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장명 | 고라쿠엔 스타디움(後楽園スタヂアム) |
소재지 | 도쿄 도 분쿄 구 고라쿠쵸 1-3-61[1] |
홈구단 | 요미우리 자이언츠(1937~1987) 야마토 군(1937~1943) 다이에이 유니온스(1946~1957) 니폰햄 파이터즈(1948~1953, 1964~1987) 주니치 드래곤스(1948) 코쿠테츠 스왈로즈(1950~1963) 마이니치 오리온스(1950~1962) |
개장일 | 1937년 9월 11일 |
폐장일 | 1987년 11월 9일 |
소유주 | (주)고라쿠엔 스타디움 |
좌석수 | 38,000명(개장 당시), 42,337명(폐장 당시) |
크기 | 좌우 91m[2], 88m[3] 중앙 120m 펜스 좌우 5m / 센터 2.1m |
1 소개
일본야구의 성지
오 사다하루의 홈런 기록의 일등 공신
일본 도쿄도에 위치했던 야구장으로 현재 도쿄돔이 건설된 자리에 위치해 있던 경기장이었다. 보통 고라쿠엔 구장, 고라쿠엔 야구장이라고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고라쿠엔 스타디움이었다.
2 역사
2.1 개장 초기
1936년에 일본직업야구가 기지개를 폈지만, 도쿄 6대학 리그가 활용하고 있고, 이들의 반발로 인해 메이지진구 구장을 제때 사용하지 못하고 경기 일정에 차질이 빚기도 했다. 실제로 1936년 7월 1일에 열린 도쿄 자이언츠와 나고야 군간의 경기는 메이지진구 구장을 쓰지 못해서 와세다대학의 토츠카 구장을 빌려서 쓰기도 했다.
이에 요미우리 신문사와 한큐 전철의 공동 출자로 1936년 12월 (주) 라쿠엔 스타디움(株式会社後楽園スタヂアム)를 설립하고 과거 도쿄 포병 공창이 있던 국유지에 경기장 건설을 추진, 건설비 123만엔을 투입해 완성 시켰으며 이듬해인 1937년 9월 11일에 개장식을 가졌다. 구장 이름은 구장 인근에 위치한 다이묘정원인 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楽園)[4]에서 따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구장을 접수해 경기장에는 감자와 옥수수를 심어서 재배했고 상단부에는 곡사포를 설치했었다.(...) 종전 후인 1945년에 야구경기가 치러지며 다시 야구장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의 야구단 창단으로 촉발된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 분열 당시, 도쿄와 수도권 일대에 프로야구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이 고라쿠엔 경기장 뿐이었기에 센트럴 리그 주요 경기는 모두 고라쿠엔에서 열리며 센트럴리그 553경기중 31%인 171경기가 이곳에서 열렸고, 퍼시픽리그 420 경기중 28%인 117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2.2 프로야구 지역 연고제 도입후
일본프로야구는 1952년부터 지역연고제를 도입했는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이곳을 홈구장으로 선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구단들도 도쿄라는 지리적 위치와 더불어 a급 시설이라는 점때문에 제법 많이 거쳐갔는데 다이에이 유니온스의 경우에도[5] 1957년까지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으며 토에이 플라이어즈도 1948~1953년, 1964년부터 폐장될때 까지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코쿠테츠 스왈로즈도 1950년부터 1963년까지 이곳을 홈구장으로 빌려 사용했으며, 롯데 오리온즈도 일명 "집시 롯데" 시절 미야기 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이곳에서 경기를 가진적이 있다. 1974년 일본시리즈를 여기서 치른 게 그 예.[6]
1974년 10월 14일 나가시마 시게오의 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은퇴경기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1977년 오 사다하루의 800호 홈런도 바로 이 경기장에서 터졌다.
2.3 철거
바로 옆에 위치한 경륜장이 폐쇄되고 도쿄에 돔구장을 건설 하는 것이 확정되면서 고라쿠엔 경기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1987년 10월 13일, 닛폰햄 파이터즈와 긴테츠 버팔로즈 간의 경기를 끝으로 퍼시픽리그 경기는 열리지 않았으며 1987년 10월 18일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간의 경기를 끝으로 센트럴리그 경기도 열리지 않게 되었다.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일본프로야구 마지막 공식 경기는 1987년 일본시리즈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세이부 라이온즈간의 5차전이 었으며 이날 경기의 마지막 타자는 시노즈카 토시오였고 승부는 세이부가 3-1로 승리했다.(그 뒤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에서 열린 6차전에서 세이부 라이온즈는 똑같은 스코어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승리.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시즌이 종료되고 11월 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사인회 및 행사를 마지막으로 폐쇄했다.
