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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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정남규(鄭南奎)
출생1969년 3월 1일
출생지전라북도 장수군
신체168cm, 63kg, O형
사망2009년 11월 22일
범죄유형연쇄살인
가족7남매 중 장남(둘째)

전문 프로파일러들조차도 두려워했을 정도로 국내 최악 쾌락 살인범 [1].

어떻게든 중벌을 피하고 싶어 동정론에 호소하고 최대한 사실을 숨기려 들며 증거를 들이대도 일단 아니라고 우기고 보다가 견디지 못하면 그제서야 자백하는 일반적인 절대다수 범죄자들과 달리 시키지도 않은 자백을 알아서 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없이 전부 늘어놓는 등 사형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쇄살인범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링크.

1 소개

정남규는 2004년 1월 14일부터 2006년 4월 22일까지 서울 경기지역에서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힌 연쇄살인자이다. 14명을 살해하고 19명에게 중상을 입힌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봉천동 세자매 피습 사건에서 세자매 중에서 두 명은 사망하고 한 명은 사망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건 초기의 언론 보도에서 마지막 한명은 제외시켜 추가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 실제로는 중상으로 얼마 후 사망하였고, 정남규 기소 시에도 살인 혐의에 포함되어 최종 확인된 피살자가 13명이다.

유영철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며 유영철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서울 이문동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졌다. 그 후 보강 조사에 의하여 범행의 대부분이 밝혀졌으며 흉악성으로는 KCSI 요원 사이에서 역대 최악으로 평가되었다.[2]하지만 2016년 현재에는 왠지 많이 잊혀진 상태이다. 아무래도 다른 흉악범들은 사형 판결을 받은뒤로도 구치소에 수감되어 살아있지만 이 놈은 지옥으로 진작에 귀향을 했으니 그런 듯 하다.

2 생애

1969년 3월 1일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3남 4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남규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끊이지 않는 폭행과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추행과 강간 성희롱을 당한 일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친구선배들에게 집단따돌림과 학교 폭력을 겪었다. 복무 시절에도 고참들에게 가혹행위와 심한 구타를 겪음으로 인해 군 전역후 사회생활을 힘들어하며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범죄에 에 빠지게 되었다.

20대 시절에는 인천에서 70대 어머니, 누나와 3명이서 함께 살았지만 가족 중 직장을 가진 이가 없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머니 명의의 낡은 주택에 딸린 방을 세놓고 받는 월세 55만 원이 수입의 전부였다.
하지만 생활환경이 안 좋다고 모두 살인자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사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살인마들 중에서는 강호순을 제외하고는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범죄자들 중 다수의 생활환경이 나빴다는 이유만으로 환경과 범죄를 직접적으로 연결짓는 것은 곤란하다. 생활 환경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다 범죄의 길로 빠지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범죄자들의 범죄를 정당화 시키거나 동정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3 범행 일지


* 2004년 1월 14일 부천시 원미구에 살던 윤모군(13세)과 임모군(12세)를 성추행 후 살해했다. 시신은 실종 16일 만인 1월 30일, 아이들의 집에서 3km 떨어진 춘덕산 정상 부근에서 옷이 대부분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질뻔 했으나[3] 정남규가 체포된후 그의 자백으로 범행사실이 드러났다.

* 2004년 1월 30일, 새벽 3시경 구로구 구로동의 한 빌라에서 원모씨(44세)를 수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다.

* 2004년 2월 6일,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골목길을 지나던 전모씨(24세)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 2004년 2월 10일, 새벽시간대에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서 우유 배달부였던 손모씨(28세, 여)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 2004년 2월 13일 오전 6시경 영등포구 신길5동 골목길에서 서모씨(30세, 여)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다.

* 2004년 2월 25일 오전 1시경 다세대 주택에서 홍모씨(33세, 여)를 흉기로 마구 찔러 중상을 입혔다.

* 2004년 2월 26일 신림동에서 여고생이 할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중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온 괴한에게 칼로 10여차례 찔려 중상을 입었다.

* 2004년 4월 8일 신길동 귀가중이던 피해자 정모씨(여 25세) 살인미수.

* 2004년 4월 22일 서울 구로구 고척동에서 여대생을 집 앞에서 흉기로 무참히 찔러 살해.

* 2004년 5월 9일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에서 귀가중이던 여대생을 흉기로 10여 차례 찔러 살해.

* 2005년 4월 18일 서울 금천구 시흥3동 모 빌라에서 잠자고 있던 모자를 둔기로 내려쳐 중상을 입힘.

* 2005년 5월 30일, 새벽시간대에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서 우유 배달부 김모씨(41세, 여)를 흉기로 찔러 살해.

* 2005년 6월 4일, 새벽 2시 55분쯤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의 한 주택에 침입해 김모씨(36세, 여)를 둔기로 내려쳐 중상을 입혔다.

* 2005년 10월 9일 장애인 주거 시설에 침입해 그곳에서 자고 있던 홍모씨(39세, 여) 등 2명을 둔기로 내려쳐 중상을 입힘.

