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살로 피사로

7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에스파냐 왕국은 그 어떤 세계보다도 큰 세계를 정복하고 개척하고 미지의 땅을 향해 탐험해 나갔다. 그런데 곤살로 피사로의 엘도라도 원정은 그 어떠한 신대륙 원정 역사상 최대의 개 삽질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1545년 역사가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1] 저 추파스의 전쟁

풀네임은 곤살로 피사로 이 알론소(Gonzalo Pizarro Y Alonso). 에스파냐의 콩키스타도르. 잉카 제국을 정복한 콩키스타도르로 유명한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의 이복동생이자 피사로의 잉카 정복을 도왔었다.

1 출생과 가족

곤살로 피사로는 1510년 에스파냐 남부지역인 에스트레마두라에 위치한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곤살로의 아버지는 동명인 곤살로 피사로 이 로드리게스 데 아길라르(Gonzalo Pizarro Y Rodriguez de Aguilar)이며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곤살로 데 코르도바의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는 경험많은 용병이었다. 아버지 곤살로 피사로는 3명이상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인 프란시스코(Francisco Pizarro. 흔히 잉카의 정복자로 알려짐)가, 둘째는 에르난도(Hernando Pizarro), 그리고 다른 부인에게 후안(Juan Pizarro), 곤살로(Gonzalo Pizarro)를, 또 다른 부인에게서 프란시스코 마로킨(Francisco Maroquin)을 낳았다.

넷째 곤살로 피사로를 기준으로 맏형 프란시스코와는 무려 30~34살이 차이나며, 차남 에르난도와는 10살, 같은 어머니를 둔 셋째 후안과는 1살, 막내인 마로퀸보다는 1살 많았다. 이 무지막지한 나이차 때문에 큰형 프란시스코가 신대륙의 꿈에 부풀려 일개졸병으로 고난을 겪고 있을때쯤에 곤살로는 이제 막 갓난아기 수준이었다. 이후 프란시스코는 어느 정도 성공하여 파나마 지역의 엥코미엔다로 자리매김하였고, 일련의 원정 도중 파나마 남쪽의 황금 제국(잉카)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프란시스코는 황금제국이 존재함을 확신하고, 그에 대한 물자와 병사들을 지원얻기 위해 본국 에스파냐로 건나가, 당시 국왕이었던 카를로스1세에게 정복권한을 수여받게 된다.

본국에서 병사들을 긁어모으던 프란시스코는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 고향에 거주하던 이복동생들을 불러들이었으며, 당시 곤살로 피사로는 18살로 아주 혈기왕성한 청소년에 불과했다.[2]

2 잉카 정복

1532년이 돼서야 프란시스코와 그의 원정대 168명(보병 106명, 기병 62기)는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최고로 번성하며,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잉카인들과 마주치게 된다.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는 자신의 형이자 본래 황제였던 우아스카르에게 내전을 일으켜, 승리하여 황제가 된 인물이었다. 피사로가 안데스를 넘을때쯤 아타우알파는 현재 에콰도르 지방에서 자신이 황제가 된 것을 기념하는 자축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아타우알파에게 피사로의 168명의 군대는 일개 도적떼 무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아타우알파는 자만하여 피사로 일파가 군대를 매복해두었던 카하마르카에 아무런 무장없이 방문하게 된다. 피사로는 이때를 노려, 카하마르카에 매복한 군대에게 돌격명령을 내렸고, 1000만의 신민을 다스렸던 잉카제국의 황제는 어안이 벙벙한채, 한낮 도적떼로 여겼던 자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이때 곤살로 피사로는 갓 성인이 된 20살이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포로가 된 아타우알파를 잘 대접해주는 척하면서, 아타우알파의 처지를 각인시키고 잉카 제국 각지에 파발을 띄워 황금을 바치게끔 하였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의 군대가 어느정도 머물려 있다가 그들의 본국으로 갈꺼라는 망상을 했기 때문에, 피사로의 비위를 잘 맞춰주면서 황금을 바치는데만 몰두하였다. 제국 각지에서 온 보물 때문에 피사로 형제는 하루도 안되어 에스파냐 최고의 벼락부자로 자리매김하였다.

