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본명조용필(趙容弼)
출생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본관임천 조씨
신체165cm, 60kg, O형
소속YPC프로덕션
학력경동고등학교
가족배우자 故 안진현
취미음악감상, 골프, 기타연주
특기작곡, 작사
별명작은거인, 풀빵, 조방범
종교불교
공식홈페이지 트위터
페이스북
TBC 방송가요대상 / KBS 가요대상 대상 [1]
조경수, 이은하
행복이란
아리송해
(1979)
조용필, 윤시내
창밖의 여자
열애
(1980)
조용필, 이정희
고추잠자리
그대여
(1981)
조용필, 윤시내
비련
DJ에게
(1982)
조용필, 윤시내
친구여
공부합시다
(1983)
김수철, 이은하
못다핀 꽃한송이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
(1984)
조용필, 정수라
어제, 오늘, 그리고
도시의 거리
(1985)
전영록, 정수라
내 사랑 울보
난 너에게
(1986)
전영록
하얀 밤에
(1987)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인기가수상[2]
혜은이
제3한강교
(1979)
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
조용필
고추잠자리
(1981)
이용
잊혀진 계절
(1982)
조용필
나는 너 좋아
(1983)
조용필
친구여
(1984)
조용필
어제, 오늘, 그리고
(1985)
조용필
허공
(1986)
전영록
하얀 밤에
(1987)[3]

1 개요

가왕(歌王)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왕이란 의미의 가왕(歌王)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 가왕으로 검색해도 이 문서로 넘어올 수 있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 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가진, '맨날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 흔히 '슈퍼스타는 맨 마지막에 나온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그 유래가 조용필이었다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태생. 경동고등학교[4] 25회 졸업생.[5] 1969년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수 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지고 있는 가수다.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수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인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가요계의 제왕. 대다수의 사람이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슈스케에서 김태우이승철을 가왕이라고 호칭하자 이승철 曰 "그건 용필이 형이지"라고 단박에 부정한거만 봐도... 그래도 이승철의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일화다. 다른게 아니고 조용필을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입지라는(...) 것이다.

물론,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조용필 본인이다. [2011년 4월의 인터뷰에 의하면] 스스로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단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한다.

나이가 어린 위키러들은 "조용필은 방송에도 안나오는데 무슨 국민가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옛날에는 그냥 TV틀면 이 분만 나왔다. 아닌 것 같다고?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면 지금 옆에 계신 부모님들께 물어보자.

대한민국 최초로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가수이기도 하다.[6] 당시 9시 뉴스에서 이례적으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내보낼 정도였다.

여러분, 기도하는~[7]의 다음 가사를 아십니까? 바로 꺄악~입니다.

사실상 마지막 미8군 출신 히트가수이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8] 세션의 연장개념이었던 개인밴드를 영미권의 밴드의 개념으로 바꾸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2008년 열린 "조용필 40주년 기념 콘서트" 콘서트 中
팔팔한 목소리와 관객수를 보라 저게 40주년


그리고 이건 2013년 슈퍼소닉 출연 영상. 조용필 공식 홈페이지 유튜브 계정에서 공개하였다.
이 영상은 무려 45주년이다. 1950년생의 어르신이 젊은이들을 휘어잡는 위엄


2 경력

1969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화이브 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9]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故 김대환(드럼),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앨범도 발매하였다.[10]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칼 '사랑의 일기'라는 앨범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앨범. 이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11] 그러나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된다.[12]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된다.

2.1 정규 음반

틀:조용필의 정규 음반 목록

정규앨범만 무려 19개, 비정규앨범까지 포함하면 50개에 달한다.

2.2 대표곡

대표곡은 "고추잠자리#s-2.1",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이 마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꿈#s-6",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단발머리#s-2.2",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s-2", "못 찾겠다 꾀꼬리", "미워미워미워", "미지의 세계",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의 노래", "바운스", "비련#s-2.1", "서울 서울 서울", "슬픈 미소", "어제, 오늘, 그리고", "여행을 떠나요",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정의 마음", "창밖의 여자", "촛불", "추억속의 재회", "친구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태양의 눈", "한강", "한오백년", "허공", "헬로", "Q#s-4" 등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발표한 노래 대부분이 히트곡이다. 농담이 아니라 1위부터 10위권안에 모두 조용필 노래였던 시절도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3 위상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대선배.

현재 가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명이며, 대부분의 후배 가수들의 꿈 같은 존재다. 신해철이 개기지 못했던 몇 안되는 인물. 한 예로 모 방송에서 조용필의 전화를 받자마자 신해철이 갑자기 자세를 고치고 양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김혜수의 플러스 유라는 방송에 출연 하셨을 때 일각에서 마왕으로 불리우는 후배 신해철을 어떻게 생각 하시냐는 질문에 귀여운 후배로 평가하셔서[13] 김혜수를 비롯한 관객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심지어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신해철이 조용필의 히트곡들을 직접 리마스터해서 특집으로 튼 적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혼날까봐 조용필이 곯아 떨어질 것이 확실한 공연날 밤을 골라서 방송을 했다. 거기다가 실제로도 한 성깔하기로 유명한 이승철이나 독설로 유명한 이은미까지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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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시혁의 배꼽인사.jpg

대한민국 그 어떤 가수도 현재 조용필이 현시대 대중가요판에 남긴 업적을 넘을 수 없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조용필이 현역시절 시도했던 수많은 실험적 시도와 성공덕에 지역 클럽의 노래무대, 트로트, 미8군 스탠더드팝, 쎄시봉 포크시대 등 그의 등장 전까지 큰 틀 없이 유행의 중심이 자주자주 바뀌던 대중가요를 하나의 큰 틀로 묶을 수 있었기 때문. 조용필 이전 세대인 이미자, 패티김, 나훈아, 남진 등은 물론이고 80년대 전영록, 김수철, 이용, 이선희 뿐만아니라 조용필 이후 등장한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이승철과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이 최고의 가수의 칭호를 들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조용필 때문이다. 흠좀무.

90년대 끝판왕을 풋풋한 후배로 만드는 80년대 끝판왕의 위엄.jpg

서태지김건모, 신승훈, 유재하, 이승철이 그나마 제2의 조용필이 될 뻔 했으나 서태지는 90년대 끝판왕급의 폭발적인 인기와 팬덤, 문화적 파급력이나 가요계 주류를 바꾼점에선 비견될 수 있지만 조용필처럼 전 장르에 걸쳐서 전 세대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고 김건모, 신승훈 같은 경우엔 조용필과 흡사하게 전 세대를 아우르고 한 시대를 대표했던 국민가수들이자 싱어송라이터지만 절대적인 당대 인기와 지속성이 조용필 전성기에 비하면 다소 부족했고 역시 조용필만큼 여러 장르를 시도하고 성공시키진 못했으며 천재의 대명사이자 한국 발라드씬을 단 한장의 앨범으로 완성한 유재하는 뭔가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요절했으며, 이승철은 최전성기 시절에도 변진섭,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등에 밀려 한 시대를 완벽히 대표해본적이 사실상 없으며 보컬리스트로선 당연히 역대급이지만 싱어송라이터로서는 특출나지 않았으니 무엇보다 구설수 때문에 애초에 이승철이 여기 왜 끼는건지... 말 다했다.

