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삼국지)

위서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신비양부고당륭

辛毗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나라의 인물. 는 좌치(佐治). 신평의 동생이자 신헌영, 신창의 아버지다.

2 정사

원래 원소 수하의 문관으로 원소가 죽은 뒤 원담을 지지한 형 신평의 연고로 원담의 명령에 따라 조조에게 사자로 파견되다. 신비는 유표와 싸우러 가는 조조를 만나 원담의 뜻을 전했고, 조조는 처음에는 기뻐했지만 며칠 후 마음이 바뀌어 다시 유표와 싸우고자 하고 원상과 원담이 서로 싸우다 망하게 하려고 했다.

신비는 이를 알아차리고 곽가를 만나 회담했고, 곽가의 도움으로 조조를 다시 만나 싸워 이기기 어려운 유표와 싸우는 것보다 원담과 원상이 싸우는 틈을 타 원상의 본거지인 업(鄴)을 치고, 마침내 하북을 손에 넣기를 권했다. 조조는 이를 좋게 여기고 원담과 화친하고, 204년에 업을 무너뜨려 신비를 의랑(議郞)으로 삼았다.

당초 원담이 기주를 떠날 때, 신비와 곽도의 집안도 같이 빼돌렸는데, 신평의 집안은 업에 남아 있아 심배는 곽도와 신평이 원담을 앞세워 원가를 분열시킨 것을 미워하여 신평의 집안 사람들을 잡아들여 죽였고, 신비는 업이 함락되는 날에 성의 옥으로 달려가 형의 집안 사람들을 구출하려 했지만 이미 심배가 전부 죽여버렸다.[1]

나중에 심배가 사로잡히자 말채찍으로 심배를 후려갈기며 자신의 일족을 죽인 복수를 했지만 심배에게서 기주를 망친 자로 매도당했으며, 조조가 심배의 충의를 보아 살려주려 하자 신비가 읍소하여 마침내 심배는 참수되었다.

218년, 마초장비의 침입에 대응하여 하변에 파견된 조홍조휴(曹休)와 함께 참군(參軍)으로서 따라갔으며, 조조가 한중(漢中)에서 철수한 후에 승상장사(丞相長史)가 되었다.

220년, 조비황제에 오른 후 신비는 시중(侍中)으로 승진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당시 정월 개정 논쟁에서 위나라를 고대 의 계통으로 보고, (夏)의 정월로 위나라의 정월을 삼자고 주장하자 황제는 이를 수용했다.

황초 연간에 조비가 하북의 주민 10만 호를 하남으로 옮기는 강제 이주안을 발표했는데, 당시 메뚜기 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조비가 간언을 불허하겠다는 기색을 보이자 다른 신하들이 간언하지 않은 것과 달리 신비는 정식으로 끈질기게 간언하였고, 결국 이주민을 반으로 줄였다. 조비가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도 아랫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며 간언해 조비는 사냥 나가는 횟수를 줄였으며, 싸이코 같은 성격의 조비에게 직언을 한 신하들 중 보복당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신하로 조비가 일찍이 아우 조식과 세자 경쟁을 할 때 자신이 책봉되자 신비를 끌어안고 기뻐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닌 모양이다.

222년에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 조진의 군사로서 주연이 지키는 강릉성을 치는 싸움에 따라갔고, 돌아와서는 광평정후(廣平亭侯)가 되었으며, 조비오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신비는 10년 양병설을 펴며 적극 반대했지만 조비는 듣지 않았고 결국 원정은 실패했다. 조예황제가 되고서는 영향후(頴鄕侯)로 봉작이 올랐으며, 중서감(中書監) 유방(劉放)과 중서령(中書令) 손자(孫資)가 정권을 쥐고 흔들어 대신들이 모두 그들과 교류하였지만 신비는 그러지 않았다.

아들 신창(辛敞)이 계속 그러다가는 유방과 손자에게 훼방을 받을 것이라고 간언했지만 신비는 현 황제가 총명하지도 않지만 어리석지도 않아 그래봤자 삼공(三公)이 못 될 뿐이며, 그것을 위해서 절개를 굽힐 수는 없다고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용종복야(冗從僕射) 필궤(畢軌)가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왕사(王思)에서 신비로 바꾸도록 표를 올리자 유방과 손자가 반대하여 신비는 외직으로 나가 위위(衛尉)가 되었다.

