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미우리 자이언츠/선수목록

1 현 로스터

1.1 감독

1.2 투수

다구치 카즈토 1995년9월14일생 요미우리소속 좌투좌타

1.3 포수

1.4 내야수

1.5 외야수

  • 5. 개럿 존스
  • 7. 쵸노 히사요시
  • 9. 카메이 요시유키
  • 12. 스즈키 타카히로 -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대주자 요원.
  • 31. 마츠모토 테츠야
  • 33. 하시모토 이타루
  • 44. 오타 다이시
  • 58. 다테오카 소이치로 - 일본판 탈쥐효과. 소프트뱅크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했는데 리드오프 자리의 구멍을 메우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탈쥐효과라고 하기에는 원 소속팀이 너무나도 잘 나가는 게 함정. 지금도 소프트뱅크에는 다테오카보다 훨씬 기량이 낫다고 평가받는 선수들이 1군에 자리가 없어서 2군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그렇다고 현재의 1군 선수들이 팀에 민폐를 끼치면서 이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다테오카의 경우에는 그 선수들보다 더 기량이 어정쩡했던 게 본인의 선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기현상의 수혜를 받은 격. 현재 소프트뱅크의 1군 선수들은 그 선수들보다 한수 위의 기량으로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다. 1군에서 자리를 잡고 싶으면 경쟁에서 이겨라. 그야말로 팀 내 경쟁의 이상적인 형태. 대체적인 평가는 소프트뱅크에 남아 있었으면 2군에서도 대타, 대수비 요원 밖에 못 했을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 단, 소프트뱅크 시절에는 2군에서 조차 주전자리를 장담 못했는데 새 팀에서 주전으로 자리를 잡은 이 선수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야마나카 히로후미 덕분에 소프트뱅크의 팜은 다른 팀 팬들이 군침을 흘리는 자원의 보고 취급을 받고 있다.

2 OB

괄호안의 숫자는 재적연도

2.1 투수

전쟁으로 인해 일찍 산화한, 초기 일본 야구의 신화적인 선수.
러시아계 일본인으로 초기 거인군의 에이스였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1918년 5월 18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1944년, 25살의 나이로 감독직에 올랐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최연소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했고, 1976년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시절 후지모토 히데오(藤本 英雄)라는 등록명을 사용한 시기가 있는데 퍼펙트 게임은 이 시기에 달성했다. 그래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 투수라고 하면 보통 후지모토 히데오라고 한다.
일본 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재출범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선수.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는 큰 인상은 남기지 못했지만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의 임기 사이에 땜빵 가교 역할을 하면서도 그 사이에 두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룬 명장. 나가시마가 1980년 해임당하고 나서 같은 해에 은퇴한 오 사다하루가 코치로서 경력을 쌓는 동안[2] 감독 부임 첫 해인 1981년에 일본시리즈[3]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83년 세이부와의 일본시리즈에서의 패배[4]의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후지타가 자진사임히고 정해진 수순대로 오 사다하루가 감독으로 앉았는데 오 사다하루가 임기 5년동안 기대이하의 성적을 거두자 88년 시즌 후에 자진 사임의 형식으로 오 사다하루를 물러나게 했다. 다음은 첫번째 임기 당시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과제를 안고 본의 아니게 물러난 나가시마를 다시 감독으로 앉혀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는 수순이었으나 나가시마 본인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고사하는 바람에 다시 급하게 후지타에게 감독 취임을 요청했고 감독자리에 재취임한 후지타는 부임 첫해인 89년 다시한번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5] 4년동안 요미우리를 지휘한 뒤 1992년 야쿠르트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2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우승 실패를 책임지는 형태로 다시 사임을 했고, 후임에는 FA와 역지명제 도입 등으로 돈질로 선수들을 싹쓸이하는 게 가능해진 때를 기다려온 나가시마가 다시 취임했다.
고시엔 2대 괴동.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으나... 감독으로선 팀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일본명 니우라 히사오. 나가시마 감독하에서 70년대 후반 요미우리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였다.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으나 에가와 사건에 얽혀 한신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비운의 투수.
70~80년대 초반 거인의 우완 에이스. 우타자 몸쪽으로 날카롭게 꽂히는 슈트가 주 무기였다. 2014년 오프시즌에서 김성근 감독을 따라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공백의 1일'로 드래프트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던 인물. 이후 짧지만 강렬한 전성기를 맞으며 에이스로 군림했다.[6]
2016년 기준 일본 프로야구 최후의 퍼펙트 게임 투수. 사이토, 마키하라, 쿠와타는 거인의 세 기둥으로 불렸다.
'헤이세이의 대 에이스'. 80년대 말-90년대 후반의 사이드암 에이스.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함께 'KK 콤비'를 이 뤄 고교 야구를 제압한 스타. 요미우리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대형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부상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심판에게 위협구를 던진 카리브의 괴물.
세이부 라이온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우승청부사. 요미우리에서도 두 번 일본시리즈 정상에 서고 통산 200승 고지도 밟는다.
KIA 타이거즈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뒤 요미우리에 입성해서도 프론트라인 선발로 제 몫을 다했다.
2011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우승에 공헌한 뒤 2012년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그러나 2년 후 재계약을 포기하고 KIA 타이거즈로 적을 옮긴다.

