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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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ent Majority

1 역사적 배경

"침묵할 때, 그들은 소리치고 있다." (Cum tacent, clamant.)

키케로, 카틸리나 반박문 中 (Cicero, In Catilinam 1,8)

"그래서 오늘 밤, 저는 여러분 즉 우리 미국 시민들 중 침묵하시는 다수의 분들께 지원을 요청합니다."

"And so tonight—to you, the great silent majority of my fellow Americans—I ask for your support."
ㅡ 리처드 닉슨, 1969년 11월 3일 밤 연설.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지는 않는 (흔히 보수적인) 다수 대중을 의미하는 말로, 원래는 죽은 옛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

1969년 11월 3일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한 연설로 유명해졌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목소리를 가진 소수(Vocal Minority)"와 달리 다수는 전쟁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 일단 닉슨 자신이 1968년 대선에서 재기에 성공하며 사실상 34년간 계속되던 민주당 우위의 시대를 끝낸 것부터가 '침묵하는 다수'를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사실 득표율은 박빙이었지만..)[1] 그러나 이 말을 처음 쓴 것은 닉슨이 아니다. 1967년 공화당 지지 성향의 노조 간부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이후 닉슨의 연설 작성자까지 쓰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은 1960년 일본에서 나왔는데 안보투쟁으로 반정부 투쟁에 극에 달했던 가운데 당시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가 "국회 주변은 시끄럽지만 긴자고라쿠엔 구장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소리없는 소리가 들린다"가 있다. 대다수 국민들은 안보투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안보투쟁은 기시 본인의 퇴진이 있은 뒤에야 끝났지만,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살해사건(도쿄 찌르기 사건) 등의 호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당은 집권하지 못했고(의석은 늘렸다) 이후 1993년까지 만년 야당으로 지내야만 했다.

2015년에는 도널드 트럼프가 이 단어를 이용하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2 이해

국가 규모의 큰 민주사회에서 시위나 청원 등을 하며 열성적으로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인 경우가 많다. 어떤 서명운동에 10만 명이 동참했다면 분명 굉장히 많은 사람이 찬성하는 것이지만, 그 사회의 인구가 1000만 명인 경우 이들의 의사는 1%의 뜻일 뿐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말 그대로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헌데 침묵(기권)도 하나의 권리인 건 맞는데, "침묵/기권=긍정도 부정도 안 함"을 "침묵/기권=긍정 안 함"으로 편집하면서 "봐라! 다들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

이 때문에 실제 어느 쪽이 다수 대중의 뜻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쟁점이 덜 중요한 사안인 경우는 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며 매우 중요한 사안인 경우는 국민투표 등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현상들은 당장 총선, 대선으로도 잘 드러난다. 민주주의는 투표로 말하는 법이니까.
허나 한국사회에서는 2008년 대규모 촛불시위 때 '침묵하는 다수' 논쟁이 있었다. 2012년19대 총선 역시 나는 꼼수다 등의 맹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진보의 우위가 압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끝났다. 같은 해 치러진 18대 대선 역시 비슷한 결과로 끝났다.

참고할 만한 다른 용어로는 커뮤니케이션학에서 다루는 "침묵의 나선 이론" 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다수라고 느껴지면 마음껏 그 의견을 표출하지만, 소수라고 느껴질 경우는 의견을 표출하지 않고 그냥 침묵을 지킨다는 것. 이것은 각종 여론조사 등에서 나온 결과가 실제 투표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일정 부분 설명해 준다. 어떤 집단이 실제로는 다수파인데 소수파가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스스로를 소수라고 착각하고 침묵을 지키는 경우라면, 침묵의 나선 이론과 침묵하는 다수의 논리가 교집합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을 듯.

3 시끄러운 소수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하기 위한 전제로 '시끄러운 소수(vocal minority)'가 필요하다.

눈에 자주 띄면 실제보다 세력이 커 보이기 때문에, 군중심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소수파는 좀 민폐다 싶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것. 이 작전이 성공하게 되면 어느새 진짜 다수가 되어 있다는 게 이 작전의 무서운 점이다.[2] 쉽게 말해서 환청효과(하도 많이 듣다 보니 진짜 그렇게 느껴짐)인 셈.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 항목 자체가 나타내듯 이러한 시끄러운 소수는 다수, 심지어 같은 편인 온건한 지지층들과도 멀어지면서 자기쪽의 이탈과 상대쪽의 단결을 불러올 수 있다. 여기서 바로 침묵하는 다수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4 비판과 옹호

4.1 침묵하는 다수 그런 거 없다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이 늘 동질적이지 않고,[3] 시끄러운 소수의 의견 역시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사실 밀리는 쪽의 정신승리 기법이란 주장. 대부분의 침묵하는 다수들은 해당 사안에 대해 아무 생각 없다.

문제는 침묵하는 다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해서 갑자기 주장하는 쪽의 세력이 확장되거나 하는게 아니라는 점. 또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자주 사용된 논리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박근령니코동에서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옹호하는 등 그야말로 모범적인 황국신민다운 망언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침묵하는 한국인들은 자신과 의견이 같다는 개소리까지 지껄이는 바람에 대부분의 한국인의 국적을 박탈해버렸다(...)

