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마 섬 식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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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笠原事件(おがさわらじけん), 父島人肉食事事件(ちちしまじんにくしょくじじけん)

1 개요

1945년에 2월 경 오가사와라 제도의 지치지마에서 벌어진 사건. 일본 측에서는 사건 축소 및 왜곡을 위해 오가사와라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지치지마 섬 식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다. 술자리에서 술안주가 떨어지자 살아 있는 사람을 고의로 살해하고 그 시신을 '술안주로' 먹은 식인이다! 특히 문제는 이 사건을 저지른 다치바나 요시오의 휘하 부대는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던 상황도 아니었다는 거다! 오히려 임팔 작전무타구치 렌야 휘하의 일본군 식량사정이 훨씬 더 열악해서 지치지마를 왕족으로 볼 수준이었다.[1] 그럼에도 임팔 작전 당시의 지휘부는 최소한 식인을 명령하진 않았고, 어쩔수 없이 식인을 했던 부대들이 있긴 했지만, 이는 극도로 처참한 신세의 일부 부대들에 한정돼 있었다. 게다가 그 부대들마저도 이미 전사한 사체들만 먹었다.[2][3]

그래서 임팔 작전 당시 무타구치 렌야 휘하의 사단장이었던 사람은 이 사건의 주동자인 다치바나 요시오를 인정사정 없이 두들겨 패면서 "무타구치 렌야도 식인하라는 또라이짓은 명령 안 했다!"라고 일갈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도쿄 전범 재판에서 일본인 전범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라다비노드 팔 판사도 이 정신 나간 작자들의 행각에 혀를 내두르며 사형 선고를 주저없이 내렸을 정도였으니.

2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섬의 수비를 맡은 일본 육군 중장 다치바나 요시오 (立花芳夫)와 그 부하들이, 포로로 잡은 미군들을 구타한 뒤 죽여서 먹고, 대대원들에게도 인육을 배급한 사건.

2.1 원인

사실 전쟁 중에 고립된 부대가 식량이 부족해서 식인을 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소련군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는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일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따로 식인을 막기 위한 임시자경대를 만들어야 했고, 독일군 6군도 스탈린그라드에 갇혀서 보급이 안되자 시신을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문제는 소련군이나 독일군 같은 경우는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였고 식량부족이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거지만, 일본군은 지치지마에 있을 당시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도 아니었던데다가 살아 있는 사람도 죽여서 먹었다는 거다.

특히 일본군은 열대 섬이라는 특수환경[4]과 연합군이 보급선을 열심히 박살내버리는 작전의 이중 크리가 터지면서 결국 기아에 허덕이다 인육을 먹는 사례가 자주 있었다. 이 나무위키에 등재된 밀리환초 학살사건도 같은 맥락. 실제 뉴기니 전선에서 육군 제18군사령부는 1944년 12월에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며, 실제로 명령을 위반한 병사 4명을 처벌했던 것이 전후 도쿄전범재판 때 밝혀졌다.[5]

미군도 처음에는 식량 부족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나보다 생각했지만, 상술했듯 지치지마는 결코 식량 부족 때문에 식인을 한 것이 아니였다. 당시 지치지마의 식량상황은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대충 소주2병 쌀로 채운것정도된다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이정도만 되도 식인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다)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추가 조사 결과 식인의 동기는 어처구니 없게도 식인을 통해 수비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벌이 엄청나게 셌던 것도 실은 이 때문이다. 그 악명 높은 일빠 라다비노드 팔 판사도 도저히 정상 참작을 해줄 수가 없어서 기겁하고 사형을 선고했을 지경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기진작을 한답시고 한 행동이 고위장교 몇명이서 인육에 술파티를 벌인것이 고작(?)이다.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결국 식인 사건의 동기는 사기진작을 위한 소영웅주의나 엽기적인 호기심, 그리고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의 군사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식인종들을 재판한 괌에서의 재판 경과와 증언들을 보면 특별한 술안주가 먹고 싶어서라는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증언들은 괌에서 열린 이 식인종들에 대한 군사 재판을 참고하자.

2.2 내용

지치지마 섬(父島)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1000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한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섬이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섬인 지치지마(父島)는 이오지마(硫黃島) 북쪽 200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지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섬이였다. 당시 지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모리 구니조(森國造) 소장 휘하에 지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를 위해 병력을 투입하던 미군으로서는 공격로 주위의 다른 섬으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치지마였고, 그를 위해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진행했다.