조선일보의 대한민국의 최고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이미자, 3위는 나훈아, 4위는 서태지. 조용필이 2위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간간히 서태지[14]의 팬들이 비교되는 가수를 언급할 때 조용필을 언급하기도 한다. 물론, 애초에 팬의 연륜이 다른지라 보통 조용필의 팬에 의해 밀리는 편이다.

더불어, 거대 방송국을 이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수라고 한다. 보통 PD들이 가수를 지칭할때 ~씨라는 호칭으로 큐시트를 주는데 조용필은 방송국에 떴다하면 최고위급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니... 실제로 2013년 각 방송국 예능국장급은 다 조용필과 같은 시대 인물이거나 그 뒤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가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가수이기도 하다. 80년대는 음악 평론이란거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조용필의 크로스오버적인 실험들이 90년대 중반 들어서야 겨우 조금씩 이야기 되기 시작했다.

단독 공연으로는 96년 마잭 이후 처음으로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공연 하였으며(03년 데뷔 35주년 콘서트), 자신의 데뷔 **주년 공연 중 마지막으로 게스트를 초청한 이날 공연에는 신승훈, 신해철, GOD, 이은미, 장나라, 유열이 출연 하였다. (조pd는 신해철 차례때 보이지도 않는 뒤에서 랩을 했다는...)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그 중 03,05년 공연은 우천 속에서도 이룬 매진이었다는게 주목할 점. 이후 잠실 공연에 도전한 이승환도 우천을 만나며 객석이 비게되었고, 이후 이문세, 싸이 등도 도전했지만 잠실주경기장은 쉽사리 만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필은 괜히 가왕이 아니다.
또한 99년 말 대중가수 중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였으며 향후 몇년간 연말 투어로 그곳에서 마무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모든 활동은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같이 하고 있는데, 그의 위상과 걸맞는, 대한민국에서는 대부 급이라 할 수 있는 세션들만 거쳐갔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민, 송홍섭, 정원영,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

4 음악적 능력 & 창법

독보적이라고 할 만한 가수인 동시에,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 그냥 할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모든 방면에서 국내 최정상급. 앨범 사운드, 공연 퀄리티 모두 그냥 압도적이다. 워낙 능력자다보니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쓱싹 써낸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어디까지나 루머다. 실제로는 무려(?) 15~20분 정도 걸렸다고. 사기야 이건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

조용필을 성대모사하는 연예인들이 웃음을 목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따라해서 그렇지, 조용필의 가창력은 쉽게 따라할 것이 못된다.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2시간 내내 20여곡을 라이브로 흐트러짐없이 소화하기도 했을만큼 그의 가창력은 탄탄하다. 원래 데뷔 초기[15]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을 음악을 따라 부르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 [16] [17].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매우 특징적이고,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을 활용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인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중,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 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 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훵키하거나 Jazzy한 리듬의 곡 (10집 - I Love you / 모나리자, 12집 - 내모습, 13집 - 어젯바 꿈속에서, 14집 - 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 (13집 - 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 - 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웤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다만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 차이가 분명이 있기는 한데, 이는 더블링[18]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에 라이브를 할 때도 원래 가진 소리 자체는 얇은 음색이었으나, 앨범에서 들리는 소리는 약간 두껍게 들린다. 다만 라이브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노래할 때 성량 자체가 상당히 커서 어느정도 커버된다고.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자기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얇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드러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데에 있어서 초고수다.[19]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

다만 초기에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은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미8군 시절 대세가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창법이 노래 잘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뿐...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80년대 음반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레코드사와의 갈등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해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21]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부르는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 못한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것만 믿고 노력을 안 한건 아니다. 득음을 하기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22] 재능+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미지의 세계), (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23].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일렉트로니카,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까지 섭렵했다.[24]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60대의 나이라는 말에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25],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와 같은 음악을 즐겨 듣고[26]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있다. 심지어 지금은 저세상간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


5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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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故 안진현씨와 함께.

조용필은 1984년 3선 국회의원 박찬 씨의 딸 박지숙 씨와 결혼을 하지만 결혼기간의 갈등끝에[27] 4년만에 합의이혼한다. 이혼 당시 대부분 재산을 양도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등 가왕다운(?) 모습을 보였으며 원만하게 이혼을 하여 별 추문 같은 게 없이 조용히 끝났다. 이후 그는 94년 미국 로비스트 출신 안진현씨와 재혼했다. 안진현씨는 조용필의 음악적 삶을 존중하며 내조하고, 그는 이러한 아내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결혼 5년만에 심장병에 걸린 안진현씨는 2003년 투병도중 사망하게 된다. 당시 안진현씨의 사망소식은 주요언론매체에 의해 자세히 보도되었는데, 조용필은 장례를 치루는 내내 핼쓱한 모습으로 상주를 서다가 간간히 오열하는 모습 등을 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내의 사망이후 조용필은 상속액 전액을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으며, 현재까지 수익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28]
2003년 18집에 수록된 노래 '진' 은 바로 아내 안진현씨를 그리며 작곡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용필이 잠실운동장에서 처음 공연을 한 35주년 기념 콘서트날 공교롭게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데 조용필은 이 노래를 부르던 말미 잠시 울먹이기도 했다.
정치인 허경영이 2004년 10월엔 “가수 조용필씨의 부인인 고(故) 안진현씨에게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면서 조씨를 상대로 50만달러의 매매대금 청구소송을 냈다. 증인이 없으니 우기면 삥좀 크게 뜯어낼꺼라고 고인을 이용해서 정신나간 소송했지만, 어짜피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어 패소했다.

6 사건

활동경력 중 오점이라면 불륜소동과 대마초 흡연 사건. 이 사건들 이후 일시적으로 은퇴하기까지 했다.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을 때 조용필 역시 구속되었다. 과거에 뭔지도 모르고 피우다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곧 중단하긴 했어도 대마초를 몇 차례 피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가 경미해 활동금지는 면했었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수 대열에 서자 과거 경력이 다시 문제가 되었고, 결국 다른 가수들처럼 1979년 완전 해금까지 활동금지가수가 된다.