2.2 포수

V9 시대를 이끌었던 명포수. 감독으로서도 세이부의 80년대 황금기를 이끌었다.

2.3 내야수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의 명2루수. 감독으로서는 킨테츠 버팔로즈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하지만 긴테츠에선 감독으로 한 시즌 100패의 흑역사를 썼다.
붉은 배트의 '타격의 신'. 후에 요미우리 감독으로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V9를 견인함.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유격수이자 지략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첫 우승과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성기를 이끈 명 감독.
'미스터 베이스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상징이자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대의 스타.
통산 868홈런에 빛나는 전설의 홈런왕. 세계의 오.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
요미우리 45대 4번 타자 출신 프랜차이즈 스타. 2012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감독으로 취임했다.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톱 타자-2루수.
2002 - 2003, 2006 - 2015 요미우리 감독으로 유명하지만 선수시절에도 1980년대~19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번트 장인. 시노즈카 X 카와이 키스톤 콤비는 80~90년대를 주름잡았다.
일본프로야구 FA영입 1호. 최전성기는 아니었지만 많은 나이에도 여전히 4번타자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시노즈카가 은퇴한 뒤 90년대~2000년대 초 거인의 2루를 굳건히 지킨 호타준족의 선수.
고교시절부터 염원해왔던 거인에 입성해 여전히 야구계 최고의 스타로 활약했지만 잦은 부상, 파벌 조성, 수뇌부와의 불화, 말기의 부진과 마약 복용 등 곡절이 많았던 시절.
장타력을 갖춘 유격수였지만 유난히 도쿄돔을 살짝 넘어가는 홈런이 많다고 '돔런 아티스트'라는 특이한 별명이 있었던 선수. 상술한 불륜 소동으로 인해 니혼햄으로 쫒겨난다.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MVP 1루수로 활약하다 요미우리로 이적. 후에 LG 트윈스에서 페타신으로 불렸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프랜차이즈 스타. 요미우리 우타자로서는 최초로 40홈런을 치고 이적 선수로서는 최초로 요미우리 주장 자리를 차지하며 요미우리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항목 2번의 선수.
2006년 41홈런을 치며 활약했지만 그 이후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다. 요시 그란도시즌이 이 시기의 일.
에나츠 유타카에 이은 역대 2번째 일본프로야구 양대리그 MVP 수상자.

2.4 외야수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타격 3관왕.
V9 시대 거인의 테이블 세터.
V9 시대의 주전 외야수. 당대 최고의 수비수로 이름높았다. 외야수3루수 부문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는데, 3루수 골글은 외야수에서 컨버전 된 이후에 받았다(...). 보통 외야수비가 내야보다 난이도가 낮게 여겨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굉장히 특이한 이력. 최악의 3루수에서 준수한 좌익수가 된 라이언 브론과 정확히 반대 테크 은퇴 뒤에는 야구 지도자, 프로야구단 단장 등으로 활약중.
이쪽에서도 10번을 달았었다. 오 사다하루와 함께 'OH포'로 대활약.
1982, 1983년 2년 연속 도루왕. 퍼시픽 리그후쿠모토 유타카가 있다면 세리그에는 마츠모토가 있었다. "푸른 번개"(青い稲妻)라는 멋진 별명이 있었다.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자 가장 많은 인기를 받았던 선수. 만화 크로마티 고교의 크로마티는 여기에서 따왔다(...).
고질라.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거포에서 메이저리그에서도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강타자의 면모를 뽐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거인의 주전 좌익수였던 왼손 중거리 교타자.
55홈런을 친 적이 있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거포. 요미우리 시절은 안 좋은 추억. 거기에다 요미우리 시절에 가네다 마사이치가 가지고 있던 NPB 최다 퇴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3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가시와다 다카시 (재적 1990 - 1996, 1998 - 2005, 뉴욕 메츠)
이 듣보잡 선수가 의외로 구단 출신 최초의 메이저리거이다. 일본통을 자처한 바비 발렌타인뉴욕 메츠의 감독으로 있던 덕분에 메이저리그 출장 기회를 잡았고 중간계투로 나가서 승리도 올렸다.
좌완 중간계투로 그럭저럭 활약했으나 은퇴 후 마약사범으로 걸리면서 완폐아로 몰락했다.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각성제 복용에 관해서 언론에 증언하기도 했다.

