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당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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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신비양부고당륭

高堂隆[1]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삼국시대의 위나라의 관료. 자는 승평(升平).

태산군 평양현 출신으로 고당생[2]의 후손이다.

삼국지연의에선 등장하지 않고 정사에서만 나오는 인물이다. 조예에게 잔소리(...)를 한 기록이 많다.

2 생애

2.1 조예 즉위 전

젊었을 때 서생으로 태산태수 설제에게 임용되어 독우가 되었으며, 후에 군의 독군이 설제와 쟁론을 하자 독군이 설제의 이름을 부르며 욕했다. 이를 본 고당륭이 칼에 손을 대면서 독군을 질책해 말하기를

옛날에 노나라 정공이 치욕을 받았을 때 공자는 계단에 올라 제지하였고, 조나라 왕이 진나라 왕이 아쟁을 탄 것을 탄핵했을 때 인상여는 나아가 질장구를 치도록 했습니다. 신하를 앞에 두고 주군의 이름을 부르면 예의에 따라 토벌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독군은 얼굴빛을 잃었고, 설제는 놀라 일어나서 그를 제지했으며, 후에 고당륭은 관직을 버리고 제남으로 피난했다.

213년에 조조에게 초빙되어 승상군의연이 되었다가 역성후 조휘의 문학에 임명되어 상으로 전임했으며, 220년에 조조가 죽을 때 조휘가 조조를 애도하지 않고 사냥을 나가 말을 달리자 도의로써 정면으로 간언하였다. 황초 연간(220 ~ 226년)에 당양의 장이 되었다.

2.2 조예 즉위 후

226년에 조예가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 박사, 부마도위로 임명되었는데, 조예가 막 즉위하면서 일부 대신들이 연회를 열어야 한다고 하자 상소를 올려 연회를 열지 못하도록 하자 조예가 이를 받아들였다.

진류태수로 승진했다가 나이가 70여 세인 소를 키우는 유목민이 고상한 것을 보고 그 사람을 계조연으로 추천하자 조예가 그를 매우 칭찬하면서 낭중으로 임명했으며, 고당륭은 산기상시, 관내후에 임명되었다. 태화 연간(227 ~ 233년)에 계절풍이 안 와 흉년이 들자 고당륭은 담당 관리 중 한 명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하늘이 질서를 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화흠이 현실적인 대비책을 올리면서 고당륭의 주장은 묻히게 된다.

235년에 조예가 궁전을 마구 지으면서 장안의 큰 종을 가지자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려 노육도 이에 호응해 같이 상소를 올렸는데, 조예는 듣지 않고 변란이라는 자에게 고당륭의 상소를 주면서 그를 비방하라고 했다. 고당륭이 변란과의 설전에서 승리하자 조예는 매우 기뻐해 고당륭을 시중, 태사령에 임명했다.

234년에 숭화전이 불타 없어지자 조예는 고당륭에게 기도해 재앙을 없애는 방법을 물어보자 고당륭은 여자를 줄이고 궁전을 더 이상 짓지 말라고 했는데, 조예는 한무제가 궁전을 오히려 크게 지어 재앙을 누른 일을 꺼내 반박했다. 고당륭은 자신의 견해를 밝혀 불이 난 곳을 깨끗이 하고 다시는 방을 짓지 말라고 했는데, 조예는 숭화전을 재건하고 당시 군국에서 9마리의 용이 나타나 구룡전이라 짓는다.

능소궐이 건축되었을 때 까치가 집을 짓자 조예는 무슨 뜻인지 고당륭에게 물어보자 시경의 '까치가 집을 지으면 비둘기가 가서 산다' 는 구절을 들어 결국 이 곳에 살 사람은 다른 성씨가 될 것이라는 예견을 했는데, 조예는 겁을 먹고 안색이 바뀌었다고 한다. 또 이 해에 유성이 역행하여 대진(대화성이라 부르는 성좌)이 나타나자 이를 통해 조예의 사치 행위를 비판했다.

236년에 장액군의 현천이 범람해 거센 물결이 치자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보석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그 형상은 신령스런 거북이와 유사하면서 물 서쪽에 머물러 있으며, 반석처럼 우뚝 솟아있고 푸르스름한 바탕에 흰색 무늬가 있다. 기린. 봉황, 용, 말은 각각 형체를 이루어 빛을 발하며, 문자가 천명을 고하는 것이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고당륭은 이 보석을 보고 "이것은 고대의 성제와 선황이 일찍이 받지 못했던 신비로운 징조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는 우리 위나라가 합당하게 천명을 이는 것이니 황궁의 동쪽 벽에 넣어 대대로 이 보옥을 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법률을 개정할 것을 주장해 237년에는 역법, 옷의 색깔, 기계를 모두 바꿔 옛날 제도를 부연하고 개정할 것을 상주했으며, 조예가 받아들여 연호를 청룡에서 경초로 바뀐다. 경초 연간(237 ~ 239년)에 장제가 반대했지만 고당륭이 옛날부터 주장하던 위나라가 순의 후손이라는 설이 채택되었으며, 광록훈으로 승진했다.

도황후가 죽었을 때 기주에 홍수가 일어나자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조예가 이 상주문을 보고 고당륭이 두렵다고 했다. 고당륭의 병이 위독해지자 그는 또 다시 구술서로 황제에게 상소하여 하늘의 경고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고당륭은 죽을 때 유언으로 검소한 장례를 치뤄 그 계절에 맞는 옷으로 염할 것을 부탁했는데, 그가 황제의 명령으로 내린 봉선 준비에 관한 예의제도를 작성을 마치지 못하고 죽자 명제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하늘이 나의 사업을 성취시키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고당생은 나를 버리고 죽었구나.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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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 등장. 이름이 고당융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1. 고 씨에 이름이 당륭이 아니라, 고당 씨에 이름이 륭이다.
  2. 전한의 학자로 의례를 연구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금문의례 17편을 쓴 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