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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 1두의 10배 = 1합의 백배(1합은 180ml. 우리가 아는 그 자판기 커피 종이컵으로 가득 채워서 한 컵)
1669년에 에도 막부가 정한 일본의 쌀 측량단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조선 침략d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를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익숙한 측량 단위다.
다시 설명하면, 일반 성인이 하루 생쌀 한 컵으로 밥을 지어서 두 끼씩 먹으면 1년을 생활할 수 있다는 기준으로 1석으로 정했다. 일본인이 하루 세 끼씩 먹기 시작한 것은 겐로쿠 시대부터였다. 세 끼씩 먹게 돤 것은 농지를 개간해서 쌀 생산량을 늘리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쌀이 남아 돌아 불경기를 초래한 쌀 쇼군이라고 불리우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덕분이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지금처럼 쌀을 무게로 재는 대용량 계량기(저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무로 만든 측량기로 부피로 쟀는데, 현대의 기준으로 1합은 무게로 치면 150g이었고 따라서 1석은 그 1000배인 150000g 정도다. 쌀겨를 벗겨내고 도정한 1석의 하얀 생쌀의 무게는 135kg 정도였다. 즉, 1석이란 당시의 일본인 성인 남성이 하루 한 컵의 현미로 밥을 지어 먹는다고 가정하고 1년간 먹을 수 있는 단위였다.
고쿠다카(石高)[1]는 일본 센고쿠 시대 직후 토지조사에 의해 정해진 단위이다. 구체적인 단위는 성인 남성이 1년간 먹는 쌀을 생산하는 만큼의 농토를 기준으로 이를 1고쿠다카라 했다. 이 단위는 각 영주들의 세력을 나타내는 데에 중요한 지표로서 활용되었으며 보통 100고쿠다카 당 병력 2.5명으로 계산했다. 이 말은 100석을 생산하고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어 세금의 일부를 군비로 이용하여 2~3명을 징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고쿠다카가 1만 석이 넘으면 다이묘(大名)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 단위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지조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의 tv 프로그램 '결착! 역사 미스테리'에 따르면 전국시대 당시 2000석의 영지는 현재 2억엔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2]
위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전국시대 총 생산량은 약 1700만석으로, 훗카이도를 제외한 당시 일본 열도의 땅값의 현가치 1조 7000만엔이다.
고쿠다카는 쌀 생산량으로 그 단위를 정하기 때문에 땅의 실제 면적과는 상관없었고, 해당 면적에서 생산되는 쌀의 생산량만큼이 고쿠다카의 단위가 되었다. 일례로 경우 센다이 62만 석의 영지를 통치했던 다테 마사무네는 다른 가문과 같은 넓이에도 불구하고 이를 토지 개발을 통해 1년 생산량을 62만석에서 100만 석으로 만들었다. 게임개발 회사 코에이 테크모에 따르면 다테 가문의 실질 생산량은 200만석이었다고 한다. 또한 모리 가문의 쵸슈번은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연 36~37만석을 생산했으나 메이지 유신 당시 연 100만석에 가깝게 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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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남부에 있었던 마츠마에 번은 당시 기술로 벼농사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쿠다카가 없었지만, 에조(아이누)와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냈기 때문에 1만 석 격(格)의 다이묘로 인정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대마도 역시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땅이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다름아닌 조선과의 무역이 쩔어줬으므로 대마도주 역시 다이묘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