4 영구결번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결번
134141634
오 사다하루나가시마 시게오쿠로사와 토시오사와무라 에이지카와카미 테츠하루가네다 마사이치


1. 오 사다하루: 설명이 필요 없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세계의 오' . 통산 868홈런(1위), 2170타점(1위)에 트리플 크라운 2회 달성에 빛나는 성적을 냈다. 다만, 감독으로서는 자이언츠에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거두지 못해 결국 사임. 그 뒤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감독으로서 레전드가 됐다. WBC 초대 우승을 이끌었다.

3. 나가시마 시게오: 역시 교진군의 전설이자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미스터 베이스볼', '미스터 자이언츠'의 별명을 가졌으며, 현재를 통틀어도 가장 인기있는 역대 선수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서도 자이언츠를 일본시리즈 2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다만 이건 2기 감독 시절의 일이었고 1기 감독 때는 전설의 V9 시기에 비하면 그닥 좋진 못한 성적을 기록했다.

4. 쿠로사와 토시오: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 나고야긴코, 츠바사군 등에서 활약하다 1944년 교진군에 이적하여 구단 최초로 4번을 달고 4번타자로 나서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33세의 다소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요절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사와무라 에이지와 함께 영구결번 처리했다.

14. 사와무라 에이지: 일본 프로야구 양대 리그 이전(일본 야구 연맹 시절) 시대의 최고의 투수. 어린 나이에 일본 구계를 호령하는 대투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27세 나이에 전장에서 산화했다. 이후 구단에서 그의 전설적인 활약을 기리고자 영구결번 처리를 했으며, 후에 그의 이름을 딴 사와무라상을 제정했다.

16. 카와카미 테츠하루: '타격의 신'으로 칭송받는 인물. 또한 교진군의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 즉 V9(1965~1973)을 이끌었던 명장이기도 하다.

34. 가네다 마사이치: 일본 프로야구 통산 400승(1위), 4490삼진(1위)를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 사실 고쿠테츠 스왈로즈에서 데뷔한 데다가 스왈로즈에서 더 오래 뛰었고 자이언츠에서는 5시즌(1965~1969)밖에 뛰지 않았고 성적도 돋보이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을 하기도 했고 일본 야구계에서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너무나도 커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5 준영구결번

8. 하라 다쓰노리: 하라가 은퇴한 이후 직접 니시 토시히사(仁志敏久)에게 넘겨줬고, 니시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한 뒤인 2008 시즌부터 2013년까지는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이적해온 다니 요시토모(谷佳知)가 달았다. 2014년에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FA 이적한 도루왕 출신 2루수 카타오카 야스유키가 달게 된다.

18. 에이스 번호: 구단 내에서는 준영구결번으로 처리하지 않지만, 교진군의 18번은 에이스에게만 돌아가는 번호라 워낙 유명하다. 요미우리의 에이스 번호는 양대 리그 출범 이후 후지타 모토지(藤田元司)-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스기우치 토시야로 이어진다.

6 임시결번

29, 41, 63 : 2015년 도박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후쿠다, 가사하라, 마츠모토의 등번호. 1년간 임시로 결번될 예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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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독직 취임 이후 등번호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가 많았지만 일단 현역시절 등번호를 계속 다는 것으로 낙착을 봤다. 선수를 은퇴하고 코칭스탭이 되면 높은 번호로 바꿔다는 게 일반적인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상당히 이례적.
  2. 오 사다하루가 나가시마의 뒤를 이을 감독이 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요미우리는 나가시마의 선수 은퇴 직후 V9을 이끈 가와카미 감독이 물러남과 동시에 지도자 경력이 없던 나가시마를 바로 그 자리에 앉혔다가 구단 사상 최초의 최하위(75년)을 기록한 흑역사가 있었다. 그 때문에 선수에서 은퇴한 오 사다하루를 지도자 경력 없이 바로 감독자리에 앉히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 사다하루가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기까지 시간 벌기용으로 앉힌 감독인데 그 동안 오 사다하루를 조감독 자리에 앉혀서 감독수업을 받게 했다. 이러한 형태는 나가시마가 두번째 임기 때 하라 타츠노리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나타났다.
  3. 이 일본시리즈가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덕아웃 시리즈이다. 상대는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같이 쓰던 닛폰햄 파이터즈 이다.
  4. 7차전까지 갔는데 역대 일본시리즈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승부 중에 하나였다.
  5. 이 일본시리즈가 그 유명한 기레기들의 찌라시 기사 한 방에 긴테쓰의 3연승 후 역스윕이라는 안습의 신화를 만들어낸 일본시리즈이다.
  6. 또 여담이지만 근육맨의 주인공 근육 스구루의 이름의 모티브이다.
  7. 디트로이트와 다저스 사이에 일본으로 귀국해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2년간 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