3 알마그로의 등장, 아타우알파의 죽음

피사로 형제들은 아타우알파가 바치는 황금 때문에 페루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이것은 프란시스코의 옛 친구가 페루에 병력을 이끌고 도달하면서 산산조각 나게 된다. 디에고 데 알마그로(Diego de Almagro)는 파나마때부터 프란시스코와 같이 동고동락한 친구중의 친구였다. 잉카 정복 이전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와 함께 페루 정복에 대한 모종의 계약을 했었다. 하지만 알마그로는 페루 원정 직전 불참하게 되었고,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아타우알파를 붙잡고 잉카 제국을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프란시스코가 잉카 황제를 붙잡고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에 알마그로는 페루 원정에 뒤늦은 동참을 선언하고, 150여명의 기보병을 이끌고 피사로 형제들이 머무는 카하마르카까지 진격하게 된다.

예전에는 알마그로와 프란시스코는 둘도 없는 절친이자 사업동반자였지만, 잉카 제국의 황금을 두고 서로에게 점차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의 뒤늦은 동참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잉카 제국의 1000만 신민들을 효율적인 통치를 하기 위해선 알마그로가 데리고 있는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와 그의 병사들에게 잉카의 황금을 나눠주기로 결심했고, 이는 고생한 피사로 형제들과 원정대에게 커다란 반감을 증식시키게 된다.

알마그로는 피사로 형제들의 황금 공급원이 잉카 황제이자 포로인 아타우알파라는 것을 깨닫고선, 아타우알파를 죽이는 것이 피사로 형제들의 잉카에 대한 권위를 실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자리매김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알마그로는 종군신부 빈센테 데 발데르데(Vincente de Valderde)와 함께 아타우알파를 처형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피사로는 자신의 황금 공급원을 가능한 살리고 싶었지만, 부하들의 권고가 크게 작용하여 아타우알파를 교수형에 처하게 된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1533년 7월 26일 비정한 정복자들의 손아귀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3]

4 쿠스코 함락과 알마그로와의 대립

아타우알파가 죽은뒤, 피사로 형제들은 잉카 제국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잉카 황제로 옹립한 꼭두각시가 절실했다. 그리고 잉카 제국의 중심부 쿠스코에는 엄청난 황금이 자리잡고 있다는 소문이 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프란시스코는 자신의 동생 에르난도, 후안, 곤살로 그리고 기병대장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와 함께 40여명의 기병과 1만명의 원주민 동맹군을 이끌고 쿠스코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린다.

쿠스코에는 아타우알파의 심복이자 잉카의 장수 끼스끼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에스파냐인들을 침탈자로 간주하여 그들에게 저항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쿠스코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에르난도, 후안, 곤살로가 이끄는 기병대에게 패퇴당하고 쿠스코는 해방이라는 명목하에 함락당하고 만다. 프란시스코는 쿠스코에서 아타우알파의 부하들에게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던 잉카 황족 망코 카팍을 새로운 잉카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였으며, 망코 잉카는 프란시스코와 영원한 동맹을 약속하며 대관식에 오르게 된다.

피사로 형제들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옛 잉카 황제인 아타우알파 잔당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잉카의 장수들인 끼스끼스와 루미냐비가 각각 토벌대에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편 자신들이 점령한 쿠스코의 엄청난 부를 동생들과 부하들에게 배분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서 알마그로와 신경전을 펼치게 된다. 당시 프란시스코는 페루 해안가에 새로운 도시 리마를 건설하기에 바쁜 상태였고, 이에 프란시스코는 후안과 곤살로를 쿠스코 최고 총독으로 임명하여 망코 잉카와 함께 제국을 다스리게끔 하였다. 이에 알마그로는 자신의 몫이 없음을 한탄하여, 본국의 카를로스 1세에게 서신을 보냈고, 카를로스 1세는 피사로와 알마그로가 페루의 땅을 각각 남북으로 정확히 나누어 통치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이는 개고생한 피사로 형제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고, 알마그로는 신이 나서 쿠스코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후안과 곤살로는 알마그로의 군대를 맞이하여 칼을 내빼고 전쟁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공관 안토니오 텔레스 데 구스만(Antonio Telez de Guzman)이 싸움을 만류해서 겨우 무마시킬 수 있었다.

