한다. 첫 번째 실수는 S.E.S.의 일본 내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기획사로 '스카이 플래닝'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들은 일본 연예업계 5위권 내의 거대 기획사와 계약했다며 흥분된 어조의 기사를 매번 실어댔지만, 이 계약부터가 그리 현명하지 못한 것이었다. 애초에 스카이 플래닝은 연기자, 모델 중심의 회사였지 가수를 전문적으로 매니지먼트하는 회사가 아니었다.[2] 세계 2위 규모인 일본 음반 시장에서 홍보는 절대적인 변수다. 차트가 몇백위까지 매겨지고 하루에 발매되는 싱글의 수만 해도 엄청난 일본에서, 뮤직비디오 제작과 음반 발매만으로 곡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가수들이 다 타이업, 타이업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수 매니지먼트에 익숙하지 않았던 스카이 플래닝에 몸담았던 S.E.S.가 그런 홍보에서 불리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데뷔곡 'めぐりあう世界'는 NTV의'빙글빙글 나인T나인' 엔딩 테마로 두달간 사용됐다고 하는데, 각종 인기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CF, 영화, 게임 등등의 삽입곡들이 순위를 휩쓰는 일본에서 이정도의 홍보가 그다지 약발이 먹히지 않았음을 짐작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스카이 플래닝에서 담당했던 S.E.S.의 이미지 연출에 대한 얘기 역시 빼놓고 지나갈 수 없다. TV 연예정보 프로에서 S.E.S.의 일본 활동 모습을 처음 접했던 우리나라 팬들의 실망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의 S.E.S.는 한국에서 활동할 때의 S.E.S.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단정했던 유진의 생머리는 색색의 머리끈과 함께 요란하게 틀어올려졌고, 단점을 살짝 커버했던 바다의 귀여운 애교머리는 부풀려진 채 양쪽으로 묶여져서 그녀들의 이마를 미간을 더욱 넓어보이게 만들었다. 의상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의 탑을 걸치고 배꼽까지 노출되는 반짝이 의상을 입은 S.E.S.의 모습은 그때까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게 일본 취향이고 니뽄 스타일이라서 S.E.S.가 그런 옷을 입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일본 스타일도 뭣도 아니다. 야한 옷 안입고 나와도 인기있는 여가수들 일본에 쌔고 쌨다. 그저 그 옷들은 S.E.S.의 이미지 연출을 맡았을 스카이 플래닝측의 취향일 뿐이다. 지금 봐도 S.E.S.의 일본 데뷔 시절 의상들은 정말 형편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싱글 자켓 사진만 봐도 셋 다 너무나 안어울리는 요란한 의상에 머리들을 하고 있다. 특히 바다는 정말-_- 스카이 플래닝과의 계약은 처음부터 불안한 요소들을 가득 가지고 있었다.
2.4 레이블 선정 문제
SM의 두번째 실수는 VAP이라는 레코드 회사와 음반 배급 계약을 맺은 것이다. 계약 기간 등의 문제로 당초 계약을 진행했던 소니와의 교섭이 결렬되자[3], SM이 '다른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할 것'이라며 계약을 체결했던 레이블이 바로 VAP이다. 하지만 VAP은 SM이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메이저 레이블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규모의 레코드사였으며, S.E.S.를 영입하기 전까지 이 음반사의 싱글차트 최고 기록은 93위에 불과했다. 시장 점유율이나 판매율에서 소니같은 레이블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회사였던 것이다.
한국 음악계에서는 기획사가 거의 모든 지원을 하고 음반사는 말 그대로 음반의 유통만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본 음악계에서는 음반사가 음반을 직접 홍보하고 방송 프로모션 일정도 조정하는 등 음반사의 역할이 매우 크다[4]. 한국에서야 중소규모 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발매해도 크게 지장이 없지만, 일본에 진출하면서 VAP과 같은 소규모 음반사를 파트너로 선정한 것은 매우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여성 아이돌 가수의 성공 실적이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S.E.S.를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었다. 빵빵한 회사에서 팍팍 밀어줘도 승산이 있을까말까한 상황에서 계약까지 제대로 맺지 못했으니 장밋빛 성공을 보장받은 것처럼 보였던 S.E.S.의 앞날은,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예고하고 있었다(...)[5]
3 활동 결과
1집 활동 이후부터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는 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6] 대중이 인정해주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하진 못했지만 결코 단발로 계획된 진출이 아니었고 누구보다 깊숙이 파고들어 다음 주자인 보아의 성공을 이끄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S.E.S.는 S.E.S.대로 일본에서의 실적과는 상관없이 아주 근사한 행보를 이어간다.[7]
S.E.S.는 한국에서는 정상급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수많은 걸그룹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국내에서 S.E.S.는 세련된 음악과 신비로운 요정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를 끌었지만 일본에서는 이수만의 희망과는 다르게 현지의 여느 걸그룹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S.E.S.의 일본 내 마케팅 포지션 및 파트너의 역량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S.E.S.의 일본 소속사였던 스카이 플래닝이 일본 시장에 S.E.S.를 맞추기 위해 그저 그런 수준의 걸그룹으로 S.E.S.의 개성과 특징을 평균화한 탓이었다. 즉, S.E.S. 특유의 몽환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흔한 일본풍으로 개조된 부작용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S.E.S.의 일본 내 활동을 위한 계약에는 치밀한 검토가 부족했던 탓에 S.E.S.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SM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보잘 것 없었다. 이수만이 S.E.S.를 일본에 진출시켜서 누리는 혜택이라고는 현지의 시장상황에 대한 정보를 한국 내 경쟁업체들보다 먼저 취득할 수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일종의 테스트 파일럿 이후 SM은 다른 팀들을 차후에 일본으로 진출시킬 때는 S.E.S.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S.E.S.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내내 부딪치게 된 언어상의 한계를 직접 목도하면서 SM이 일본에 내놓을 다음 가수에게는 데뷔하기 전에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갖춰놓도록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게 된다. [8]
4 활동 경력
- 1998년 08월 28일, 도쿄 롯폰기에 위치한 에이벡스 소유의 클럽 벨파레에서 데뷔 싱글 발매 쇼케이스를 가졌다. 악천후 속에서도 음악 프로듀서, 매스컴 관계자, 음반 도매상, 일반 관객 등 1천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선주문만 100만장이라는 식의 기사가 국내에 보도되었으나 실질적인 주문량은 10만장 정도로 추정된다.
