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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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角弓. Horn bow.

나무와 뿔을 합성한, 합성궁(composite bow)종류에 속하는 .

몽골, 훈족, 고구려 등 북방 기마민족에서 유래한 활로 222년(산상왕 26) 고구려 산상왕나라 손권에게 황제 즉위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각궁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제식무기 혹은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료는 국가마다 크게 다르지 않고 뿔과 힘줄, 나무를 사용한다.[1][2] 위로 늘려지는 부분인 활의 바깥쪽에는 잡아당겨주는 성질이 강한 힘줄(심)을 놓고, 활의 안쪽에는 튀어 나가려는 성질이 강한 뿔(각)을 놓는다. 재료를 합성하는 것은 약점이 있는 재료를 상호 보완해주는 효과로 작용하기에 효율성과 사거리가 실로 엄청나게 증대된다. 일반 목궁을 쓰던 시절에는 첨단 무기인 셈이다.[3]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면 각궁류는 일반적으로 드로우 렝스(Draw length)가 길다.이는 더 긴 구간동안 시위가 화살을 밀며 가속해줄수 있다는 뜻이며, 초구속도가 일반 목궁보다 빨라지는 결과로 나타난다. 필연적으로 목궁용 화살에 비해 화살의 길이가 길어질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을 도구를 통해 짧게 줄여 시속을 극단적으로 높인 것이 애기살. 반면 영국의 장궁이나 왜궁은 이 드로우렝스를 확보하기 위해 굉장히 길어지는 방식을 택했고[4], 특히 장궁은 위력을 올리기 위해 파운드수가 각궁에 비해 무지막지하게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현대의 총기에 비유하자면, 각궁은 탄약의 장약량은 고만고만한데 비해(파운드수) 총열이 길어(드로우렝스) 더 긴 시간동안 가속하여 탄속을 올리는 것이다. 물론 양손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멀어(활에 따라서는 당기는 손 어깨너머까지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정확히 조준하는데 애로사항이 있고, 기후에 따라 완전히 못 쓸 물건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5] 그 장단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2 한국의 각궁

대 환수용 지나가던 선비 최종병기
조선시대의 일반 습사용 각궁은 물소뿔, 산뽕나무, 대나무, 참나무(대림), 벚나무껍질(화피단장), 소의 힘줄, 민어부레풀 총 7재로 제작하며, 전투에 사용되었던 전시용 각궁은 대나무를 뺀 6재를 쓰며 옻칠을 하고 매우 두텁게 만들어 내구성과 장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전통 군사용 국궁의 제작기술은 모조리 실전되었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습사용 각궁이다.

그 외에 사슴뿔을 쓴 녹각궁, 황소뿔 3개를 이어 만든 향각궁[6], 백색 알비노 뿔을 사용한 백각궁[7] 등이 있으나, 현대에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물소뿔을 사용한 흑각궁 종류 뿐이다. 사실 녹각궁이나 향각궁은 조선시대에 물소 뿔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서 대체품으로 삼으려고 했다가 실패한 사례에 가깝다. 우선 녹각궁의 경우 사슴 뿔 역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어 완전히 대체하기 어려웠다. 향각궁은 물소 뿔에 비해 황소 뿔이 짧아서 뿔 셋을 이어붙여 써야 한다는 점,(물소뿔은 양쪽에 하나씩 총 두개면 끝.) 흑각궁처럼 여름이 되면 부레풀이 습기를 먹어 활채가 더 쉽게 부러지거나 떨어져버린다는 점, 탄력이 물소뿔에 비해 형편없다는 점, 농사를 짓는데 매우 중요한 소를 잡아야 한다는 점때문에 쓰기가 어려웠다.

조선 초기부터 물소뿔을 중국과 일본, 류큐 등지에서 수입하긴 했지만 수요가 많아 공급이 후달렸고 특히 후기에는 청나라가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전략물자로 취급하여 반출을 제한하였다. 때문에 주로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향각궁이니, 녹각궁이니 하는 것도 수입물자를 대체하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던 셈. 결국, 세조 7년(1461년) 일본에서 물소 암, 수 한쌍을 보내와 기르게 되었는데, 성종때까지 무려 70여 마리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기후의 변화는 적응하지 못하여 결국 전멸 크리. 기후가 잘 맞지 않아도 간신히 물소를 길러내는데 성공을 하였으나, 임금의 명으로 한양으로 데려가다 다 죽어버렸다는 야사도 있다.

