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판본)
원래 이런 류의 약도를 베아투스 지도라고 부른다. 8세기 스페인의 수도승인 리에바나의 베아투스라는 인물이, 6~7세기 경의 세비야 대주교이자 역사가 겸 학자였던 '성 이시도르'가 쓴 박물지의 내용과,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에서 좀 베낀 내용과, 성서(특히 창세기)에 적힌 내용을 기반으로 알려진 세계의 약도를 그렸다. 베아투스 지도는 그가 쓴 요한계시록 해설집에 넣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정밀할 필요는 없고 적당히 성서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면 그만이었다. 즉 지도라기보다는 약도나 세계관 해설집에 포함시킨 개념도에 가까운 것이었다. 판타지 소설 속지에 흔히 들어가있는 지도가 실제 지구의 지도에 비해 얼마나 정확한지 생각해보면 일목요연하다. 베아투스는 탐험가도 지도제작자도 아니었으므로 지도 역시 그냥 남이 써놓은 박물지의 내용을 적당히 추려서 성서와 얼버무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T-O 지도는 베아투스 지도를 엄청나게 간단하게, T와 O 모양을 이용해서 약식으로 그린 것에 해당한다. 이건 항해용이나 여행용 상세 지도가 아니다. 그냥 종교적 개념도에 지나지 않는다. 만드는 방법은 엄청 간단하다.
이렇게 구성성분이 T 와 O 이기 때문에 이름이 T-O 지도(T-O Map)다.
T-O 지도가 참고한 언급의 원전이랄수 있는 7세기 세비야 대주교 '성 이시도르'는 자신의 저서 박물지에서 "땅은 여러 덩어리가 뭉쳐서 마치 바퀴처럼 돌아 둥그렇게 만들어졌으며 그 주변을 바다가 둘러싸고 또한 땅을 3덩이로 나누는데, 한 부분은 아시아, 한 부분은 유럽, 또 한 부분은 아프리카이다." 라는 글을 남겼다. 이걸 읽은 베아투스를 비롯한 후대인들은 지구가 접시처럼 평평한 둥근형이라고 착각하고 단순화시켜버렸다.
하지만 사실 성 이시도르는 지구가 공처럼 구형이라고 언급한 것이었다. 위의 언급 외에 성 이시도르의 책에서 다른 언급을 살피면 그가 지구가 구형이었다고 믿었다는 것이 더 확연해진다. 뿐만아니라 지동설이 대세가 되기 전부터 고대 그리스 인들도 지구가 구형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 시절부터 중세 초까지, 지구에서 정 반대편 위치를 가리키는 개념인 대척지(antipodes)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였다.
대척지 개념(즉 지구가 둥글다는 개념)이 신학에서 이단이 된 것은 8세기의 제91대 로마 교황 자카리아가 이를 이단으로 선포하면서였다. 이는 당시 신학 논쟁에 관련되면서 고대 시절부터 예견되어온 과학적 논거가 무시되어버린 결과이다. 이 시기가 동로마도 망했어요 상태가 돼버린 시기와 일치하는건 착각이다. 이 논거가 이단화 돼버린건 논거 자체가 이단적인게 아니라, 이걸 기반으로 만들어낸 생각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잘츠부르크 주교인 베르길리우스는 천문학자이기도 해서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들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대척지 개념(지구가 둥글다는 개념)을 믿고 있었다. 이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대, 베르길리우스는 '대척지가 존재한다면 그 땅에는 성서의 아담을 선조로 하지 않는 다른 인류가 존재할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가 짊어질 원죄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는 주장을 한게 문제가 되었다.
원죄가 없는 인류가 존재한다는 발상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으니 당연히 이단적이었는데, 문제는 교황이 베르길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선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애꿎은 대척지 개념까지 너 이단!! 이단이라고 선포해버린것이다. 이 때문에 14세기까지 유럽에서 지동설이 무시된 것이지, 지동설 등장 이전에 모든 유럽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개념을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다.[3] 정교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추가 바람. 대륙이동설이 진작에 나왔으면 이런 병크는 없었을.... 아니, 대륙이동설도 너 이단!이 되었을지 모른다.
한마디로 선각자들은 제대로 알고 썼는데, 후대인들이 이단 논쟁하다가 이걸 왜곡시켜버린게 몇세기 동안 통용돼버린 케이스 되겠다.
고대 그리스 지리학과 성 이시도르의 발언을 근거로 T-O 지도를 현실에 대입하면, 사실은 대충 이런 모양이 나온다.
위가 동쪽일 뿐 T-O 맵의 근거가 된 고대 시절의 지리학 자체는 꽤나 정확하게 보고 있었던 셈이다.
T-O 지도는 종교적 약도이기 때문에 실제 길라잡이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인들이 여행할때는 길을 아는 길잡이를 대동하거나, 길잡이 없이 실제 여행을 할때는 여행기(itinerary)라고 부르는 여행가나 탐험가들이 어디서 어디까지 가는 도중에 보이는 사물과 환경 등을 적은 기록물을 이용하는게 보통이었다. 전문적인 항해가나 여행가들은 현대 식의 지도는 아닐지언정, 경험칙에 근거해서 의외로 꽤나 상세하게 여행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T-O 지도를 믿고 그것만 보고 갔던게 아니다!
하여튼 이러한 지도는 서양인들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서서히 사라져갔고, 15세기 들어서는 지구 구형설이 보급되어 갔다[4]. 물론 종교적 이유로 반대 의견을 표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15 ~ 16세기 항해 실적으로 죄다 K. O.
거꾸로 말하면 적어도 14세기까진 쓰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마지막 T-O지도 판본은 14세기 물건이다. 14세기 버전은 단순하게 T-O만 그려놓는게 아니라 T자로 된 줄기 사이에 길, 도시, 강, 산맥, 섬, 기타 등등의 상세 요소를 삽입해서 디테일(...)을 살리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그래봤자 부정확한 지도라는 사실은 변하는 게 없지만.
나름대로 상세하다...
- ↑ T자가 나타내는 것은 바다 또는 강으로, 대체로 반시계 방향으로 흑해 또는 도나우 강, 지중해, 나일 강 또는 홍해이다.
- ↑ ↑쪽을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놓고 본다면 위치가 맞다. 아시아의 북쪽 끝에는 천국을 그려넣기도 한다.
- ↑ 인도에서는 굽타 시대부터 지구 구형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전에 그리스인 중에도 지구가 구형임을 주장한 사람이 제법 많다. 중학교 때 배운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법을 생각해보자. 문제는 이것이 보편화되지 못하고 중세에는 종교적 이유로 이러한 것들이 다 묻혀 있었다는 것.
- ↑ 물론 식자층 사이의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콜럼버스 항해를 반대한 이유는 '지옥으로 떨어질까봐'가 아니라 '너무 넓어서 가다가 굶어 죽을까봐'이다. 서쪽으로 항해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다의 길이를 축소하여 생각했으며, 실제로 아메리카가 없었다면 굶어 죽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