- 1998년 10월 21일 발매된 데뷔 싱글 〈めぐりあう世界〉가 발매 첫주 오리콘 주간차트에서 37위를 기록, 계은숙, 김연자 등 엔카 가수를 제외한 일본에 진출한 한국 가수 중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또한, 그 주 발매된 신인 가수들의 싱글 중에서 유일하게 차트에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 〈めぐりあう世界〉는 싱글발매 첫주에 일본 타워 레코드(시부야 점) 싱글판매 주간차트 3위를 기록했다.
- 한국 가수가 일본에서 5만장을 돌파한 것은 서태지에 이어 2번째이다. 다만 오리콘차트 기준으로는 5만장을 넘은 음반이 없고… 일본에서 냈던 모든 음반 판매량을 합산해도 5만장이 안 된다. 아마 소매점 판매량이 아니라 도매점 출하량 기준일 듯.
- 2번째 싱글 〈夢をかさねて〉는 일본 NTV 계열의 음악 차트 프로그램 'CD GROOVE XX'에서 2주간 1위를 기록했다.
- 일본 내에서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으며 레이블 홍보에 크게 기여한 점을 높이 사 VAP 레코드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 도쿄 FM 라디오국 중 하나인 Bay FM의 《Precious harmony》의 레귤러로 발탁되어 1999년 04월부터 일본 계약이 끝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Artist paradise〉라는 코너를 진행하게 된다. 매주 토요일마다 10분 정도 출연하여 간단한 토크와 음악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9월부터는 인기에 힘입어 금요일로 시간을 옮겨 30분 동안 방송하게 된다.
- 후지 TV의 신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코이보이 코이걸(戀ボ-ル 戀ガ-ル)》의 정식 레귤러로서 1999년 5월부터 약 반 년간 출연했다.
- 5번째 싱글 〈Sign of Love〉가 제78회 전국고교축구 선수권대회 이미지송으로 선정됐다.
- KBS 국제방송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한국 가수 3위에 뽑혔다. 1위는 조용필, 2위는 김연자.
- 2000년 5월, S.E.S.의 일본 공식팬클럽 HANA가 결성되었다.
- 일본 2집 앨범 《Be Ever Wonderful》이 San Jose 키노쿠니야 미쯔와점(레코드점)의 2000년 상반기 앨범 매상에서 14위를 기록했다.
- 후지 TV가 기획한 뮤지컬 《동아비련》에 슈가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일본 6인조 그룹 V6의 멤버 요시코 이노하라와 함께 무대에 섰다. 슈는 일본 남성과 비극적인 사랑을 하다가 죽은 뒤 다시 태어나 옛 연인과 재회하는 한국 여성역을 맡았다. 《동아비련》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초연된 이후 6개 도시에서 앙코르 공연을 가지는 등 총 11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 ↑ 전 티티마의 멤버이자 현재 라즈베리필드로 활동하고 있는 소이가 바로 제4의 멤버였다. 소이가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계약을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3인 체제로 출범하게 된다.
- ↑ 마치 개그맨 전문 기획사에서 영화배우를 데뷔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업종도 다르고 접근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 ↑ 전속기간이 짧아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계약이 무산되고 만다. 소니 측에서는 S.E.S.와 7년의 계약기간을 요구했지만 SM과 S.E.S.의 계약기간이 5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그래서 일본 가수들은 기획사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와 음반사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로 공식 홈페이지가 두 개인 경우가 많다.
- ↑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 뒤에 일본에 진출하는 보아나 동방신기는 대형 음반사인 에이벡스 트랙스와 계약을 하게 된다.
- ↑ 정규 앨범 발매 후 곧 베스트 앨범이 발매된, 성공하지 못한 가수의 흔한 테크트리였다.
- ↑ 특히 4집 '감싸안으며'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100% 라이브를 시도했다.
- ↑ 그게 바로 보아. 그리고 유사한 실수를 반복한 천상지희같은 케이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