* 2005년 10월 19일 봉천10동 주택에서 변모씨(26세, 여)를 둔기로 내려쳐 살해 후 방화 해 1명을 중상을 입혔다.

* 2006년 1월 18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송모씨(48살)의 집에 침입해 송모양(22세)의 머리를 둔기로 내려친 후 집에 불을 내 둘째(18세, 여), 막내(14살, 남)등 모두 3명을 살해했다.

* 2006년 3월 27일 봉천 8동 2층 단독 주택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던 김모씨(25세, 여)등 세 자매를 둔기로 마구 내려쳐 2명을 살해하고 1명을 중상 입혔다.

* 2006년 4월 22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주택 절도 후 자고 있던 김모씨(24세, 남)를 둔기로 내려쳐 상해를 입히고 격투 끝에 붙잡혔다.

몇몇 범죄를 제외하고는(용답동, 이문동, 수유리) 사건 장소의 거의 대부분이 서울 서부지역(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봉천동, 광명시, 영등포구) 일대임을 알 수 있다.

4 검거

정남규의 검거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2006년 4월 22일 새벽, 신길동의 어느 다세대 주택에 침입하여 자고있던 20대 청년을 둔기로 살해하려 하였으나 피해자가 극렬히 저항하고 옆방에서 자고 있던 청년의 아버지까지 합세하여 격투 끝에 정남규는 붙잡히고 경찰에 인계된다. 그러나 정남규는 경찰서로 이송하기 직전에 순찰차 뒷자리에서 수갑을 찬 채로 그대로 달아나버렸고 2시간 만에 동네 주민의 신고로 옥상에서 다시 검거된다.

5 특징

체포 후 심문 과정에서 범행 후 만족감을 느꼈다거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발언을 하여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현장 검증 당시 분노한 시민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달려들려고 하자 피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다른 범죄자들과는 다르게 시민들을 노려보고 맞서 달려드려 했으며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연행차량 안에 탔을 때는 카메라를 향해 씨익 웃기까지 하며 지켜보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둘 다 살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비슷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기인한 가진 자에 대한 분노나 이혼으로 인한 여성에 대한 혐오감에 의해 철저하게 목적형 범행을 저지른 반면 정남규의 경우 처음부터 철저히 쾌락만을 위한 전형적인 쾌락살인범이라는 점이 전혀 다르다. 유영철은 주로 둔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으며 별다른 성적인 행위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살해 의지를 드러내기 전 합의 하에 한 반면 정남규는 날카로운 흉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으며 성폭행방화를 함께 저질렀는데 이러한 "찌르는" 행위, 성폭행, 방화 등의 행동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성적인 동기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분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 "사람을 더 죽이지 못해 우울하고 답답하다. 빨리 사형을 집행해 달라" 는 발언을 하는 등 전형적인 쾌락살인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범행을 자백할 당시 "강남구 등 부유층이 사는 동네엔 CCTV가 너무 많아서 CCTV가 없는 곳에서 했다" 는 말을 하였다. "실제로 그는 살인을 더 쉽게 하기 위하여 주로 방범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서민층 및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범행 대상으로 잡았으며" 침입 방법도 문을 따거나 창문 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문을 열어놓고 있는 집을 대상으로 범행하는 등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는 살인 자체를 쾌락으로 여겨서 좀 더 쉽게 많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장소를 택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이런 자신만의 쾌락을 위해서 범죄를 준비하는데 있어 상상 이상의 힘을 쏟았다. CCTV에 잡히지 않기 위해 지하철 몇 정거장 정도의 장거리를 도보로 이동하였는데 이를 위해 평소 마라톤 등의 달리기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신의 방에 있을 때는 건강정보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청하며 자신의 식단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등 '살인을 쉽게 하기 위해' 훈련 등의 장기적 계획까지 짰다. 거기에 범죄를 준비하기 위해서 체력만 단련한 게 아니라 공부(?)도 매우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수색된 그의 집에서 과학수사 관련 잡지만 수십 권이 발견되고 체포당하기 직전까지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를 한 편도 빼놓지 않고 계속 시청했다.

또한 자신의 범죄를 전하는 기사를 스크랩하며 수사상황을 학습하고 있었다. 나중에 수색된 그의 집에서는 수사진은 물론 담당 프로파일러의 얼굴을 찍은 월간지 스크랩까지 발견되어 수사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한다. 게다가 완전범죄에 최대한 가까운 노력을 했는데 모든 신발에는 밑창을 도려내서 족적이 나오지 않게 했고 피해자를 신속하고 확실하게 살해하기 위한 흉기를 사용하는가 하면 지문이 쉽게 발견되지 않으면서도 미끄럽지 않은 장갑 을 착용했다. 여기에 수법도 주기적으로 바꿨고 더욱이 비슷한 시기 정남규만큼은 아니라도 피살자가 두세 명으로 적되 수법이 비슷한 살인자들이 여럿 잡혔다.[4] 그래서 그 오랜 기간 동안 잡히지 않고 살인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문동 살인 등 일부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었다가 정남규가 알아서 자백하는 바람에[5] 진상이 밝혀지기도 했다.