또한 최근 앨범 Hello가 발표된 이후 신대철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조용필의 빼앗긴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2000년에 저작권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현재 자신의 곡들 중 31곡의 저작권을 지구레코드임정수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깨닫고 법정까지 갔으나 결국 패소하였고 이 31곡의 저작권은 임정수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임재우에게 상속되어 넘어갔다. 그리고 임재우는 저작권을 다시 되돌려줄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해당기사]

  • 빼앗긴 31곡의 목록.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너무 짧아요, 슬픈 미소, 촛불, 간양록, 일편단심 민들레야, 잊을 수 없는 너, 여와 남, 물망초, 고추잠자리, 내 이름은 구름이여, 너의 빈 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생명, 난 아니야, 꽃바람, 자존심, 비련, 산유화, 한강, 나는 너 좋아, 황진이, 정의 마음, 눈물로 보이는 그대, 어제 오늘 그리고, 나의 노래, 그대여, 미지의 세계, 아시아의 불꽃, 여행을 떠나요

초기에 이 노래들을 부르기 위해선 저작권료를 내야한다고 잘못 알려졌었는데 이는 사실 관계가 다르다. 조용필이 지구레코드사에 넘긴 것은 엄밀히 복제권과 배포권, 유무형 복제권이다. 따라서 조용필이 본인의 노래를 녹음하거나 공연할 때 A회장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공연을 하는데는 하등 문제가 없다. 이는 공연권으로 조용필에게 있으며 창작실연자에게 부여된 권리다. 지구레코드가 강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러던 2013년 10월경 해당 곡들의 저작권을 조용필이 다시 되찾았다고 한다.[#] 자세한 합의 내용은 양자 합의에 의해 5년간 비밀을 유지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7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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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운영중인 YPC프로덕션은 주주배당금 대신 기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덕에 기부금액만 연평균 3억원.

표면적으로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기부를 엄청나게 많이 했다. 위에서 나와 있듯이 소속사의 주식배당금액의 일정부분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아내였던 故안진현의 유산인 24억원을 심장병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를 했고 2009년에도 조용필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원씩 기부하고 있다. 또한 콘서트 수익금 역시 매년 기부를 해 62억원 상당의 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영웅중에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금액은 84억원 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억원이 넘는 듯. 매스컴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본인 성격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8 기록

70년대, 80년대, 90년대, 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 보유.[29][30]

아래의 내용은 다소 과장된 부분이 일부 있다. 특히 일본 음반 판매량은 위의 문서에도 써있지만 허구다.
반대로 말하면 아래 열거된 대부분의 내용은 사실이다.

1. Pop Song 우위의 한국 음반시장을 가요 우위로 변화시킴[31]
2. 음악성과 대중성의 양립에 성공한 대표적인 Artist. (최초라는 의견도 있으나, 신중현, 나훈아 등 전 세대에도 이런 아티스트는 많았다. 싱어송라이터의 시대를 연 사람인 것은 맞다.)
3. 본격 self-made 아티스트시대를 연 주인공(작사, 작곡, 편곡, 연주, 프로듀싱).
4. 앨범 개념의 정착- 양질의 히트곡이 한 음반 안에 다수 수록.
5. 대중가수 최초 학문연구회 발족 - 조용필學 (Choyongpilogy) -(99년)

6.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교과서에 수록 - 친구여 (5집)
7. 밴드 음악의 지속적인 투자 - 사운드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데 공헌(유재하 같은 아티스트가 조용필 밴드 출신이다.)
8. 조용필식 한국적 Rock으로 Rock의 기반을 Underground에서 제도권으로 끌어올림. (이에 대해선 오히려 신중현의 공로를 더 논해야 맞다. 물론 그렇다고 조용필의 공로를 무시해야 할 건 아니다.)
9. 대중음악계에 '콘서트' 문화 정착(히트곡을 연속해서 부를 뿐인 리사이틀의 시대에서, 쇼 퍼포먼스가 결합된 '콘서트'로의 변화를 주도)
10. 대형공연의 시작과 활성화 - 체육관 콘서트, 스타디움 공연 등.

11. 국내 최대 인파 동원한 야외 Concert - 해운대 10만명 이상 (1993년)
12. 공연 사상 최초 5만명 동원 - 35주년 The History’ (유료관객 4만5천명)
13. 가수 최초 월드컵경기장 투어[32] - 2005년 pil&peace (30여만명 동원)
14. 해외 음악시장에 처음 진출 및 성공
15. 세계최초 7.2서라운드 콘서트 - 2007.12월

16. 한국 20세기 최고가수로 선정 및 수상 - (설문조사1위 1999년)
17. 광복60년 영향력 있었던 인물 1위(연예인부문) -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
18. 국내 최초 단일앨범 100만장 돌파(기네스 인정, 1991년)
19. 국내 최초 음반총판매량 1천만장 돌파(1994년, 99년 현재 국내외 2천만장 판매)
20. 국내 최초 신디사이져 도입 - 1집 단발머리(1980년)
(이에 대해선 이견이 있는 것이, 이미 그 전부터 전자오르간이 사용되었으며 공연이나 실제 연주에서 신디사이저를 쓴 것이 확인되었다.)

21. 한국 최초 M7(Major Seven) 코드 사용 - 3집 고추잠자리 (1981년)
22. 한국 최초 Digital 녹음 - 6집 (1984년)
23. 가요사상 가장 긴 대곡 (1989년) "말하라 그대들이 본것이 무엇인가를" (19분30초)[33]
24. 국내 최장수 Rock Band -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since 1980년~ 현재)
25. 국내 대중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80년)

26. 국내 대중가수 최초 공산국가 중국 북경 공연 (냉전시대, 국교 전 1988년)
27. 국내 대중가수 최초 예술의 전당 'Opera hall Concert' (1999년)
28.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곡당 1위 횟수 제한의 계기 제공 (1983년)
29.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의 국내가수 팬클럽 '오빠부대' 탄생 (자생적인 팬클럽)
30. 한국 최초의 Concept 음반 - 13집 "The Dreams" (1991년)

31. 최초로 국악장단을 Rock에 도입하여 대중적 성공 - 4집 "자존심"(1982년)
32. Remake 일본 최고기록 -'돌아와요 부산항에' 일본가수 30여명이 리메이크 (1999년 기준)
33. 일본 NHK 홍백가합전 한국가수 최초 및 연속참가(87, 88, 89, 90년)
34. 일본 NHK hall 외국가수 최초 Concert (1983년)
35. 한국 대중가수 일본 음반판매량 최다 - 공식집계 6백만장, 비공식 8백만장 - (1994년기준)
허구다. '기타' 문단 참고.

36. 최초 단일앨범 100만장 돌파 - "추억의 미아" (1986년)
37. MBC 선정 정부수립 50년 최고의 스타상 '가수부문' 수상 (1998년)
38.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로 선정 - 조선일보& 한국갤럽 조사, (1998년)
39. 한국가수최초 평양(북한) 류경체육관 단독공연 - 2005.8.23
40. Netizen 설문 통일 후 북한에서도 통할 가수 1위 (2000년)

41. 다양한 장르(락, 발라드, 리듬&블루스, 록오페라, 트롯, 동요, 민요 등)의 시도와 완성도 높은 음악실현
42. 민요의 대중화(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 새타령, 성주풀이 등)
43. 동요의 대중화('난 아니야'외 다수, 동요집 '까치소리의 기쁨' 발표)
44. KBS 라디오 24주 1위 - 고추 잠자리 : 6개월여 동안 1위 기록
45. 인기순위 동시 최다곡 진입 (20위안 TV-4곡, 연예지-6곡)