이때 제 51 뇌격[6]의 일원 중 한 명으로 비행기를 타고 출격한 부시 중위의 애기 ‘바바라’는 8천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도중에 일본군의 대공포에 정통으로 맞아 버렸고 그 충격으로 비행기는 추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부시는 간신히 낙하산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구명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던 일본군은 함정 두 척을 파견해서 그를 생포하기 위해서 쫓아왔지만 미군 비행기들이 일본군 함정이 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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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되는 부시

부시는 그렇게 2-3시간 정도 지치지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지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 미군 가토급 잠수함 USS Finback에게 구조되었다.[7] 다른 미군기 몇몇도 대공포에 격추되어 탑승 인원 여럿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다른 인원들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전쟁 포로로 일본으로 보내진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형되었다.[8]

1945년 3월 이오지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본영은 지치지마의 다치바나 장군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장에 임명했다. 해군도 모리 제독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최고 지휘관이 된 두 장교미군 포로 학대와 처형, 그리고 식인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을 직접 지휘했다. 그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오 육군소좌와 요시이 시즈오 해군대좌가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사실 한두 명의 정신이상자가 포로를 학대하거나 즉결 처형하는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서 흔한 일이었다. 들의 처우가 열악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군은 병영 악폐습, 가혹행위, 구타가 참전군 군대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미친 군대에서 정신이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정신 검증이 되지 않은 인원을 마구잡이로 뽑아왔던 데다, 군부 내에서도 명령권자들이 난징 대학살처럼 점령지의 국민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해 대량 학살을 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이 관여해 직접 포로를 구타, 학대, 고문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지치지마를 제외하고는 달리 예가 없었다.[9]

1947년 1월 13일 도쿄재판에서 로빈슨 검사가 일본군의 전시 만행을 밝히기 위해 제출한 마토바의 진술서에는 식인 만행이 시작된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인육 사건은 1945년 2월 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가서 다치바나 장군에게 미군 비행사는 스에요시 부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는 부건빌이나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으로 옮겨졌으며,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가토 다케무네 대좌가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육류와 술을 준비할 무슨 방도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장군은 내게 미군의 처형에 대해 물으면서 인육을 얻을 수 없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육과 술 1되를 준비 시켰습니다. 인육은 가토 대좌의 방에서 요리 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맛 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인육이 맛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치바나의 명령에 따라 마토바가 처형한 미군 포로의 처리에 대해 구두 명령이 내려졌다.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 해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칸무리(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테라키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

1945년 3월 9일 오전 9시 대대장 육군 소좌 마토바 스에오

발령 방법 : 칸무리 중위와 테라키 군의관을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2.3 처벌

일본의 패전 후 1945년 9월 2일 치치시마에 미군이 상륙해서, 9월 3일 다치바나 장군과 모리 제독이 대표로 미 해군 함정에서 정식으로 항복했다. 항복 교섭에서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 해군 조종사가 몇 명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했는데,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고 둘러댔다. 이미 일본군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밀하게 입을 맞추어 두었고,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함구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지치지마의 일본군의 본토 귀환도 순조롭게 이뤄져 타치바나 등은 안도했지만, 그동안 미군은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1946년 2월 들어 본격적으로 이 식인종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그 어떤 정상 참작의 여지도 없음이 명백한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 외 4명에게 전쟁 범죄살인 혐의를 적용, 사형에 처했으며, 지치지마 섬에 주둔한 해군 최선임 자였던 모리 구니조 제독을 포함한 다수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10]

그리고 이들은 사형이 집행당하는 그날까지 두들겨 맞아서 유언도 못 남긴 채 교수형을 당했고 종신형을 받은 모리 쿠니조 역시 전후 부하에게 학살죄를 뒤집어 씌운 대가로 총살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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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중에 cannabilism이라고 오타났다

미군 신문인 <괌 뉴스>는 연일 '카니발리즘[11]'이라는 큰 제목으로 재판 경과를 보도했으며, 일부는 미국 본토 신문에도 전재됐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졌는데 희생된 미군의 어머니들이 "명예롭게 전사한 줄만 알았던 우리 아들이 저런 끔찍한 야수들의 손에 살해되어서 먹혔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 스럽습니다!! 우리 아들을 명예롭게 기억 하도록 제발 기사가 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라며 탄원을 내서 군 상부에서 보도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3 관련자들