4.2 침묵하는 다수는 분명히 존재한다

침묵하는 다수는 있지만 단지 생활이 있기 때문에, 대낮에 거리로 몰려나오기 힘들 뿐이란 주장이다. 예를 들면 17대 대선이라든가. 000이 대통령이래

무엇보다도, 정국이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큰 목소리를 내는 집단은 급격히 변할 수 있지만, 실제 사회를 구성하는 대중들의 입장이 그만큼 급격하게 변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또한 실제 경험과 차이를 침묵하는 다수로 느끼는 경우도 많다. 당신이 특정 정치적 입장을 표출한다면, 당신과 굳이 싸우고 싶지 않은 반대쪽 진영 사람들은 당신과 정치적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을 것이다. 이럴 경우 주변에는 다 내 입장과 비슷한데, 투표하면 결과가 반대로 나오는 경우가 상당수가 있다. 이 또한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고 느끼게 되는 원인이다.

매체나 연령에 따라 지지를 다르게 느끼는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선거를 보자. 인터넷상에서는 문재인 후보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원인은 인터넷은 젋은층의 이용 비율이 높고, 박근혜 대통령의 주 지지층인 60대는 인터넷 사용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선 후 선관위 발표를 보면 20대의 70% 이상이 문재인을 지지했으며, 30대의 60% 이상이 문재인을 지지했다. 즉 젊은 층 이용률이 높은 인터넷이란 매체에서는 문재인 지지자가 높게 나타나지만, 20대 대한민국 사람이 60대 친구를 사귀게 되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실제 인터넷 여론이나 인터넷 사용자의 생각과는 다른 결과가 도출되게 되는 것이고 이는 인터넷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고 느끼게 되는 원인이 된다.

물론 이는 단순히 넷좌익입진보만의 문제가 아니고, 넷우익수꼴-등에서도 드러나는 문제이다. 결론은 둘 다 다수가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1980년대부터 성장한 386 화이트 칼라 세대는 중대한 순간마다 한쪽 여론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6월 항쟁으로, 이때의 갑작스런 활발한 참여는 (역)'침묵하는 다수'론으로 예견되었다(앞선 사례로는 1985년 12대 총선이 있다). 이런 경우처럼 "침묵하는 다수"는 반드시 보수성향을 띄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진보적 성향을 띌 수도 있다.

4.3 제3의 시각

하지만 이런 주장의 맹점으로서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정치적 무관심층이 많을 경우 "결국 침묵하는 다수도 관심 없는 진짜 다수에 비하면 소수가 아닌가"라는 비판을 얻을 수 있다. [4]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투표로 보증되지만 무조건적인 투표만능주의(51% 독재)에 빠지면 곤란하다는 이야기.[5] 또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닌 것 역시 당연한 이야기다.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에서 "군중에 의거한 논증"을 참고하시라.

또한 다수가 침묵하고 있으면 시끄러운 소수가 정당화 될 수도 있는 것 역시 무서운 점이다. 이것 역시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결코 다수라고 볼 수 없었던 나치의 집권이 있다. 잘못된 것에 침묵만 계속한다면 다음 차례는 당신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침묵하는 다수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침묵하는 다수집단이 시끄러운 소수집단과 서로 적대적이거나 상반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이다(그런데 애석하게도 정치적 수사로써 침묵하는 다수론을 내세운 많은 현실 정치인들이 그런 개념으로 쓴다). 물론 목소리를 크게 내는 소수집단이 사회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용한 다수들이 그 소수에 반대할 것이라는 보장 역시 없다. 사실, 대다수의 경우 시끄러운 소수는 침묵하는 다수가 포함된 집단 일부의 대변자에 가깝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침묵하는 소수라는 개념은 겉보기에 드러나는 집단의 구성이 반드시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배후집단의 구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개념으로 제한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관련항목

6 참고항목

7 참고링크

미연시가 팔리지 않게 된 3가지 이유
  1. 이후 미국 정치는 근 40년간 보수 우위의 형국이 지속되었다.
  2.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기독교(개신교)인 비율(기독교 전체는 27%, 개신교 16%)은 생각보다 높지 않지만 체감상 절반은 기독교인인 것 같다는 점이라든가.
  3. 즉, 천만 명 중에서 서명운동에 동참한 사람이 10만 명이라면 분명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남은 990만 명이 해당 서명운동에 대한 반대파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
  4. 쉽게 말해 투표율이 60%보다 낮으면 가장 높은 비율의 유권자는 어느 정당도 아닌 무당파라는 건 당연지사.
  5. 쉽게 예를 들자면, 회사합병꾼이 이런저런 뒷공작을 통해서 상대방의 지분을 51% 먹고는 "자, 제가 다수입니다. 그러니 다들 나가주시죠."라고 한다 치자. 의도야 어쨌건 이를 정당한 절차라고 볼 수 있을까? 이것도 어렵다면, 여러분 혼자 지지하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요리 VS 다수가 지지하는 여러분이 싫어하는 요리라면?
  6. 당시 인터넷에서는 문국현을 밀자고 하는 여론이 거의 90% 이상으로 앞서 있었고, 각종 커뮤니티나 포털 사이트에서는 문국현의 지지율이 높았다. 하지만 결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