46. 라디오 트롯부문/비트롯 부문 1위 동시 차지 : '타인', '마도요

47. TV가이드 '85년 12월 가요 순위에 1, 2, 3위 - 최다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48. MBC'10대가수 가요제' 가수왕 수상 6회 (80, 81, 83, 84, 85, 86년)
49. KBS '가요대상' 최고인기가수상 수상 4회 (81, 82, 83, 85년)
50. TBC '방송대상' 최고 가수상 (80) 총 11회

51. 87년이후로 후배들을 위해 더 이상 상 안받겠다 선언 - 콘서트 위주의 음악활동 계기
52. 현재 18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하여 100곡에 가까운 히트곡을 남김 (1999년현재)
53. 가수최초 명예의 전당에 등재 - MBC (2000년)
54. 국내가수 공연 최초 첨단영상 프로젝트 PIGI영상 사용
55. 국내최초 모노, 스테레오, 서라운드 형식공연 - 예술의 전당(1999년)

56. 올림픽관련한 음악(서울서울서울) 및 월드컵 관련 음악(꿈의아리랑) 작곡
57. 예술의전당 개관(93년) 이후 최고치 기록갱신 - 유료판매율 1위(87%)
58. 예술의전당 개관(93년) 이후 20년간 가장 높은 예매율(104%) 기록 (2008년)
59. 탄자니아로부터 문화훈장 수훈 (2001년)[34]
60.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수훈 (2003년)

61. 한국인 최초 범 아시아 콘서트 - 팩스뮤직카 - (84년~2004년간 11회)
62. 한류의 원조, 국민가수 칭호 1호 가수[35][36]
63. 한국인 최초 일본에서 골든디스크상 수상 (2회 - 84년, 88년)
64. 제 1회 골든디스크상 대상(대상과 본상, 인기상을 모두 석권) - (86년)
65. 국회 영문싸이트 코리안팝에 처음으로 소개 - (2005년)

66. 자유콘서트 제1회 참가 - (1997년)
67. 대한민국 음악축제 제 1회 참가 및 단독공연 - 속초 1만 5천여명 - (2004년)
68. 대한민국 역사 움직인 100인에 선정(문화) - (2007년)
69. 1인 1기업 최초의 가수 - 필기획, YPC 설립
70. 한국 브랜드가치 설문조사 가수부문 1위 - (2003년)

71. 한국 최고의 가수 각종 여론조사 최다 1위 - (80년대 ~ 현재까지)
72. 국내가수 최초 (조용필) 콘서트신탁 탄생 (2008년)
73.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콘서트 기록 - 스태프 5천 200여명 스피커 300대 초대형스크린 등, 잠실주경기장 공연 횟수도 6회로 압도적(2003년 35주년 콘서트, 2005년 필앤피스 콘서트, 2008년 40주년 콘서트, 2009년 평화기원희망콘서트[37],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 2회[38])
74. 각종 홍보대사 위촉 및 명예시민으로 위촉 수십회
75. 국내 방송 CF - 최초 개런티 1억원 돌파 (1987년)

76. 각종서적 출간 - <바람이 전하는 말>, <조용필 그대의 영혼을 빼앗고 싶다> 등
77. 조용필에 목소리, 관상, 맹자사상에 관한 연구논문 발표됨
78. 팬덤활동: 무료영상회 및 자선행사, 인터넷방송국, 박물관 설립, 헌정밴드 조직
79. 실존가수의 노래비 건립(해운대 돌아와요 부산항에) 및 화성시 기념관 건립중
80.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음악적 영향을 줌(신해철, 서태지, 신승훈, 김종서, 박완규, 이승철 등...)

81. 과소 평가된 아티스트 - 여론조사 1위 조용필 - (2003년)
82. 대한민국 100대 명반 두 장 선정 - 조용필 1집(29위) / 조용필 7집(76위)
83. 조용필 7집 국내 최초의 대중적 로큰롤앨범 - 어제오늘그리고, 그대여, 아시아의 불꽃,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
<이전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이 있었지만 앨범 전체가 인기를 얻진 못했다.>
84. 대한민국 유료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관객을 동원한 공연 - 2010년 LOVE IN LOVE[39] [관련 기사]
85. 19집 <Hello>의 선공개곡 <Bounce>는 국내 음원 차트 개설 이래 만 63세, 데뷔 45년차 최고령 1위 기록(2013년)

9 그에 대한 평가

영어권 음악을 비틀즈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 평론가 임진모
아이돌적인 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위상을 거의 처음으로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실 한국에서 가능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의 다 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조용필 씨의 영향이 대중음악계 곳곳에 남아있고요.
- 평론가 이무원[40]
김제동 : 선생님에게는 으레 '가왕'이라는 호칭이 붙잖아요, 어떠세요?
조용필 : 그거 좋아하지 않아요, 전 조용필 그대로가 좋아요.
- 2011년 4월 김제동의 똑똑똑 인터뷰 중에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쓴 가수, 현재 모든 가수들이 바라는 진정한 표상[41]
레코드로 시작해 테이프를 발판으로 CD를 넘어서 음원까지 정복한 사람[42]

10 기타

  • 정말 알려지지 않았는데 1981년에 [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로맨스 영화에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 [다른 포스터] 하지만 흥행이나 평은 실패했고 다시는 영화에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영화는 이후로 묻혀져서 그야말로 보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다가 2009년에 팬들이 소규모 재상영을 가졌다.
  • 80년대 초인기 가수였지만 당시 연예인을 무시하던 사회풍조 탓인지 황당한 시비도 많이 당했다. 85년에는 카페에서 함께 술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기사]
  • 조용필의 노래 허공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래이며 이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중학생이였던 김혜수가 출연했다.[#]
  • 1991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KBO 리그 개막전에 초청되어 애국가를 열창하다가, 마지막의 '길이 보전하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부르는 실수를 저질러 까인 적이 있다. 본인은 '카메라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서...'라고 해명했지만 이후로 애국가를 부르는 초청 자리에는 가지 않고 있다.트라우마


  •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용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서울 서울 서울'을 만들었다. 조용필 본인이 직접 88올림픽 D-100기념 축제에서 밝혔다. 그러나 88 올림픽 주제곡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곡 자체는 주제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 구성되어 있다.