3.1 피해자들

총 8명

  • 로이드 월호프 (1944.7.4 포로 / 1944.8.7 피살)
  • 신원 미상의 통신병 1명 (1944.7.4 포로 / 1944.8.7 피살)
  • 제임스 다이 (1945.2.18 포로 / 1945.2.24 피살)
  • 글랜 프레이저 (1945.2.18 포로 / 1945.2.18 피살)
  • 플로이드 홀 (1945.2.18 포로 / 1945.3.9 피살)
  • 마비 머숀 (1945.2.18 포로 / 1945.2.22 피살)
  • 그레이디 요크 (1945.2.18 포로 / 1945.2.28 피살)
  • 워렌 본 (1945.2.23 포로 / 1945.3.22 피살)

기타(생존자)

  •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해군 중위 - 조종사. 우리가 아는 미국 41대 대통령이자, 걸프 전쟁을 주도한 그 사람이 맞다. 8명의 희생자들은 그의 전우들이었으며, 미 해군 잠수함에게 구조 받지 못했다면 그도 잡혀 먹힐 뻔했다. 이런 악연 때문인지 사석에선 일본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다고 한다. 이후 시간이 흘러 히로히토가 사망하고 나서야 일본 정부에 '이제야 일본을 용서해줄 마음이 생겼다'라고 말했다.[12]
  • 오스카 도일 - 1944.6.15 포로로 잡혀 전쟁 포로로서 일본 본토로 이송되었고, 전후 해방되었다. 본격적인 처형이 8월 이후부터 시작됐던 걸 보면 조금만 늦게 포로로 잡혔으면 이 사람도 죽었을 듯.

3.2 범죄자

  • 타치바나 요시오 - 이 모든 사건을 주도한 주범. 사형.
  • 마토바 스에오(的場末男) - 지치지마 식인 사건 당시 다치바나 요시오의 전속부관으로, 이 사건의 행동대장이다. 사형.
  • 요시이 시즈오 - 일본 해군 대좌. 지치지마 식인 사건 당시 식인을 주도했던 인간으로, 해군선옥론을 반박할 때 이 인간 이름이 매우 자주 나온다. 사형.
  • 이토 키쿠지 - 중좌. 로이드 월호프와 신원미상의 통신병 한 명을 총검으로 찔러죽이도록 지시했다. 사형.
  • 나카지마 노보루 - 포로에 대한 학대와 폭행을 주도했다. 포로 중 두 명은 이 구타가 원인이 되어 앓다 죽었다. 사형. "포로가 되면 역적으로 취급하는 일본의 국가적 풍토가 결국 외국인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로 발전한 것입니다. 포로 학대는 일본 민족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잘못 아닙니까. 나는 국가를 증오하면서 죽어갑니다"라고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 유언을 남겼다.[13]
  • 모리 쿠니조(森 国造) - 지치지마 식인 사건을 다치바나 요시오와 함께 주도하였다. 지치지마 사건으로는 종신형을 받았으나 전후 부하에게 학살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 드러나 총살당했다.[14]

그 외 하야시 미노루[15], 이소가이 군지, 키도 마츠타로, 마스타니 신이치, 마츠시타 카네히사, 모리 야스마스, 사사키 미츠요시, 가토 타케무네 등이 포로 살해의 지시 및 직접적인 포로의 처형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3.3 그 외

  • 츠치야 코우켄 - 일본 육군 소위, 전 일본변호사회 회장 그리고 위안부 수요집회의 창시자. 지치지마섬 식인 사건 당시 검도 2단이라는 이유로 워렌 본을 참수시키도록 명령받았지만, 학도병 출신 중 검도 4단이 있다는 걸 알고 역할을 떠넘겼다.[16] 그러나 인육은 끝까지 먹지 않았는데 육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거짓말로 속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일이 엄청나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육지에서 나는 고기는 입도 대질 않았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신이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 호리에 요시타카 - 본인[17]에 따르면 치치시마 식인사건 때 미군 포로인 워렌 중위를 몰래 도망치게 해주려고 한 소령은 6개월 동안 구타를 당했고 강제로 인육을 먹어야만 했고 평생 PTSD에 시달려야만 했다고 한다. 실제로 재판에서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다만 그가 주장하는 바만큼 완전히 무죄는 아닐 거라는 의심은 있었지만 조사 위원회의 위원들은 영어가 유창한 그에게 책임자인 렉시 대령을 포함해 많은 인원이 호감을 가졌으며, 이런 부분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18]

3.4 그 외

전쟁 범죄에는 가담했지만 그나마 죄가 약한 사람들 목록이다.

