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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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로마 제국의 첫 왕조[1]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뒤섞인 일종의 연합 왕조로써,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과 그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결합된 왕조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아우구스투스부터 칼리굴라까지는 양자결연에 의해 율리우스 가문의 이름이 전해졌지만, 칼리굴라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살해당했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와 네로의 씨족명은 클라우디우스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존 공화정 체제를 뒤엎기 위해 내전을 벌여 승리한 것이 왕조의 사실상의 시작[2]이라고 할 수있지만 보통은 아우구스투스를 시조로 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기 전 작성해놓은 유언장에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해둬 [3]세습의 포석을 깔아두고 있었기에 카이사르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하겠다. 종조부의 양자로 입적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가문을 이어받아 두 차례의 내전을 벌여 승리하고, 제정의 기초를 닦게 된다.
계보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까지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한다. 이중 티베리우스를 제외하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지만, 실제로 직계 혈통을 통해 제위가 세습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제위는 보통 양자결연을 통해 이어졌고, 이는 로마 제국 제위계승의 전통이 된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자세한 가계도와 양자결연 관계를 보고 싶으면 여기를 참조할 것. 복잡해서 현기증이 나더라도 책임지지는 않는다. [1]
모계 중심으로 황제의 혈통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고대 로마에서는 여성의 발언권이 대단히 강했다. 리비아, 대(大)아그리피나, 소(小)아그리피나 등은 정국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암투와 모략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황족들이 비명횡사했다. 또한, 황실의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근친혼이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조카인 소(小)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복잡한 혼인, 양자결연 등을 통해 왕조의 뼈대를 구축했다. 그 뒤를 이어받은 티베리우스는 황제로서는 무척 유능했지만, 그의 시대에 많은 이들이 황실 내의 음모로 목숨을 잃거나 유배당해야 했다.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는 환호를 받으며[4] 제위에 올랐지만, 사치와 방탕을 일삼다 4년만에 암살당하고 만다.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올라, 칼리굴라가 일으킨 난잡한 혼란상을 정리한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것이 그 유명한 네로이다. 네로는 칼리굴라같이 구제불능의 탕아는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처해 황제 본연의 의무를 망각했다. 서기 69년에 반란이 일어나 네로는 자살하고 갈바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네로 황제를 끝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로마 시민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십대 철부지가 보위에 앉아 제국을 농단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음모나 꾸미고 서로 싸워대기나 하는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더군다나 네로대를 거치면서 귀족 중 아우구스투스의 후손 상당수가 숙청되었다. 근위대를 비롯한 군권이 황제 휘하에서 성장한 지방 출신의 기사계급(에퀴타스)에 의해 장악되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점차 신주류층을 형성하여, 오현제 시기에는 귀족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다. 기성 귀족들은 실권에서 밀려난 채 계속 약화되었다.
이러하여 혈통주의는 빠르게 붕괴했다. 제위는 네로 사망 후 내전을 거쳐 지방 출신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에 넘어갔고, 네로 사망 후 겨우 30년 후에는 첫 속주 출신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탄생한다.[5] 다만 이후 황제들도 모두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를 자칭했고, 혈통이 아닌 상징적인 정통성은 제국이 끝날 때까지, 아니 제국이 끝난 뒤에도[6] 유지되었다.
2 성립배경
아우구스투스는 두 차례의 내전을 벌여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랐다. 첫 번째는 공화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내전이었고, 다음은 동지였던 안토니우스와 싸운 내전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반대파를 배려하지 않으면 또 다른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공화정 복귀 선언을 하는 등, 모양새만큼은 1인 지배체제가 아닌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는 1인 지배체제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그 다음 주자, 그 다음에는 다시 다음 주자가 안정적으로 제위를 이어가도록, 즉 항구적인 체제를 만들어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중심으로 왕조를 만들어내려 했다. 혈통 중심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내전이 일어날 것[7]을 아우구스투스는 무척 우려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동시에 자신의 혈통[8]으로는 왕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위해 유서 깊은 클라우디우스 가문과의 연합을 선택했다.[9][10]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는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고, 리비아는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라는 두 아들을 데려왔다. 이 둘은 리비아의 전 남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다.[11]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들 역시 황실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12] 대(大) 안토니아는 아헤노바르부스 집안에 시집가 네로의 할머니가 되고, 소(小) 안토니아는 앞서 언급한 드루수스와 결혼해 칼리굴라의 할머니가 된다.