개량궁이 개발되자 입지가 다소 위협받고 있다. 황학정 국궁교본에는 개량궁의 등장으로 인해 활을 각궁에는 맞지 않게 배운 궁사들이 각궁을 부숴먹는 일 때문에 대림이 낮아지고 점차적으로 개량궁의 모양과 비슷해져 전통적 각궁의 규격이 틀어지고 있다고 개탄하는 구절이 있다.

옛날의 각궁. 줌통의 실루엣을 결정하는 대림 부분이 요즘의 것보다 많이 안으로 들어가 있어 거의 3의 형상을 만들고 있다. 요즘의 각궁은 대림의 각이 줄어들어 저 사진과는 많이 다른 실루엣을 가지게 되었다.

전국 각지의 장인들이 각궁을 생산하고 있으며, 대한궁도협회의 가격 제한에 따라 60만원을 넘기지 못한다. 따라서 30~45만원 내외의 보급형 각궁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딱히 남는 장사는 아니라고 한다. 라디오에 출연한 12대째 각궁을 만들어 온 장인의 말에 따르면 60~70만원인데 재료가 비싸서 별로 남는 게 없다는 모양.[8]

다만 2011년 충주무술축제에 전시된 송무궁의 각궁은 120만원이었고 다른 업체들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비공인 궁방의 각궁으로 비공인 궁방은 궁도협회의 가격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 대회에 들고 나갈 수 있는 공인 궁방의 각궁은 여전히 55만원으로 동결되어 있다. 그러니 대회따위 관심 없다면 비공인 궁방에서 본인에게 맞는 제작을 웃돈을 주고서라도 제작하는 것이고 대회에 관심이 있다면 공인궁방으로 가서 맞춰야 할 것이다.

3 만주활과의 비교

3.1 길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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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개는 만주활, 아래의 하나는 국궁이다. 보다시피 만주활이 국궁보다 훨씬 크다.

3.2 형태의 차이

활시위를 걸어매는 고자 부분에 한해 국궁이 특이한 편에 속하는데, 만주나 중국을 비롯한 상당수의 나라들의 각궁의 고자는 고자를 걸기 편하도록 고자 부분만 몸체와 교차된 편평한 형태로 가공한 뒤 홈을 파 고정한 선고자인 반면 국궁은 고자 부분을 두껍게 한 뒤 홈을 판 평고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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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 고유의 양식인 평고자.[9]만주를 비롯한 외국의 각궁의 양식인 선고자.

사실, 평고자 형식은 조선 중후기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 보관되어 있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시절의 고려군의 활[10]이 분명히 선고자이고, 여말선초의 이성계의 활 또한 선고자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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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자키 신궁에 보관된 고려활.

4 각궁 재료의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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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나무는 전체적 활채인 오금 부분의 형상을 만든다.
  • 산뽕나무로는 고자[11]를 깎아서 대나무 활채와 결합한다.
  • 참나무로는 대림을 만들어 줌통 부분을 강화하며,
  • 소심줄은 잘 정리하여 대나무 활채에 얹고
  • 민어부레풀로 접착을 한다. 민어부레풀은 일반 아교와는 달리 열을 받거나 수분을 받거나 하면 쉽게 풀릴 수 있기에 유연한 활의 특성에 적합하다 카더라.
  • 물소뿔은 빛을 받는 부분(양각)만을 사용하며, 각 활마다 2개씩 사용된다. 잘 깎아서 부레풀로 접착한다.
  • 벚나무/자작나무 껍질로는 화피를 싸는데, 미관상의 이유나 수분 침투 보호 등을 이유로 외부로 드러난 심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5 단점

한국의 각궁이 가지는 단점으로는 기후 변화에 민감함사용의 어려움이 있다.