6 범행동기?

그가 밝힌 동기 중에 어린 시절 성학대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실제 첫 번째 범행으로 알려져 있는 부천 초등학생 피살 사건에서는 당시 10살과 11살 남자아이 두명을 납치하여 자신이 당했다고 진술한 방법과 동일한 수법으로 성추행한 뒤 살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정남규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일 수도 있으나 동정심을 받아서 감형을 받기 위하여[6] 자신의 첫 번째 범행에서 모티브를 얻어 꾸며낸 자작극이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7] 오히려 자신의 지배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소아성애자들이나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대항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살인, 성범죄, 잔혹행위 등의 각종 범행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저지른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8] 게다가 이후 범행은 거의가 힘 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였다.[9]

더불어 이러한 증언의 조작이나 편집은 감형의 구조를 알건 모르건 누구라도 한번쯤 시도하는 방법이며 적게는 정상참작, 많게는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형 내지는 형의 면제를 받기 위한 수법이다. 일단 책임능력이 부정된다면 판사로서는 중형을 선고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 때문에 심문 과정에서 이러한 증언의 모순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된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도 그의 피해자는 저소득층 및 여성으로 전원 사회의 약자들이고 그 목적이 엄연히 쾌락에 의한 연쇄살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더 죽이지 못해 억울하다"[10]는 주장을 하는 등 자신의 살해 동기를 조작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더욱 주장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 마디로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해야 먹혀든다는 것. 실제로 판사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동기라고 판단, "반성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는 논조로 판결을 내리고 있다.

7 사망

2007년 4월 대법원까지 가는 재판 끝에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담배를 끊어도 살인은 못 끊겠다" 라는 말을 남겼으며 2009년 11월 21일, 감방에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여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다음 날 새벽지옥으로 도피했다.[11] 향년 41세. 유언은 남기지 않았으나 최근의 사형 여론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한 것으로 볼 때 사형 집행에 대한 두려움[12]으로 자살을 결심한 게 아닌가 추정된다고... 물론 진실은 정남규 본인만이 알 것이다.

8 관련 문서

  1.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박형민 부연구위원도 정남규와 면담할 때 가장 섬뜩했다고 한다. 수많은 살인자들과 면담했던 전문가가 그 중 제일이라고 했으니 대체...
  2. 오죽했으면 그것이 알고싶다 "사이코 패스-그들은 누구인가" 에서는 정남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까지 했다. # 하지만 정남규는 쾌락살인자로서 사이코패스와는 다르다. '흉악한놈=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워낙 사이코패스 담론이 대중심리학적으로 많이 남용되는데다가 전문가들도 별 자정노력이 없으니... 그리고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가면 위험해진다. 오히려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면 형법적 처벌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될 터이고
  3. 실제로 경찰은 살해용의자로 박모군(14세)을 수사선상에 올리고 조사를 했는데 무리한 수사 아니냐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부천 초등생 살해용의 중학생 석방 경찰 무리한 수사 논란.
  4. 이들은 대부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일부는 사형수로 수감 중이다.
  5.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수사관들도 정남규가 알아서 자백하니 어이가 없었는지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유영철이 자기가 저지른 짓을 허위 자백했기에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결국 경찰은 정남규를 데리고 이문동 살인사건의 현장에서 다시 현장검증을 하여 범인임을 확인해야 했으며 당연한 이야기지만 엄청나게 까였다.
  6. 실제로 재판할 때 수많은 피고들은 동정을 받으려 한다고 한다.
  7. 하지만 정남규가 처벌 수위가 올라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문동 사건 등 굳이 묻지도 않은 사건까지 알아서 자백하거나 재판정에서 자기는 살인 중독자니 하루라도 빨리 사형시켜야 한다고 대놓고 말한 점 등을 보면 꼭 자작극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동정 받을 생각이면 이런 짓을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
  8. 부천 초등생 살인사건의 경우, 실제 보도된 것은 아이들이 살해되어 발견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현장을 발견한 형사들은 현장의 잔혹성과 참혹성에 경악했다고 한다. 형사들조차 참혹한 현장에 충격을 먹었으며 당시 사회 불안을 우려해 자세한 언론보도를 통제했다고... 실제 현장을 목격한 수사관이 오프 더 레코드로 밝힌 이야기다.
  9. 다만 정남규가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며 살아온 것 자체는 사실임을 고려한다면(학창시절에 왕따를 당했고 군대에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사회적 핍박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10. 어이 없게도 이 대사 하나 때문에 단기적으로나마 다음이나 네이버 등에는 이 살인마의 팬 카페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11. 당연히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 하는 사람은 없었고 빈소에도 그의 누나 외에는 오지 않았다. # 자업자득.
  12. 실제로 법무부는 2007년에 유영철, 정남규, 정성현 세 명의 사형 집행을 추진했다가 청와대의 반대로 단념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