조예가 궁궐 등의 건축물을 짓는 것이 백성들을 피폐하게 한다며 강하게 간언했으며, 234년에 제갈량의 5차 북벌 오장원 전투에서 대장군 사마의가 싸우기를 청하자 조예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사마의가 듣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신비를 대장군군사(大將軍軍師), 사지절(使持節)로 삼아 부월을 들고 갔다. 제갈량과의 결전을 원하는 사마의를 신비가 허락하지 않았고, 사마의 등은 신비에게 감히 거역하지 않았다.

제갈량 사후 위위로 복직했으며, 죽은 후 숙후(肅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의 이름은 신비(辛毘)로 나온다. 정사와 같이 원소의 사후 원담을 저버리고 조조에게 합류했으며, 심배가 지키던 업이 함락된 후 심배에게 갇힌 가족들을 찾으러 갔으나 이미 전부 죽어 있었고, 분노한 신비는 군막으로 옮겨지는 심배에게 말채찍으로 목을 후려치며 그를 욕했다. 조조가 심배를 등용하길 원하여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신비는 끝까지 펄쩍 뛰며 반대했고, 조조는 심배를 결국 죽였다.

220년 조조가 죽고 맏아들 조비가 조조의 뒤를 잇자, 화흠, 왕랑 등과 함께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헌제에게 양위를 강요하는 것으로 나온다.

오장원 전투에서는 정사와 비슷하게 사마의에게 조예의 칙서를 전하여 제갈량과 결전을 치르려는 것을 말렸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지력,매력이 70대, 정치가 80내외의 전형적인 문관 캐릭터. 내정은 보다 낫지만 이쪽은 전투쪽 능력치는 처참해서 역시 미묘하다. 원소군이라면 묻히기 쉽지만 한복군이라면 그래도 저수 다음의 내정요원. 순심과 비슷하다.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형 신평, 아들 신창과 같이 한복군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3에서는 원소의 모사들 중에서 진진과 단 둘만 지력과 정치가 80 미만으로 군사가 되지 못한다. 단, 신비는 정치력이 79이다. 시나리오 1에서는 이상하게 공융의 영지인 북해에 재야로 묻혀있고 나머지 시나리오에서는 원소의 부하이다. 정치력이 79라 가장 상업투자하기 좋은 문관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2/무력 23/지력 78/정치력 82. 혼란을 가지고 있으며 모략계 병법 숙련도도 300.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8/무력 25/지력 78/정치력 83/매력 76의 능력치에 군사, 명사 특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군사 특기가 있긴 하지만 지력이 78인지라 조언의 성공율은 높지 않은 편이며, 통솔이 38로 낮기 때문에 전장에서 그렇게 효율이 좋은 편은 못 된다. 다만 기술 특기가 있는지라 내정에선 그럭저럭 유용하고 정치가 83인지라 후방에서 태수를 맡기기에 적합하다.

삼국지 12의 일러스트에서는 도끼를 잡고 있는데 이것은 부절을 상징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사마의의 생각을 간파하고 조예의 명을 받아 칙서를 전해 결전을 치르려는 것을 말리는 장면이다. 몇몇 사람들은 심배를 죽일려고 하는 일러스트로 착각한다.진교도 그렇고 문관이긴 해도 무기를 잡았는데. 왜 무력이 낮을까?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업성 전투에서 등장하며 보물 가운데 하나인 오화신염선을 얻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문제는 그 과정이라는 게 엄청나게 까다롭다는 것. 일단 업성 내부로 진입해야 하는데 신비가 죽으면 성문 자체가 아예 열리지 않는데다가, 업성 외문을 열어도 내성문을 다시 열려면 신비가 생존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방어력도 낮은 풍수사 계열인 주제에 AI가 무턱대고 전진하도록 설정되어 있는데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군 부대의 체력을 우선적으로 회복하도록 되어있다는 것. 이 때문에 언제나 체력을 가득 채워주어야 하며, 방어력이 낮은지라 체력이 가득 찬 상태더라도 여차하면 한 턴만에 골로 갈 수 있다. 만약 신비가 외성문을 열고 내성문을 열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하거나 적 부대를 전멸시키면, 심배가 방화를 저지르고 자살해 버린다. 이래저래 옥새와 더불어 얻기 가장 힘든 보물.
  1. 《선현행장(先賢行狀)》에서 심배가 신비에게 "구배(狗輩)"라고 외쳤다. 직역하자면 '개와 같은 무리'. 사실 "개새끼"나 마찬가지다. 참고로 이 사건은 204년 8월의 일로, 이미 고대부터 욕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