  • 하야시 미노루 - 소위. 제임스 다이 비행사를 참수했다. 처음에는 참수를 거부했으나 요시이 시즈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고[19] 처형을 강요하자, 어쩔 수 없이 참수를 실행했다. 힘이 부족해서인지 완전히 목을 베어내지 못해 마스타니 신이치 소위가 마저 참수했다. 위원회에서도 이런 점이 인정되어 포로 살해로 기소되기는 했지만 죄상에 비해서는 비교적 가벼운 9년형을 선고받았다.
  • 테라키 타다시 - 군의관. 다치바나 요시오의 명령으로 시체에서 살을 발라내고 간을 적출했다. 체포 명령이 나왔을 때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아내와 공모해 아내에게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잠적했으나, 실제로는 숨어서 마에다 타다시라는 가명으로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다가 미군이 아내가 보내는 우편의 발송지를 추적해 체포했다. 4년형을 선고 받았고, 2년 4개월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4 평가

4.1 미국

당연히 미국 국민들은 이 사건을 결코 잊지 못하고 지치지마 사건이라고 부르며 일본군의 만행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4.2 일본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건지 그냥 단순하게 '오가사와라 사건'이라고만 부른다.

일본 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외부 링크의 글을 보면 더 확실해지는데, 위키 내에서도 최소 2명 이상을 먹은것으로 기록해 놓았음에도 정황증언이 있는 츠치야 코우켄씨의 증언만을 들면서 스리슬쩍 물타기를 하고 있다.
츠치야씨의 증언에선, 워렌 본 중위의 사형 당일날 일직장교였는데 저녁쯤에 병사 두명이 본 중위의 시체를 먹으려 하는걸 제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즉, 본 중위를 먹은건 지휘관들이 아니라 배고픔을 못이긴 병사 두명 뿐이었고 그마저도 제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왜 워렌 본의 이야기를 들먹이는지는 위 항목에 나온 괌 군사재판에서 제시된 명령문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본 위키내에 등재된 내용으론 1번 항목에 "대대는 처형된 미 해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것"으로 되어있지만 일본위키에선 "미군비행사 본 중위의 인육을 먹을 것"이라고 씌여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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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항목을 대조해 보면 알겠지만 저 명령문은 3월 9일자이기(일본 위키에도 3월 9일자로 되어있다)에 이 명령에 해당되는 인물은 같은날 처형된 플로이드 홀, 아니면 2월 28일 처형된 그레이디 요크의 시신에 대한 명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전 증언을 보면 2월 22일~2월 25일 사이에 인육 사건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때의 희생자는 기간중에 살해된 마빈 머숀이나 제임스 다이로 봐야 할텐데도 난데없이 명령문이 내려온 당시에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일단 대대장 명령을 2주 후에나 집행하는 패기있는 일본군이 있었는지는 넘어가고 13일이나 지난 후에 피살된 워렌 본을 들먹이며, 그 워렌 본은 실은 먹히진 않았다라는 츠치야 코우겐의 증언을 개재하는 것은 식인의 대상이 되었다는 본 중위는 실제론 안먹혔는데 미군이 누명을 씌운거다"라고 주장하는 셈.
외부링크로 등록된 "치치시마섬 진상의 일단" 이란 글에서 이를 나름대로 자세하게 서술하며 "승전국이 자국에서 벌인 재판인 만큼, 반드시 공정한 처벌이 내려졌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라며 은근슬쩍 누명을 썼다라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저 글들을 종합해 봐도 피살된 8명의 조종사 중 워렌 본 중위는 식인의 대상이 아니었을 가능성은 있어도, 식인사건 자체를 날조라고 할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주범인 천하의 개쌍놈이자 인간 쓰레기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은 에히메 현의 에히메 대학 바로 옆에 있는 호국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신다. 이 작자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모셔져 있으며, 수많은 일본인들이 참배하고 있다. 이쯤 되면 답이 없다.

일본 넷 우익들은 이들이 처형당했다고 표기하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니, 법무사(法務死)라는 용어를 아예 새로 만들어서, 이들의 사인은 사형이 아니라 법무사라는 괴상한 어법을 쓴다. 한 마디로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뜻. 포로살해식인일본에선 죄가 아니다 사법살인이란 이미 있는 말 대신 법무사라는 (일본어로도) 법조인 직종 이름이랑 발음이 동일한 신조어를 만드는 저의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일단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해당 문서에만 안 썼을 뿐이지 이 법무사라는 단어는 등록되어 있다.