  • 한때 일본에서도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1990년대 초, 한류라는 단어조차 형성이 안됐을때 이미 조용필은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한국 가수가 아닌, 일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한국의 가수였다. 엔카, , 발라드 등의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특히 오모이데 마이꼬(추억의 미아)는 전국적으로 대히트, 일본내에서 100만장 이상을 판 플래티넘이 되었다. 1994년 기준으로 일본 내 조용필의 앨범 누적 판매량은 공식적으로 600만장, 비공식적으로는 800만장이다.
...라는게 보통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일본 내의 인기는 과장된 면이 많다. 첫번째로 "일본 누적 판매량 600만장"이라는 기록은 한국쪽 언론 기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고 실제로는 오리콘 차트 기록 상으로 어느 정도 차트에 머물렀다 싶은 곡은 첫주에 10위 밖에 머물다가 밖으로 밀려난 엔카 스타일의 싱글 2곡 뿐이다. 오모이데 마이꼬(추억의 미아)가 100만장 이상 판매했다는 기록이나 공식적인 앨범 600만장 기록이라는 것은 한국의 언론이나 조용필씨의 본인 사이트에 있을 뿐이고 일본 쪽에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 오리콘 차트 주간 순위는 13위로 당시 80년대 일본 음반 시장에서 오리콘 차트 주간 13위로는 백만장은 커녕 십만장도 어림 없었으며 당시는 더블 밀리언들도 마구 쏟아지던 90년대와는 다르게 지금처럼 밀리엄 싱글이 나오는게 드물었으며, 하다못해 싱글이 아닌 정규 앨범도 오리콘 주간 차트에서 1위를 해도 100만장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주간 싱글 1위곡도 50만장 이상을 넘길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2010년대 이후의 지금의 일본 시장과 거의 비슷한 실정이었다. 하다못해 싱글 오리콘 주간 순위 13위로는 음반 시장이 활성화되던 90년대에서도 100만장 이상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싱글 추억의 마야 순위 관련자료]
[100만장 이상 판매고를 거둔 역대 일본 음반들] 일본에서는 엔카 가수 이미지로 알고 있다. 실제 음반 판매 기록으로는 김연자가 더 많이 팔았다.
  • 다만 한국 대표 인기 가수로서 대우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한국 쪽의 푸쉬도 엄청났는데, 당시 일본 인기 엔카 가수들을 한국에 초청해 합동 공연을 열었고 한국 공중파에도 나왔다. 그리고 인기 엔카 가수들이라고 보기도 무리도 많은게 가장 친했던 다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나카지마 미유키와 같은 장르를 하는 뮤지션이다. 본의 아니게 엔카 느낌의 노래를 만들기는 했지만, 본질은 사다 마사시와 나카지마 미유키처럼 포크 가수다.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당시 일본 가수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라 임팩트가 컸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임팩트가 컸는지 반대로 일본문화가 다시 한국을 파고든다며 이를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그땐 그랬지
그리고 조용필이 초청한 일본 가수들과 친분이 있는 일본 가수들은 일본 내에서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고 또한 추억의 가수들이 대거 포함되어있었다. 가장 절친인 다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いい日旅立ち(좋은 날의 여행), 昴(묘성)과 같은 세기의 명곡들을 남겼으며, 특히 いい日旅立ち는 불세출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꼽히며[43], 그 작사 작곡을 맡은게 다름아닌 다니무라 신지였었고 또한 조용필도 いい日旅立ち를 불렀다. 또한 호리우치 타카오, 모리 신이치, 후세 아키라[44] 등과도 친했으며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가창력을 보인 가수들이었다. 그로 인해 조용필을 좋아하는 나이드신 분들 중에서 조용필로 인하여 일본 노래를 접한 사람들도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도 한류가수들의 인기의 척도로 종종 거론되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87~90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최후의 출연이던 1990년 같은 경우 서울 롯데월드 현지 중계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부른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참고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 기네스북에 '가장 많이 리메이크 된 외국 가수의 노래'로 등재되었으며(약 30회 이상) 일본 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에 진출한 한국배우/한국가수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2002년 20대를 겨냥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위) 허나 직후 욘사마가 센세이션하게 뜨고 이후엔 K팝이 일본을 강타하면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 천재라고 불리는 비운의 가수 유재하의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 앨범에 먼저 수록되어 있다.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당시 새파란 20대의 청년이던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너 곡 좀 써봐라라고 이야기 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유재하가 참여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혼자서 있는 곡 다 가져다줬는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어서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겨울을 나갔다고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밝혔다. 이때 김현식에게 가져다준 곡도 명곡인 '가리워진 길'. 그 10곡은 이후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이자 그의 유작 음반이 된다.
  • 조용필의 노래가 대중문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만화아기공룡 둘리에서조차도 조용필의 '친구여'라는 노래가 나온다. 그 노래를 들은 둘리는 눈물을 쏟는다. 허나 이 곡을 마이콜이 부른다면?
  • 93년 해운대 콘서트에서 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나, 1992년 서태지의 등장과 더불어 "슬픈 베아트리체" "고독한 러너" 등이 실린 14집과 "남겨진 자의 고독"의 15집이 흥행 실패하며 일시적인 침체기에 돌입했었다..(흑역사..) 조용필 본인도 신해철의 음악도시에 출연해 이 시기를 가장 아쉬운 시기로 언급하기도 했다. 94년 안진현씨와 재혼 및 전담 밴드인 위대한 탄생과 재결합하며 비로소 방송 활동을 재개하며 16집 "바람의 노래"로 모처럼 대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후 98년 올림픽공원에서 30주년 공연 콘서트 및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공연이 흥행하며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99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 공연(대중가수로는 처음)을 치르며 "가왕" 이미지를 굳혀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연말 마무리 콘서트장으로 삼았다. 오페라 하는 극장에서 1층! 2층! 3층! 하며 여행을 떠나요 부르신 분... (이후에는 잠실종합운동장... 문학경기장... 등 넓은 바깥으로 비맞으러 나가심...)
  • 2003년 데뷔 35주년 공연부터 잠실주경기장 공연을 즐겨(?) 개최하기 시작한다. 2005년에 북한 공연 이후 다시 잠실 공연을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 03, 05년 모두 제대로 비를 만나는 바람에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스탠딩으로 물반 땀반 야광봉을 흔들었다. 조용필 본인도 05년 공연은 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중간에는 스스로 신난 나머지 "비 상관없지 않아요??" 드립을 시전하시다 "비가...음... 조금 덜 오네요" 라고 민망해하며 수습하기도 하였다. (팬들에게는 이런 썰렁함이 매력이기도 하다.) 뒤로는 다행히도 비는 피하고 있다고...
  • 2010년 5월 28~29일 열린 콘서트(Love In Love) 에서 잠실주경기장에 1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45]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60세의 나이에도 라이브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역시나 황제라는 것을 보여줬다. 관객들은 대부분이 4~50대였지만, 노래를 부를 때 열광하는 건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고... 특히나 본 공연의 수익금은 소아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기부하여졌다는데, 그 액수만도 수십억원대라고 한다. [관련기사]
  • 표절에 대한 흑역사도 존재하는데, 9집에 들어 있는 곡 "청춘시대"[46]의 기타연주 부분이 잉베이 맘스틴의 "Far Beyond The Sun"의 기타연주와 비슷하다는 부분이 밝혀졌다. 이 곡은 조용필이 데리고 있던 기타리스트가 작곡한 곡이었다. 표절 의혹으로만 제기되었고 표절로 판명된 것은 아니지만, 조용필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이 곡의 프로모션을 중지했고, 해당 곡을 작곡한 멤버를 문책했다고.


