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 ||
종요 | 화흠 | 왕랑 |
華歆
(157 ~ 231)
1 개요
후한 말, 위나라의 정치가로 평원군 고당현 사람이며, 자는 자어(子魚).[1]
2 정사
고당현은 제(齊) 지역의 이름난 도시로, 그곳의 관리들은 저자나 마을에 놀러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화흠은 관리가 되어서는 쉬기 위해 관부를 나오면 집에 돌아가 문을 닫았다고 하며, 의논하는 것에 있어서 공평해 남을 훼손해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위략에 따르면 병원, 관녕 등과 유학해 세 사람이 친했는데, 이 세 사람을 당시에 일룡이라 불렀으며 그 중에서 화흠을 용의 머리, 병원을 용의 배, 관녕을 용의 꼬리라 여겼다고 한다.
왕분이라는 사람이 고당현에서 이름이 알려진 도구홍과 자신을 불러 영제를 폐위시킬 것을 상정하자 도구홍이 이에 동참하는 것을 말렸으며, 화흠의 말에 따라 왕분의 계획은 실패했다. 효렴에 천거되어 낭중령을 지내다가 질병으로 관직을 떠났으며, 영제가 붕어하자 하진의 부름을 받아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갈 때 지방으로 나와 하규의 현령이 되길 원했지만 질병으로 임지에 가지 못해 남전에서 남양으로 옮겼으며, 당시에 원술이 양성에 있을 때 화흠을 남겼다. 원술에게 동탁을 토벌할 것을 건의했지만 이를 듣지 않자 떠나려고 했지만 마침 천자가 마일제를 보내 관동을 안정시키도록 하면서 마일제가 불러들이자 연으로 임명되었다. 동쪽으로 서주까지 와서 조서를 받아 예장태수에 임명되었으며, 백성들이 감격할 정도로 청정한 정치를 했다고 한다.
손책이 강동을 공격하자 손책이 용병에 뛰어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손책을 맞이했으며, 상빈으로 접대를 받았다. 손책 사후에 조조가 불러들이면서 천자에게 상주했는데, 손권은 보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손권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공고해야 하므로 자신을 잡아두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설득해 손권이 화흠을 조조에게 보내기로 했다.
화흠의 빈객과 옛 친구 등 천여 명이 전송하면서 예물을 주자 이를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그 물건에 주인의 이름을 썼다가 떠날 때 한 곳에 모아놓고 주인들에게 모두 돌려주었으며, 허도에 도착해 의랑이 되었다가[2] 사공의 군사에 참여해 조정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 시중으로 옮겨졌다가 순욱을 대신해 상서령이 되었다가 조조가 손권을 공격할 때 군사로 삼았다.
214년에 복황후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사로이 보낸 편지가 발각되어 복황후와 그 일족(복완 및 목순)이 몰살당하는 일이 생긴다. 조만전에는 이때 화흠이 복황후를 끌어내는 장면이 있다.
공(조조)이 화흠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황후를 잡아오게 했다. 황후는 문을 닫고 벽 속에 숨었는데 화흠이 문을 부수고 벽을 열어 황후를 끌어냈다. 이때 황제가 어사대부 치려와 함께 앉아있었는데 황후가 머리가 풀어헤쳐진 채 맨발로 걸어 지나가다 황제의 손을 잡으며 말하길, "다시 살아날 수 없겠습니까?" 황제가 말하길 "나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오." 황제가 치려에게 말하길 "치공,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소!" 마침내 장차 황후를 죽이려 하였고, 복완과 그 종족으로 죽은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 조만전 |
이후 위나라가 건국되자 화흠은 어사대부가 되었다. 위문제가 왕이 되자 상국에 임명되면서 안략향후에 봉해졌으며,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사도가 되었으며, 평소에 청빈해 봉록이나 하사품을 모두 친척들에게 나눠주면서 양식을 보관하지 않았다. 공경(公卿)의 관리들은 관청 소속의 노비를 하사받았는데, 오직 화흠만이 이들을 내보내 결혼을 시켰다.
황제가 탄식하여
사도(화흠)는 나라의 원로인데, 다른 대관들은 먹는 것을 중히 여기는데 사도는 푸성귀만을 먹으니 할 말이 없소.(화흠의 청렴함을 칭찬한다는 뜻)
위와 같은 조서를 내려 어의(御衣)를 하사하고 화흠의 처자와 집안 사람들에게 새옷을 지어줬다고 한다.
황초 연간에 문제가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자 관녕을 천거했으며, 위명제가 즉위하자 박평후에 임명되어 5백 호가 더해져 식읍이 1천 3백호가 되었으며, 태위가 되었다.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으며, 태화 연간에 조진을 파견해 촉을 공격하도록 하자 군사를 거둬들였다가 때에 맞게 움직여야 된다고 상소를 올렸다.
231년에 사망했는데, 시호를 경후라고 했다.