3 유력 인물과 가문
3.1 율리우스 가(家)
율리우스 가문은 왕정 시대부터 내려온 아주 오래된 귀족 가문이다.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베누스와 닿아 있었다고 하며, 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베누스 여신의 후손이라고 뻔뻔스럽게도 주장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의 지파 이름으로, 코끼리를 뜻한다.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했던 율리우스 가문의 선조가 전공의 대가로 이 칭호를 수여받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가문은 명문이지만, 클라우디우스나 코르넬리우스 가문처럼 거물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해내지는 못했다. [13] 공화정 중기 이후의 유명한 카이사르 가 정치인은 거의 없다. 이처럼, 당시의 카이사르 가문은 전통만 있고 실질적인 영향력과 재산은 많이 떨어지는 가문이었다.[14]
가문은 전통적인 원로원 보수파에 속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친척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이 아닌 동맹시 시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율리우스 법을 제안해 통과시켰다.
카이사르 가문은 마리우스[15]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마리우스가 다섯번 연속 집정관에 연임되는 등 엄청나게 출세하고[16] 민중파의 거두로 부상하면서 카이사르 가문 역시 민중파의 색채를 강하게 갖게 된다. 카이사르 자신도 민중파의 또 다른 거두인 킨나의 딸과 결혼했다.[17]
이런 혈연 관계 때문에 카이사르는 출세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민중파의 대표격으로 인식되고, 귀족 공화정에 반대하는 반체제 세력의 수장이 된다. 또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공화정을 군사적으로 쳐부순, 즉 공화정에 대한 승리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된다.
때문에 표면적으로나마 공화정을 계승한다고 외친 아우구스투스는 미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는 카이사르의 칭호는 물려받았지만, 이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는 일부러 원로원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바치게 해 이를 카이사르보다 먼저 내세우게 된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들이 즉위할 때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의 통치를 본받겠다"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항상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앞에 놓였다.[18] 형식상으로나마 공화정이 지속되던 제정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대놓고 들먹이는 것은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황제 가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가문이었지만, 카이사르의 정통성은 일부 부정되어야만 했다.
여담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던 갈리아 씨족의 많은 유력자들에게 율리우스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갈리아인들과 자신의 유대를 강화하고, 자신의 동맹자들을 확보하려는 수단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율리우스’ 들이 제정 시대에 활약했지만, 이들은 카이사르와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없다. 비록 그들 중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3.2 클라우디우스 가(家)
클라우디우스 가는 역사에서나, 영향력에서나 대적할 자가 없는 로마 최고의 명문[19]이다. 로마의 시작부터 함께한 가문은 아니지만[20], 합류한 후 10년만에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을 배출한 후 거물 정치인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로마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클라우디우스 가 출신 인물만 열거해도 다음과 같다.[21]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 12표법을 제정한 정치인이다.
- ‘재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 혹은 장님 아피우스, 로마 수도와 가도의 개념을 처음 입안한 정치인이다. 아흔의 나이에 피로스와 타협할 것을 고려하던 로마 정치인들을 호되게 꾸짖어 타협을 단념하게 만들었던 일화가 있다. 결국 로마는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카르타고와의 2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에서 유일하게 한니발과 직접 맞붙어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장군 중 하나이다. 한니발을 전담 마크하는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한니발을 끝까지 괴롭혔고, 이후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전사할 때까지 끈질기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그외에 전쟁 도중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반기를 들고 카르타고에 붙은 시라쿠사를 함락시킨 장군이기도 하다.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 역시 2차 포에니 전쟁 당시의 장군으로 전쟁 후반 북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기발한 전술로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전멸하고 하스드루발은 죽는다. 당시 로마 집정관이 자신의 임지를 이탈하는 것은 불법이었는데, 하스드루발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임지를 이탈해 하스드루발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출동했고, 이 결단이 로마군을 살려냈을 뿐 아니라 승리를 얻게 했다. 네로라는 말에는 ‘과감한 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그는 그의 이름에 맞게 행동했다.
-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 - 이름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그는 평민만이 출마할 수 있는 호민관 직책을 얻기 위해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 그의 귀족 신분을 버렸다. 혼란한 로마에서 자경단을 조직해 정치 깡패로 활약했다. 민중파에 속해[22] 주로 카이사르와 협력했지만, 카이사르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원로원파 정치깡패인 밀로와의 충돌 끝에 살해당한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이중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엮여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와 결혼하면서, 리비아가 전 남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낳은 두 자식도 같이 데려갔다. 이들의 이름은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로,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2대 황제가 되었고, 드루수스의 아들인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4대 황제, 손자인 칼리굴라는 로마의 3대 황제, 증손자인 네로는 5대 황제가 되었다. 리비아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구성원이었다.