  • 군가 진짜 사나이를 널리 알린 가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에는 음반 발표시 꼭 건전가요(...)를 넣도록 되어있었는데, 7,8,9집에다가 건전가요로 진짜 사나이를 자신이 직접 불러넣어둔 것.[47]
  • 조용필 콘서트에 갔었던 아티 콘펠드의 말로는, 조용필의 우드스탁의 참가는 그의 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가수 가운데 이 분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 락의 대부인 신중현씨나 조용필 스스로도 존경하는 가수라고 밝힌 패티 김 정도.[48] 재미있는 사실은 패티 김은 자신에게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진정한 국민가수는 조용필과 이미자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는 것.
  • 1980년대 후반 연말 시상식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유는 알다시피 조용필의 독주체제에 제동을 걸만한 가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 MBC의 가수왕자리를 계속 차지했는데[49], 예외적으로 MBC에서 1982년 이용, KBS에서 1984년에 김수철, 1986년에 전영록이 가수왕을 차지했다.[50] 또한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였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흠좀무.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였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자에게 골든컵을 주고 순위에서 빼버리는 시스템은 조용필의 곡만 1위를 해서 그걸 막기 위해서란 이야기도 있었다.[51]
  • 2011년 4월 15일엔 작년에 한 약속[52]을 지키기 위해서 소록도를 방문해 공연을 했다. 2009년 전남 고흥과 소록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위문 차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진짜 다시 방문한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그는 소규모 강당에서 즉석에서 요청곡을 받고 중간에는 무대에서 내려와 같이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노래를 부르는 등 주민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음악뿐만 아니라 인간성으로도 오오 대인배 오오.[#]
  • 2011년 5월 7일 서울 올림픽공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2개월간 전국투어를 열었다. 이번에는 관객 앞으로 움직이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1년 [올해의 콘서트 티켓 최다 판매 가수]의 기록을 세웠다. 2위는 이승철인데 이승철이 29회 공연한 반면 조용필은 이에 절반인 14회 공연만으로 티켓 파워에서 앞섰다.
  • '나는 조용필이다'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생각하면 MBC프로그램들과 인연(?)이 꽤 있는데 결국 2011년 9월 25일 나는 가수다에 특별출연했다.
  • 2013년 4월 23일 정규 19집 Hello의 발매가 확정되었다. 4월 16일 선공개곡 'Bounce'가 발표되었는데 발표되자마자 음원차트 1위를 찍었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가수가 차트 1위를 탈환한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전무하다. 진짜로 살아있는 전설. LP로 데뷔하여 카세트 테이프CD를 거쳐 디지털 음원까지 석권한 가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음원 소비 연령대를 분석한 [멜론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의 여타 히트곡과 비교해도 소비자층의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조용필의 히트곡을 듣고 자란 4~50대에 한정된 호응이 아닌, 음원 차트의 주요 소비자이면서 조용필을 잘 모르는 10~20대가 듣기에도 충분히 먹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인 셈. 말그대로 국민가수.본인은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4월 23일 19집 전곡을 발표하며 쇼케이스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오프닝으로 국카스텐이 '모나리자'를 불렀고, 박정현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자우림은 ''을 열창하며 가왕의 귀환을 축하하였다. 특급가수를 오프닝으로 세우는 가왕의 위엄
그리고 2013년 5월 3일. 23년 전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로 23년 만에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으로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하였다! 그의 나이가 2013년 기준으로 63세라는 진갑을 넘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돌들이 강세를 보였던 가요프로에서 60대 최고령 가수로서는 최초로 1위를 차지하게 된 이례적인 사례.
  • 가왕의 가요프로 1위 수상 내역
※날짜순 정렬
날짜곡명방송사/방송명비고
1981.02.10촛불KBS 가요톱10(모든 방송사 통틀어) 순위제 신설 이후 초대 1위
1981.02.17KBS 가요톱10-
1981.02.24KBS 가요톱10-
1981.03.10KBS 가요톱10-
1981.03.17KBS 가요톱10-
1981.03.24KBS 가요톱10-
1981.03.31KBS 가요톱107주 1위
1981.10.13미워 미워 미워KBS 가요톱10-
1981.10.20KBS 가요톱10-
1981.10.27KBS 가요톱10-
1981.11.03KBS 가요톱10-
1981.12.22KBS 가요톱10-
1982.01.05KBS 가요톱106주 1위
1982.08.18못 찾겠다 꾀꼬리KBS 가요톱10-
1982.08.25KBS 가요톱10-
1982.09.01KBS 가요톱10-
1982.09.08KBS 가요톱10-
1982.09.15KBS 가요톱10-
1982.09.22KBS 가요톱10-
1982.09.29KBS 가요톱10-
1982.10.06KBS 가요톱10-
1982.10.27KBS 가요톱10-
1982.11.03KBS 가요톱1010주 1위
1983.01.12비련KBS 가요톱10-
1983.01.19KBS 가요톱10-
1983.01.26KBS 가요톱10-
1983.02.02KBS 가요톱10-
1983.02.16KBS 가요톱105주 1위
1983.08.28나는 너 좋아KBS 가요톱10-
1983.09.11KBS 가요톱10-
1983.09.18KBS 가요톱10-
1983.09.25KBS 가요톱10-
1983.10.02KBS 가요톱105주 1위
1984.02.12친구여KBS 가요톱10-
1984.02.19KBS 가요톱10-
1984.02.26KBS 가요톱10-
1984.03.04KBS 가요톱10-
1984.03.11KBS 가요톱105주 1위
1984.08.05정의 마음KBS 가요톱10-
1984.08.12KBS 가요톱10-
1984.08.19KBS 가요톱10-
1984.08.26KBS 가요톱10-
1984.09.02KBS 가요톱105주 1위
1984.11.04눈물의 파티KBS 가요톱10-
1984.11.11KBS 가요톱10-
1984.11.18KBS 가요톱103주 1위
1985.06.19어제 오늘 그리고KBS 가요톱10-
1985.06.26KBS 가요톱10-
1985.07.10KBS 가요톱10-
1985.07.17KBS 가요톱10-
1985.07.24KBS 가요톱105주 1위
1985.10.23그대여KBS 가요톱10-
1985.10.30KBS 가요톱10-
1985.11.13KBS 가요톱10-
1985.11.20KBS 가요톱10-
1985.11.27KBS 가요톱10-
1985.12.04KBS 가요톱10-
1985.12.11KBS 가요톱107주 1위
1986.03.19허공KBS 가요톱10-
1986.03.26KBS 가요톱10-
1986.04.02KBS 가요톱10-
1986.04.09KBS 가요톱10-
1986.04.16KBS 가요톱105주 1위
1986.11.05바람이 전하는 말KBS 가요톱10-
1986.11.12KBS 가요톱10-
1986.11.19KBS 가요톱103주 1위
1988.01.20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KBS 가요톱10-
1988.10.05서울 서울 서울KBS 가요톱10-
1989.05.21QKBS 가요톱10-
1990.08.24추억속의 재회MBC 쇼 네트워크-
1990.09.07MBC 쇼 네트워크-
1990.09.14MBC 쇼 네트워크-
1990.09.21MBC 쇼 네트워크-
1990.09.28MBC 쇼 네트워크-
1990.10.05MBC 쇼 네트워크6주 1위
2013.05.03BounceKBS 뮤직뱅크23년 만에 가요프로 순위제 1위
2013.05.04MBC 쇼 음악중심-
2013.05.10KBS 뮤직뱅크2주 1위
가왕의 가요프로 1위 횟수는 (네티즌들이 그나마 순위제로 봐주는 KBS, MBC, SBS, M.net 방송사[53]에서 진행되는 가요프로 순위제 주간 1위 기록을 모두 포함했을 때)다음과 같이 무려 78회 수상을 하였으며, '뮤직뱅크' 연말결산과 사실상 듣보라 순위제 취급도 안하는 '쇼 챔피언'까지 포함시키면 총 80회 1위를 차지한 셈이다. (참고로 '쇼 챔피언'에서는 'Hello'로 1위를 차지하였다.) 'Bounce'는 단 한번의 방송 출연 없이도 가왕의 귀환을 알린 또 하나의 명곡이 되었다.
  • 특이하게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푸는데 노래방에서조차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모든 가수들을 라이벌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모든 가수들이 라이벌이라.....어?? 설마...그래도 가끔씩은 다른 곡 부르긋지[54]
  • 2013년 Hello 투어는 전반기와 후반기 투어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전반기는 주로 실내체육관이였고 후반기는 야외 경기장 중심이였다. Hello 투어를 통해 그동안 방문이 뜸했던 지역에서도 엄청난 관객을 모았다. 아마 국내에서의 전국투어 단위로는 역대 최다 규모, 역대 최고령 전국투어 기록을 또다시 조용필이 거머쥐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반기 투어가 끝나고 쉬었다가 연말에 앵콜 투어로 또 공연을 가졌다. 이쯤되면 무서울 지경.
  • 2014년에는 활동을 쉬었다가 건강회복 이후 2015년 11월부터 전국투어 공연을 다시 가진다.
  • 배우 안성기와 중학교 동창으로 서로 집에도 놀러 갈 정도로 매우 절친이라고 한다. 조용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때 같이 앉는 짝궁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성기왈 '그 친구 키가 중학교때 키 그대로'라고 하니 흠좀무. 한쪽은 가왕, 한쪽은 국민배우라니 이 무슨 먼치킨 콤비 그리고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중학교 동창인 안성기와 나란히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구봉서 선생과 패티 김도 받았다고 한다.] 2003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이후 개인 통산 두 번째 훈장.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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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로 엄청난 동안이다. 50년생으로 곁에 있는 배우 안성기는 조용필보다 프로필상 2살 연하다.[55]
  •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비산초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이가 바로 조용필이다. 1978년 설립 이래 교가가 없다가 조용필의 조카인 조수지가 이 학교에 재학할 당시 학교측에서 조용필에게 교가의 작곡을 부탁했다고. 작사자는 초대 교장이었던 전정술 교장이다.[##]