한편, 프란시스코는 쿠스코에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알마그로와 자신의 동생들을 중재시키고자 하였다.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에게 페루 남쪽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중간에 위치한 쿠스코의 지배권은 나중에 의논하자고 중재안을 펼쳤다. 알마그로는 이에 동의하는 대신 페루 남부 원정을 위한 병력과 물자 지원을 프란시스코에게 약속받게 된다. 에스파냐인들간의 내전은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5 후안과 곤살로의 패악질과 망코 잉카의 반발

1535년, 중재안을 받은 알마그로의 군대가 쿠스코에서 물러나자, 쿠스코는 이제 후안과 곤살로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페루의 중심지에서 프란시스코의 동생이라는 명목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렸으며, 꼭두각시 망코 잉카를 자주 협박하여 곤란하게끔 하였다.

이제 막 스무살 초반이 된 곤살로는 어린 나이에 에스파냐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한 나라의 황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성격이 완전히 뒤틀리게 되었다. 16세기 역사가 아우구틴 데 사라테(Augutin de Zarate)는 ‘곤살로는 문맹이었고 말이 거칠었으며, 여자를 매우 탐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역사가의 증언은 실제 역사에서도 사실로 드러나게 되며, 이것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후안과 곤살로는 옛 황제 아타우알파때처럼 망코 잉카가 황금에 대한 정보를 더욱 많이 알고 있을것이라 판단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망코 잉카를 협박하였다. 망코 잉카의 장남이자 역사가였던 티투 쿠시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나(티투 쿠시)는 황금주괴 1300덩어리, 황금팔찌 2000개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후안 피사로에게 이것밖에 바치지 못했냐는 둥의 망신소리를 들었다. 그는 나에게 개자식이라는 욕설과 함께 황금을 더 내놓으라는 협박을 하면서, 안그랬다간 화형에 쳐할 것이라는 말까지 하였다’

이때의 모습은 당시의 에스파냐측 목격자들에게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후안과 곤살로가 망코 잉카를 구석진 곳에 몰아세우며, 잉카의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황제의 위로 오줌을 누었다고 말한다.

망코 잉카의 대신들은 당장 패악질을 일삼는 후안과 곤살로를 처형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망코 잉카는 그 둘이 자신을 황제로 옹립시켜준 프란시스코의 동생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망코 잉카는 대신들의 강력한 주장을 겨우 만류하면서 최대한 저 인간말종들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망코 잉카의 노력도 곧 허사가 되는데, 바로 곤살로 피사로가 망코 잉카의 아내 쿠라 오크요(Cura Ocllo)에게 반해 결혼하고 싶다는 통보를 보냈던 것이었다.[4] 대신들은 자신들이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인 전체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적극 나섰지만, 망코 잉카는 그것을 거부하면서 다른 묘책을 찾기로 결심한다.

망코 잉카는 곤살로를 불러 20여명의 잉카 최고의 미녀들을 내세워 원하고 싶은 여성을 고르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를 본 곤살로가 짜증을 내며 망코 잉카의 제안을 바로 거절하였다. 결국 망코 잉카는 자신의 누이인 잉힐(Ingil)을 아내 쿠라 오크요로 위장시켜 곤살로에게 보냈다. 곤살로는 잉힐을 보고 쿠라 오크요로 착각한 나머지 망코 잉카와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잉힐의 몸을 더듬으면서 키스를 하는 추태를 보였고, 역사가 티투쿠시에 의하면 잉힐이 곤살로의 행위에 너무 역겨워서 차라리 도망가고 싶다고 망코 잉카에게 청했지만, 망코 잉카는 화를 내며 곤살로를 따르라고 명했다고 한다.

잉카의 한 장수는 곤살로의 추태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얼마든지 덤벼봐라! 니네 황제와 함께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망코 잉카는 잉힐을 넘긴뒤 사태를 무마시킨 듯 했지만, 곤살로는 이윽고 잉힐이 망코 잉카의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선 분개하였다. 곤살로는 망코 잉카의 어전으로 칼을 차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분탕질을 하며 자신이 화났음을 알렸다. 그리고 망코 잉카가 보는 앞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아내 쿠라 오크요를 강제로 끌고가 버렸다.