수분이 침투하거나 열을 받으면 민어부레풀의 특성상 즉시 풀려버리기 때문에 여름, 특히 장마철에 사용이 까다롭다. 이 문제는 당연히 당시 군대도 인지했고, 이성계위화도 회군을 할 때 이 점을 구실로 삼은 기록도 있다.[12] 그리 자주 교류하진 않았지만 옆나라인 일본이 똑같이 주력 무기가 활인데도[13] 합성궁을 쓰지 않고 통짜 활을 쓴 이유가 일본의 습한 기후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은 당시에는 물에 화약이 젖으면 쇳덩어리 이상의 가치가 없는 조총을 잘 운용했음에도 조선군의 주력 무기가 각궁이라서 장마철은 왜군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려놓은 활을 쉽게 얹기가 힘이 든다. 부레풀의 특성을 이용해 활을 궁사의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자기에게 맞는 활로 만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쉬운 과정이 아니다. 어설프게 얹었다간 마음대로 튀어버려서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을 해칠 위험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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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2장의 활이 각궁인데, 끼워진 조그만 것이 보궁(삼지끈)이라는 물건이다. 얹어놓은 활은 모양이 어찌 변할지 몰라 힘이 약한 부분에 끼워 활의 모양이 변해 튀어나가지 않게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이다.

습기에 약하므로 사용한 뒤에는 반드시 국궁활터 내에 비치된 궁방에 보관해야 한다. 보통 30도 내외의 아주 건조한 환경의 각궁 비치실이 활터마다 준비되어 있다. 현대처럼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계가 없던 과거에는 건조한 온돌방에서 활을 보관했다고 한다.
  1. 고구려 시대 각궁의 활채가 출토된 적이 있는데, 소의 갈비뼈를 사용했다고 한다.
  2. 몽골활의 경우는 산양이나 염소뿔을 사용했다.
  3. 단, 조선이 주로 사용했던 흑각궁은 핵심 재료라 할 수 있는 물소뿔을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다. 덕분에 중국에서 안좋은 소리 들어가며 수입하다가 때려치고 일본에서 일부 수입. 하지만 그나마도 기후적응을 못하기에 그냥 일본에서 물소뿔을 수입했고... 그나마도 임진왜란 이후 조총에 밀려 조금씩 사라졌다.
  4. 활이 길면 길수록 시위와의 각도차에 의해 드로우렝스가 길어진다.
  5. 이는 서양의 쇠뇌도 마찬가지였는데, 합성궁채(이쪽은 아교로 철갑상어 입천장을 썼다)를 주로 쓰던 중세 쇠뇌들은 비만 오면 파손되기 일쑤였다.
  6. 고구려 하면 생각나는 수렵도를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렵을 하는 무사가 당기는 활을 잘 살펴보면 활의 줌통과 고자 사이에 묶음이 하나 더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당시의 맥궁이 향각궁의 형태였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7. 당연히도 백각은 매우 귀했기에 주로 고위층이 쓰던 것이다.
  8. 소 힘줄, 소 뿔은 말할 필요가 없고 민어 부레도 생각보다 구하기 힘들다.
  9. 정확히는 더 복잡하게 생겼다. width=100% width=100%
  10. 이 동영상의 5분 34초부터 참고.
  11. 이거 말고 활시위를 매는 부분을 뜻한다.
  12. 이성계는 2차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사불가론을 주장했는데 그중 네번째가 '때가 장마철이니 활의 아교가 녹고 군대에 역병이 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13. 일본도에 대한 환상 같은 문제 때문에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철포(일본에서 조총을 부르는 명칭)를 많이 쓰던 때에도 활을 같이 썼으며 대대로 군대의 주력 무기가 활과 창(헤이안 시대 이후)이었다. 일본은 다른 대륙과는 달리 제대로 된 돌격 기병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기병 자체가 별로 흔하지 않은데다 몇 안되는 기병도 대부분이 일반적인 기병인 말 탄 기마 궁사라서 궁사를 효과적으로 격퇴할 수단이 마땅찮았으며, 공성전 시 당연히 활이 유리한 만큼 주력 무기로 위세를 떨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