바로옆 고라쿠엔 경기장[7] 이 철거 되고 있다. |
1987년. 바로 옆에 완공직전의 도쿄돔이 보인다. |
완공된 도쿄돔의 외관과 고라쿠엔 구장 |
3 특징
- 당시 최초로 메이저리그식 백네트 뒷좌석이 있었다. 현재도 일본 대부분의 야구장들이 (심지어 프로구장도) 백네트 대신 심판석 및 기록실로 남겨둔 것만 보더라도 상당히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 일본야구 역사상 최초로 인조잔디를 사용한 구장이다. 1937년부터 1975년까지 천연잔디를 사용했으나 1976년부터 폐장직전 까지 인조잔디를 사용했다.
- 건설 당시 좌우측 펜스까지의 거리가 78M에 불과해 홈런 공장으로 불리기도 했다.[8] 이후 1958년에 좌우 펜스를 90M까지 확장했으나 여전히 타자에게 유리한 경기장으로 평가받았다. 왜냐하면 실제 거리는 90M가 안되었기 때문(...)[9] 오 사다하루의 홈런 기록이 메이저리그로 부터 인정 받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 경기장의 펜스 길이이다.
- 고라쿠엔 구장은 개장일부터 폐장일까지 7,172경기를 치렀으며 10,416홈런이 나왔는데 이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단일구장에서 가장 많이 터진 홈런,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한 구장으로 기록되었다.
4 트리비아
- 다이안 마틴은 고라쿠엔 경기장의 전속 모델로 활동한적이 있다.
- 건설이 진행되던 당시 (주)고라쿠엔 스타디움에서 야구단을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경기장이 건설중이던 1937년 1월 18일에 고라쿠엔 이글스를 창단하기도 했다. 고라쿠엔 구장을 홈으로 사용했지만 적자폭이 커지면서 1942년에 철강회사인 야마토 공작소에 매각되었고 이후 1943년에 해체했다.
- 1938년에는 거대한 스키점프대가 설치된적이 있다. 눈은 후쿠시마현에서 공수해왔다고.
- 워낙 유명한 장소이다 보니 기시 노부스케가 1960년에 발생한 안보투쟁 시위에 대해서 "국회 주변은 시끄럽지만, 긴자나 고라쿠엔 구장은 언제나 그대로이다. 나에게는 소리없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발언에도 등장하기도.
- ↑ 현 도쿄돔 주소와 동일하다.
- ↑ 다만 실측한 거리는 이보다 더 짧았다(...)
- ↑ 럭키존 운영할때
- ↑ 현재도 도쿄돔 뒷편에 위치해 있다. 에도 막부 초기에 건설된 정원으로 일본의 특별 사적 및 특별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 ↑ 마이니치 오리온즈와 합병해 사라졌다.
- ↑ 이유는 미야기 구장의 관객수용량이 3만명 미만이여서 일본시리즈 개최 조건인 관객수용량 3만명 이상에 맞지 못했기 때문. 그 뒤 관객수용량을 늘리면서 지금은 일본시리즈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 ↑ 고라쿠엔 구장과 함게 건설된 구장으로 볼링 경기장, 경륜장 등으로 활용되었다. 경륜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세계대전 전후로 도시 재건 사업의 재정 확충을 위해 경기 추진을 적극 지원했으나 1972년 이후로는 금지시켜서 여름에는 수영장, 골프 연습장으로 활용되고 만다.
- ↑ 1937년 개장후 치른 82경기에서 84홈런이 나왔고, 다른 경기장들 총합이 113경기 24홈런이었다.
- ↑ 국내 프로야구에서 사용하는 구장의 경우 좌우펜스까지의 길이가 97m~100m 정도인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작은 크기임을 알 수 있다. 탁구장 소리 듣던 목동 야구장이 좌우펜스 98M이고, 가장 작은 거리가 문학 야구장과 사직 야구장이 95m이다.
- ↑ 아무래도 제작사인 토에이가 한때 닛폰햄 파이터즈의 모기업(그 당시엔 토에이 플라이어즈)이었던 게 연관이 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