11 같이 보기

  1. 1980년까지는 TBC 방송가요대상이라는 이름의 시상식으로 진행됐고 언론통폐합 이후인 1981년부터 KBS 가요대상으로 이름을 바꿔 진행했다.
  2. 10대 가수 가요제 시절의 대상 정식 명칭은 '최고인기가수상'이었다.
  3. 사실 1987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의 최고인기가수상은 조용필로 확정돼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사유로 조용필이 수상을 거부하면서 공식 시상 순서가 취소됐고 프로그램 자체도 시상식이 아닌 그냥 공연으로 대체했다. 형식적으로 선정한 1987년 최고인기가수상에는 전영록, 최고인기가요상에는 이선희의<알고 싶어요>가 뽑혔다.
  4. 고교 비평준화 시절 서울시내 5대 공립고교 중 하나로 꼽히던 명문학교였다.
  5. 중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경동고등학교 동창회 등에서 졸업생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중퇴건 졸업이건 경동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졸업생으로 인정하는 듯. 졸업식날 가출해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얘기도 있는걸 보면 졸업은 한 듯 하다.
  6. 사실 오빠부대라는 용어 자체는 남진/나훈아 시대부터 있긴 있었다. 그 오빠부대가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은 조용필이 시작.
  7. <비련>의 도입부.
  8. 이종환이 라디오에서 지금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벚꽃마냥 부산에서 대구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9. "연안부두"를 부른 밴트 '김트리오'와는 다른 그룹이다.
  10. 이 당시에는 최이철이 나가고 '울고 싶어라'로 유명한 이남이가 베이스를 맡게 된다.
  11.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 응원가로 쓰이고 있다. 부산 갈매기와 함께.
  12.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게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13. 신해철은 상대가 누구건 할 말은 하는 독설가이자 성격이 불 같기로 유명한 아티스트인데 조용필은 '귀엽다'라고 일축해 버린 것이다(...). 실제로 조용필의 엄청난 위상을 존중한 신해철이 항상 이례적으로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했음을 생각한다면 조용필 입장에서는 귀여울 만도 하다.
  14. 참고로 서태지의 혁명적인 음악 세계는 조용필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존경하는 가수로 서태지는 단연 조용필을 꼽았다.
  15. 미군부대 밴드에서 기타를 담당하다가 보컬이 갑자기 입대하게 되어(...)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
  16. 실제로 로드 스튜어트의 평소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하이톤이라는 점을 캐치해, 금관악기를 하나 주문하고 성대의 떨림판과 비교해가면서 허스키한 보이스를 연마했다고 자신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다. 피를 토한 것은 언론의 과장된 부풀리기였다고 부정했고, 대신 성대가 피로를 느끼면 소금물을 마셔가면서 붓기를 약간 가라앉히고 다시 연습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대 자체의 내구력을 연마해 온 셈. 실제로 이런 발성은 서편제에서 말하는 수리성 단련 방식과 상당히 비슷하다
  17.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고...는 하나 이 일화는 과장된 면이 있다
  18. 한 선율을 부를 때 오버더빙을 하는 방법. 똑같은 멜로디를 똑같은 음색으로 노래를 한 번 더 부르기 때문에 청자가 들을 시에 소리가 좀 더 풍성하게 들린다
  19. [[1]] 라던가 아니면 이곡에서 처럼[[2]] 후렴구에서 잠시 등장하는 스캣 부분에서 들을 수 있다
  20.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통 가수 스스로가 코러스를 만들기 보다는 주로 외부 객원 보컬들을 활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팝 계에서 코러스를 잘 넣기로 유명한 가수로는 프레디 머큐리, 마이클 잭슨, 알 지아로 등이 있다
  21. '기도하는꺄~~'으로 유명한 초기 조용필의 대표곡 '비련'의 후렴구를 들어보자. 풍부한 성량을 터트리듯이 노래하는 당시 조용필의 창법을 들을 수 있다.
  22. 실제로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3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내부장기 손상으로 이건 얄짤없는 사망루트고, 그 다음은 폐를 포함한 호흡기 손상인데 이것도 노래에 치명적이다. 마지막으로 득음이라고 칭하는 판소리쪽인데, 이쪽에서 피가 난다는건 이렇게 피가 난다는 소리가 아니다. 애초에 현대가요쪽 창법과 판소리 창법은 상당히 달라서, 이런 식으로 피를 보면 성대가 변형되기 때문에 평상시 목소리가 쇳소리가 난다. 목을 험하게 굴려서가 아니라, 자기 노력으로 목소리를 이정도로 바꾼 가수는 현대 가수중에서는 거의 없다시피한 수준. 나무 위키에서 알만한 인물이라면 야마가타 유키오 정도일 것인데 이것도 다소 애매하다.
  23. 이상 각주는 모두 대표적으로 한곡들만 기재하였음.
  24. 처음 프로듀서가 버벌진트를 추천하자 일주일 동안 활동중인 거의 모든 국내 래퍼들의 음악을 다 들어본 후 선택했다고 한다. 버벌진트는 제의 받았을 때 벌써 만우절이 왔나 싶었다고.
  25. 의외의 친분으로 빅뱅의 태양이 있는데 태양이 RISE 앨범을 준비하면서 신곡 '버리고'를 직접 조용필에게 찾아가 들려주었다고 한다. 거장과 독대하는 아이돌 정점의 위엄 그 자리에서 같이 백 번도 넘게 들었다고.
  26. 인터뷰에서 어떤 음악을 즐기시냐는 질문에 빌보드 차트에 있는 음악을 주로 듣는다고 답변한 바 있다. 물론 옛날 노래도 많이 듣는다고 덧붙였다.
  27. 음악에 지나치게 몰두했던 조용필과, 가정에 충실해주길 바랐던 박지숙씨 간에 의견차이가 있었음.
  28. 조용필은 자녀를 두지 않았다. 첫번째 결혼에서는 아내와의 불화가 원인으로 보이며, 두번째 결혼에서는 부부만의 삶을 가지기를 원하여 아이를 두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
  29. 아쉽게도 연속은 아니다. 00년대에는 콘서트에 집중하며 정규앨범은 2003년의 'Over The Rainbow' 앨범 단 한 장만을 발표했으므로 이렇다 할 차트 기록이 없다.