그나마 사가와 잇세이는 정신질환자로 취급받아 풀려났고, 지금 봐도 책임 능력과 별도로 정상인이 아니라는 점은 한눈에 알 수 있지만, 타치바나는 누가 봐도 명백한 100% 정상인이었다. 진짜 정신병자라면 정신병자니까 사람 고기를 먹었겠지만? 미군도 정신병원에 넣었지 사형시키지는 않았다.

5 기타

  • 지치지마 사건을 자세하게 다룬 서적으로는 아버지의 깃발로 유명한 제임스 브래들리가 지은 플라이보이스[20]와 체스터 헌이 지은 Sorties into Hell: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 가 있다. 플라이보이스는 국내에도 번역판이 발간되었지만, 후자는 영문판만 있다.

6 관련 링크

  1. 그 때문에 싱가포르 재판에 송치되었을때, 싱가폴 학살 씹은 적과 이런 행적들을 감안해서 징역 2년만 받았다.
  2. 이런 극한 상황에서의 어쩔 수 없는 식인 행위는 전쟁 상황에서만이 아닌 대기근 같은 상황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편이라 이런 상황 하의 식인은 생존을 위한 최후행동으로 보며 이런 걸로는 처벌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인상식(人相食)이란 말이 그것. 이런 형태의 식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식인 문서를 참고할 것.
  3. 오히려 31사단 같은 경우에는 전진할 때 주민들을 약탈하지 않고 교섭을 통해 정당한 방법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물자를 입수했었다. 그렇게 식량난으로 허덕였는데도!!
  4. 열대우림은 결코 채집이나 둔전을 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그래서 녹색 사막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런 척박한 기후의 작은 섬에 2만명이 넘는 병력이 주둔한 적도 있으니......
  5. 1946년 12월 11일.
  6. VT-51
  7. 출혈과 구토 증세로 정신을 잃어가며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만약 잠수함이 부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현재 미국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아래 '생존자들' 문단 참조.
  8. 포로로 잡힌 9명 중 8명이 살해당했고, 그 중 식인의 피해자는 5명이다. 일부 포로는 이때가 아닌 1944년에 잡혔다.
  9. 차라리 밀리환초 학살사건은 식량이 부족했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식인을 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학살 사건은 상대적으로 흔했다.
  10. 이 당시 참모장은 부모님이 몸이 안 좋아서 특별 휴가를 받고 고향에 있었다. 나중에 전범재판에 이 내용을 듣고 "세상에... 내가 이런 쓰레기 들과 같이 복무했다니..."라고 경악했다.
  11. cannibalism·식인풍습
  12. 그래도 의외로 일본을 한국과 함께 미국의 비 NATO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당시 1980년대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해야 할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니 사적으로는 어쩄든 대통령으로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일본이 미워 죽어도 어쩔 수 없이 일본과 협력하는 상황인 셈.
  13. 그런데 일본군의 포로 대우 사정을 보면 나카지마 노보루의 이 말은 사실에 가깝다는 게 함정이다. 당장 일본군에 의해 벌어진 연합군 포로들의 죽음의 행진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은 아군이 연합군의 포로가 됐을 경우 명부에서 이름을 빼버리기까지 했다. 당장 진주만 공습 문서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일부 파일럿들에 대한 기록을 보자.
  14. 지치지마 건과는 관계 없는 남방작전 당시 네덜란드 포로를 대상으로 했던 전범 행위였다.
  15. 얘는 그나마 참작의 여지가 있다. 아래쪽 참조.
  16. 어찌 보면 좀 비겁한 일이긴 하다. 포로를 처형한 그 신참 학도병은 당연히 전범 혐의로 기소되어 형을 살았다. 하지만 전범혐의가 두려워서 넘긴게 아니라 그냥 이건 사람이 할짓이 아니라서 넘긴것이다. 그리고 보자면 미쳐돌아가는 이 부대에서 반대를 했다는 이유로 심각한 구타와 처벌을 받기에 이분 입장도 힘들었을 것이다.
  17. 본인의 자서전인 '출격 이오지마'.
  18. 지치지마 사건을 다룬 서적인 'Sorties Into Hell: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
  19. "모욕을 줬다" 라고 5글자로 넘길 만한 사항도 아닌 게, 그 당시 일본군을 생각해보자. 과연 구타가 없었을까? 당장 위의 호리에 요시타카만 해도 워렌 중위를 보호하다가 열두 마리의 인두껍을 뒤집어 쓴 짐승들에게 종전까지 얻어맞고 살아야 했다.
  20. Flyboys: A True Story of Cour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