3.3 옥타비우스 가
옥타비우스 가문은 로마 근교의 기사 계급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인 옥타비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인 아티아와 결혼했는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와 옥타비아누스의 종조부뻘이 된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불리게 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출신 가문임에도 왕조의 이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4 역대 황제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1대 | 아우구스투스 | BCE 27년 1월 16일 ~ CE 14년 8월 19일 |
2대 | 티베리우스 | CE 14년 9월 19일 ~ 37년 3월 16일 |
3대 | 칼리굴라 | 37년 3월 18일 ~ 41년 1월 24일 |
4대 | 클라우디우스 |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
5대 | 네로 클라우디우스 |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 |
- ↑ 조선왕조와 같은 동방의 왕조와는 그 개념 면에서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왕조는 직계 자손을 위주로 계승된 반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복잡한 혈연과 양자결연으로 맺어져 있다.
- ↑ 카이사르는 새로운 로마를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설계한 제정만큼 정교한 체제는 아니었겠지만, 이처럼 1인 세습 통치체제를 구축할 구상 정도는 해 두었을 것이다.
- ↑ 유언장의 내용은 사후에 공표되었다.
- ↑ 칼리굴라는 황실 가족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게다가 모두가 음험한 늙은 노인네였던 티베리우스의 통치에 질릴 대로 질려있었다.
- ↑ 심지어 오현제 시대가 끝나고 즉위한 페르티낙스는 해방노예의 아들이었다.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황제들은 거의 모두가 속주의 별볼일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심지어는 반 게르만족인 막시미누스같은 황제도 등장했다.
- ↑ 독일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 같은 칭호들은 카이사르에서 유리했다.
- ↑ 즉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아닌 사람이 제위에 앉으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우려는 네로 사후에 그대로 적중했다.
- ↑ 옥타비아누스가 속했던 옥타비우스 가문은 평범한 지방 유지 정도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율리우스 가문에 속하게 됐지만, 공화정 전체에서 놓고 봤을 때 율리우스 가문은 몰락한 귀족 가문 정도였다.
- ↑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혈통을 보강하는 동시에, 유력 씨족과의 연합을 통해 정권을 안정화하려 했던 것 같다. 뒤에 쓰겠지만,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알바롱가 출신으로 로마시의 역사보다도 유서깊다는 명문가였다.
- ↑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에 시집갔고 마르켈루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에게 딸 율리아를 시집보내 - 사촌간의 근친혼이다 -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마르켈루스는 요절하고 애통해한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어 그를 기린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중요한 패였지만 일찍 요절해 버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흑역사.
- ↑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리비아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후손들이다.
- ↑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조카들이었으니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안토니우스파와의 상징적인 화해의 제스쳐이기도 했다. 냉철한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노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 ↑ 귀족 가문이라고 해서 무조건 유명한 정치인들을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공화정 중기 이후로 가면서 귀족과 평민의 구분은 점점 희미해졌고, 아무리 귀족이라도 선거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공직에 나설 수 없었고, 오랜 세월 정치인을 배출해내 귀족보다 더 귀족답게 여겨지는 평민 가문도 많았다. 예를 들어 폼페이우스 가(家)의 영향력과 권위는 당시 카이사르 가(家)의 영향력과 권위를 압도했다.
- ↑ 카이사르는 당시 귀족들이 모여 사는 팔라티노 언덕에 살지 않았다. 그는 서민 주거지로 여겨지는 수부라에 거주했다.
- ↑ 평민 출신으로 로마 최고위 관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평민들의 영웅이 되어 민중파의 수장이 되었다.
- ↑ 공화정 로마에는 한번 집정관에 당선되면 10년간 집정관을 역임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로마가 위기상황이었다지만 이 규정을 생까고 다섯번이나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된 것이다.
- ↑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가 킨나의 딸과 이혼할 것을 카이사르에게 강요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하고 도피생활을 한다.
- ↑ 카이사르는 제위 계승자에게도 내려지는 칭호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칭호였다. 심지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로마가 넷으로 나뉠 때도 정제(正帝)는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썼고, 부제(副帝)는 카이사르를 썼다.
- ↑ 알바롱가 출신 가문으로 로마 건국 후 로마에 합류한 씨족집단이다. 이들의 역사는 로마시의 역사보다도 길었다.
- ↑ 귀화한 사비니인 출신이다.
- ↑ 출처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 ↑ 호민관이 되기 위해 그의 귀족 신분을 버린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