  30. 영미권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유일하게 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빌보드 차트 10위권 진입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31. 물론 이 흐름의 변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것은 맞지만 대중음악 소비에서 서구 팝>가요로의 본격적 전환은 들국화, 이문세, 신해철, 이적,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신승훈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음악인들에 의해 80년대 중후반-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전반적인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상승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 질적 상승에 조용필은 대단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32. 월드컵 경기장을 꽉 차게 만드는 공연을 하려면 최소 2~3만명 정도는 불러모으는 티켓 파워를 가져야 하는데, 서울을 제외하면, 인천, 수원 등 수도권 중에서도 서울과 가까운 지역이 아니고서야 이만큼의 관중을 불러모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특히나 지방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야말로 조용필만이 가능한 공연.
  33. 삼태기 메들리가 구버전 21분, 신버전 25분으로 더 길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은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곡을 이어붙여서 만든 메들리 형식의 곡이기 때문에 단일 곡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4.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탄자니아를 알린 것이 바로 그 계기. 킬리만자로 산은 실제로 탄자니아 - 좀더 정확히는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 지대 - 에 있다.
  35. 다만 패티김이 1960년 NHK의 초청으로 일본에 갔고 이후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것을 감안하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한류를 생각할 때 조용필이 원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6.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인터넷 사회 문화는 조금만 인기 있는 인물이 등장할 경우에 '국민'이라는 호칭을 누구에게나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가수도 그러한 경향을 따라가는데 사실상 한국에서 '국민가수' 수식어가 가장 어울리는 이는 현 시점에서 조용필이라 하겠다.
  37. 다만 이 공연은 국제평화마라톤대회의 축하 행사로서 무료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단독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6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가왕의 위엄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38.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해 마련한 유료 콘서트로서, 2010년 5월 28~29일 양일간 총 10만명을 동원하여 대한민국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유료 관객의 기록을 쓴 공연이다.
  39. 하루에 5만명씩 2010년 5월 28일~29일 양일간 총 10만명을 동원하였다. 특히나 이 공연의 수익금을 500여명의 소아암 어린이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하였다.
  40. [출처]
  41. 하단에도 후술하겠지만 판소리부터 오페라까지, 발라드부터 까지 음악장르를 가장 다양하게 시도하고, 가장 많이 성공한 가수다.
  42. 썰전에서 허지웅이 한 말.
  43. 1979년 일본국유철도의 DISCOVER JAPAN 캠페인의 BGM으로 쓴 노래로 유명하다.
  44. 올리비아 핫세의 두번째 남편으로 유명하고, 재일교포설도 있던 가수.
  45. 하루에 5만명씩 총 1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46. 맥콜 CM송으로도 쓰였다.
  47. 재발매본에서는 빠져있다.
  48. 한국 스탠더드 팝 최고의 디바로 불린 가수로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 조용필 이후 한국인 두번째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한 가수로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지만 2012년 2월 15일에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고 6월부터 은퇴공연을 갖는다. 대표곡만 해도 600곡 이상이 되는 가수.
  49. 당시 KBS는 전년도 대상 수상자가 나와서 발표를 했는데, 3년 연속 대상을 타던 1983년에는 본인도 헛웃음을 지으면서 ["접니다...조용필"]이라고 발표했다.
  50. 이때 이용의 가수왕 수상이 말이 많았다. MBC에서는 팬들의 우편에 의한 투표로 비밀집계로 가수왕을 뽑았는데, 성난 조용필의 팬들이 투표 공개를 요청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MBC는 말도 안되는 해명을 하는데, 그 이유가 조용필은 너무 많은 상을 탔기 때문에 다른 가수에게 기회를 줘야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작을 했다는 것을 MBC가 인정했던 셈.
  51. 골든컵이 처음 도입될 때는 5주가 아니라 10주 연속이었다.
  52. 영국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소록도에 방문공연을 했었다. 조용필은 약속된대로 그 연주에 맞춰 본인의 잔잔한 대표곡 2곡만을 불렀는데, 노인들이 너무 아쉬워 하자 곧 다시 공연을 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53. 참고로 KBS는 1981년 2월 '가요톱10'으로부터 순위제가 시작되었고, MBC는 1989년 10월 말 '쇼 네트워크'로부터, SBS는 대충 1994년부터 시작되었고, M.net은 2004년 '엠카운트다운' 첫 방송과 동시에 순위제를 시행하였다.
  54. 그런데 지금까지 조용필과 노래방에 가본 연예인들의 말에 의하면 하나같이 본인노래만 부르신다고 한다(...). 아예 2시간동안 노래방에서 본인노래만 콘서트 수준으로 부른적도 있다고.
  55. 다만 위에서도 기술되었듯이 실제로는 동갑이다. 출생기록처리가 전산화 되기전에는 호적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꽤 있었는데,꽤가 아니라 매우 1980년대까지도 매우 흔했다. 안성기가 50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고 조용필과 중학교 동창이었으니 안성기 실제 나이가 50년생 또는 빠른 51년생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