세설신어에는 화흠과 관련하여 황금에 대한 일화, 자식 교육에 대한 일화, 배를 타고 갈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다만 세설신어의 특성 상 저 일화들이 사실이라기 보다는 당대 사람들의 화흠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상징성을 갖는 이야기라고 여기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의 이전에도 이미 화흠에 대한 인식은 그닥이었다는 뜻이다
- 황금에 대한 일화
둘이 밭일을 하다가 금덩이가 나오자 관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화흠은 한 번 집어 보고 던져버렸다. 후에 둘이 한 자리에 앉아 글을 읽던 도중 귀인의 수레가 지나가자 역시 관녕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만 화흠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수레를 구경했다. 관녕은 화흠이 권력, 재물욕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와 함께 학문하는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앉은 자리를 자르며 "우리는 벗이 아닐세"라 했다(割席絶交).[3]
- 자식 교육에 대한 일화
화흠은 자식 대하기를 매우 엄정하게 해 비록 한가로이 집안에 있을 때라도 마치 조정의 의식과 같았지만 진기 형제는 부드럽고 사랑스런 방법으로 자식을 방임했고 두 집안 모두 화기애애한 법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 배를 타고 갈 때 일화
왕랑과 함께 배를 타고 난리를 피하다가 어떤 사람이 함께 타고 가자고 하자 화흠은 난색을 표했지만 왕랑이 빈 자리가 있다면서 어째서 안 되냐면서 태웠는데, 도적의 추격이 오자 왕랑이 그 사람을 버리고자 했다. 그러자 화흠이 애당초 내가 의심했던 까닭이 이 때문이었다면서 이미 자기에게 의탁한 사람을 받아들인 이상 상황이 급박하다고 어찌 다시 버릴 수 있겠냐고 해 처음대로 구해줬으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화흠과 왕랑의 우열을 결정했다고 한다.[4]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선 정사에 인용된 조만전의 내용 그대로 헌제와 황실을 괴롭히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온다. 복완의 조조 암살 계획이 탄로나자 조조의 명으로 복황후를 끌어내는가 하면 조조가 죽고 나서는 헌제에게 제위를 양보하도록 강요하고 조비를 즉위시킨다.
또한 조비와 그의 형제들 간에 싸움을 일으킨 원흉이기도 하다. 조창을 제외한 조식과 조웅이 조조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묻게 했고, 조웅이 자결한 걸 알면서도 조식을 그냥 죽여 버리는 게 낫다고 간언했다.
조예의 대에는 반란 혐의가 있던 사마의에게서 병권을 빼앗는다.
연의에서 주로 한황실을 핍박하는 모습에 집중해서 관료와 학자로서의 면모만 나오지 않을 뿐 연의에서 대놓고 폄하했다는 견해는 오해이다. 조만전에 분명 복황후를 강제로 끌어내는 장면이 나오는 만큼 연의에서는 있는 그대로 화흠의 모습을 연출했을 따름이다.
4 가족 관계
동생 화집(華緝)은 조예의 대에 형의 식읍을 나눠 받고,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처는 등씨(滕氏)[5]이며, 첩으로 낙통(駱統)의 어머니인 낙씨(駱氏)가 있었는데, 낙통이 8살 때 화흠에게 재가했다.
장남 화표(華表)는 『진서 晉書』에 본인의 열전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차남 화박(華博)은 세 현의 내사(內史), 3남 화병(華炳)[6]은 시어사(侍御史), 막내아들 화주(華周)는 황문시랑(黃門侍郎)과 상산태수(常山太守)를 역임했다.
5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지력과 정치력이 괜찮은 문관으로 나온다. 단 매력은 매우 낮다.
삼국지 3에서는 다른 능력들이 죄 잉여지만 정치가 72. 상업투자에 특화되어있는 문관이다. 손견을 선택하면 장수수색을 통해 등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손견에게는 내정 분야에서 나름대로 쓸 만한 장수.
삼국지 5에서는 무력 35/지력 80/정치력 85/매력 30으로, 전작인 삼국지 4에 비해 무력이 10나 깎였지만, 지력과 정치력이 각각 14, 10씩이나 상승하여 문관으로서 괜찮은 능력치를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후반기 시나리오에서 태수를 맡고 있는데, 야망이 9밖에 안 됨에도 의리가 2밖에 안 돼서인지 툭하면 반란을 일으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5/무력 38/지력 86/정치력 82. 혼란, 매도를 가지고 있으며 의리는 0이다.
삼국지 10에서도 물욕이 탐욕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나오는 시리즈마다 의리 관련 수치가 바닥을 기고, 매력도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보인다. 코에이가 9에서 열전을 작성하면서 '정사와 연의의 평가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써놓은 걸로 봐선 분명 정사연의 둘 다 본 모양인데 그냥 정사는 깔끔하게 씹어먹은 듯 싶다(…). 능력치는 통솔력 11/무력 35/지력 84/정치력 80/매력 8에 특기는 상업, 위압, 반박, 명사, 주호 5개. 위압 특기는 헌제를 퇴위시킨 연의의 내용을 반영한 듯. 상업 셔틀로 쓰기 좋으며 정치 능력치도 좋은지라 후방에 태수로 두면 도시 발전시키는게 장난이 아니다. 나 간신이오 하고 써붙인 듯한 일러스트에 비해선 그나마 그럭저럭 쓸 만하다.
삼국지 11에선 특기마저 없다. 어째 갈수록 안습이다.
삼국지 12에서는 헌제로부터 빼앗은 옥새를 받쳐들고 백관들과 더불어 위왕궁으로 찾아가 조비에게 바치는 모습이 일러스트로 나왔다. 전법은 색적으로 매복한 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벽을 부수고 복황후를 끄집어낸 일을 반영한 것. 시리즈 통틀어서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왕랑군에 속해 있는데, 연의의 모습을 반영하여 의리가 낮은 편이나 왕랑과 상성이 큰 차이가 없어 다행히 쉽게 배반하지는 않는다. 사실 왕랑과 화흠이 이 게임 시리즈에서는 높은 지력/정치에 비해 낮은 매력이라는 공통점이 또 있기도 하다.. 이는 역시 왕랑군에 속해 있는 우번도 비슷하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33/33/82/83. 중신특성은 없고 전법은 창병동요. 특기는 설파(5), 교섭(5), 상업(2). 지력이 괜찮은 편이기 때문에 군락포섭에 좋다. 숨은 속성은 의리가 경시이고 사망년이 231년이라서 수명도 매우 길다.
삼국에서는 조조가 죽자 조문하러 온 헌제에게 조조의 영전 앞에서 참배할 것을 요구한다. 헌제는 허수아비지만 일단 황제고 죽은 조조는 왕인데 어찌 황제가 신하에게 절을 하냐고 하자 화흠은 다그쳤다. 결국 헌제는 조조의 영전 앞에서 절을 하고 만다. 또한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하며, 어느정도 사실이지만 조조가 없었으면 헌제가 숱한 살해 위협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온 천하가 헌제가 암군임을 안다며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7]
반삼국지에서는 헌제를 죽이기도 하고, 누상촌의 뽕나무를 베려 하기도 하는 등 아주 악하게 등장하고, 마초가 그를 고문해 살을 발라먹어 죽인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원래는 어진 선비였지만 관녕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삐뚤어진걸로 나온다. 황후를 죽이면서 속으로 관녕의 이름을 부르며 너 같은 졸부는 이런 일 못한다고 되뇌이지만 결국엔 열등감을 극복 못하고 죽는다.- ↑ 삼국지연의에서 머리카락을 잘라 조휴를 방심케 한 인물인 주방과 자가 같다.
- ↑ 사실 이 대목은 화흠이 무작정 배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게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조조가 주는 벼슬을 거부하면 OK 너네와 전쟁이란 뜻이 되며, 또한 조조 쪽에서는 벼슬을 내려서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물론 화흠이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쭉 남아 있었다는 건 변명이 불가능하지만.
- ↑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설화는 조선에 흔히 전해 내려왔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기묘사화의 주역이었던 남곤과 조광조가 등장하는 야사이다. 둘이 산책을 하던 도중 여인이 지나가자 조광조는 그 모습을 보고 산책하는 도중에도 계속 뒤돌아봤으나 남곤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조광조는 어머니인 여흥 민씨에게 이것을 말하며 자책했으나 여흥 민씨는 오히려 남곤을 냉정하고 무서운 인물로 여겨 조광조에게 남곤을 멀리하라고 했고, 심지어 남곤의 집에서 먼 곳으로 이사까지 했다.
- ↑ 화흠의 손자인 화교(華嶠)가 쓴 보서(譜序)에는 이 일화가 화흠이 하규의 현령으로 있을 때 뜻을 같이한 정태(鄭太) 등 6, 7명과 함께 도피한 것으로 나오며, 도적의 추격이 아니라 태워주기를 요청한 남자가 물에 빠지자 버리고 달아나려는 것에서 화흠이 함께로 가기로 해놓고 버리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면서 화흠이 다시 태운 것으로 나온다.
- ↑ 화방(華芳, 아래 나올 화병의 손녀)의 묘지가 발견되면서 성이 밝혀졌다.
- ↑ 자는 위명(偉明). 배송지가 『삼국지』 「화흠전」에 인용한 화교의 보서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역시 화방의 묘지가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 ↑ 이는 사마의의 계획에 들어갔다. 조비는 심복인 사마의와 의논하고서 선양을 받기로 결정하는데, 주도적으로 나서면 높은 관직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후세에 한실 공신임에도 한실을 찬탈한 역적이란 오명을 피하기 위해 사마의는 대놓고 나서지 않는다.
어차피 사마씨 집안은 조위를 찬탈하긴 했지만사마소가 이를 논하자, 사마의는 '난 승상도 하기 싫고 개국공신도 싫다. 그런건 남들 줘라'고 하며, 그 역활을 화흠에게 넘긴다. 화흠을 두고 '개국공신이 되기 위해 영혼도 팔아버린 놈'이라고 평하는건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