이를 똑똑히 보고도 곤살로를 저지할 수 없는 망코 잉카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된다. 잉카의 황제로써 망코 잉카는 명목상 페루를 포함한 광범위한 4개 지방의 최고 통치자였지만, 사실은 자신이 피사로 형제들의 꼭두각시 졸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깨닫는다. 이제 망코 잉카는 피사로 형제는 물론, 더 나아가 에스파냐인 전체를 성스러운 잉카땅에서 완전히 박멸할 거대한 반란을 계획하게 된다.

6 망코 잉카의 탈출

1536년 2월, 후안과 곤살로의 이복형 에르난도 피사로가 쿠스코로 2년만에 돌아오게 된다. 한편, 망코 잉카는 제국 곳곳에 밀정들을 보내어 각지에 있는 잉카 장수들에게 군대를 이끌고 게릴라 전을 펼치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피사로 형제들과 에스파냐인들은 잉카 제국의 전체에 대한 영향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들의 주둔지인 중요도시만이 영향권에 불과하게 된다. 망코 잉카는 에르난도가 쿠스코로 오자, 성대한 환영을 준비하며 에르난도와 친분을 쌓고자 노력하였다. 이것은 망코 잉카의 계획적인 의도였는데, 자신에게 패악질을 일삼은 후안과 곤살로를 견제하면서 에스파냐인들의 감시망을 피해 대 반란의 준비를 마친 잉카 장수들이 주둔한 유카이 계곡으로 도망치려는 계획이었다.

후안과 곤살로는 망코 잉카의 이상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이복형 에르난도에게 망코 잉카와 친분을 쌓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에르난도는 그들의 말을 일축하면서 망코 잉카와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1536년 4월 18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망코 잉카는 에르난도에게 친분의 표시로 인간 크기의 황금 동상을 선물해준다고 하며, 이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 보관했다고 하였다. 에르난도는 설마하는 마음에 망코 잉카의 제안을 흔히 수락했고, 망코 잉카는 자신의 가신들과 함께 직접 쿠스코 시를 빠져나가게 된다.

한편, 이리저리 반란을 진압하던 후안과 곤살로는 이복형 에르난도가 망코 잉카를 풀어주었다는 말에 놀라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망코 잉카는 유카이 계곡에 모집된 10만의 전사들과 함께 피사로 형제와 에스파냐인 전체를 몰아낼 각오를 마친채 쿠스코 시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7 대 반란 그리고, 후안 피사로의 죽음. 알마그로의 재등장

망코는 쿠스코에 대한 에스파냐인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다른 장수들을 각지에 매복시키도록 하였다. 이는 상당히 성공적으로써, 쿠스코의 반란소식을 접한 리마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지원부대를 급파하였지만 잉카의 매복군에 걸려 전부다 궤멸당했다. 쿠스코 포위군을 자신들의 돌팔매 무기 ‘볼라’에 불을 붙여 던지는 화공전술을 선사하였는데, 이는 쿠스코에서 꼼짝없이 포위당한 에스파냐인들에게 엄청난 파급효과를 전해 주었다. 그들은 화염을 주체할 수가 없어 어느덧 성당에 모이게 되었는데, 위기의 순간 성 야고보의 힘이 불을 끄게 하였다고 전할 정도였다.

하지만, 에스파냐인들과 그 동맹 원주민인 꺄나리족의 맹렬한 반격으로 잉카인들은 쿠스코로 넘어오질 못했고,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어갔다. 이에 에르난도, 후안, 곤살로는 잉카 전사들이 쿠스코 외곽에 위치한 삭사이와만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 사태를 막을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사로 형제들은 망코 잉카의 사촌이면서, 그와 적대적인 황족 파스칵의 지원 아래, 후안은 자신이 직접 선봉장이 되어, 쿠스코를 나와 기병을 이끌고 맹렬히 돌격하였다.

후안과 그의 기병대는 잉카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맹렬히 저항하였고 이내 선봉대가 주위를 끌고있을 사이 에스파냐 보병대가 삭사이와만 요새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후안은 자만심에 도취하여 방패로 원주민들이 투척하는 돌세례를 막는 것을 게을리 하다가 그만 정통으로 돌덩이를 맞아 두개골이 박살나버리고 말았다. 후안이 부상을 입자 에스파냐인들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부상당한 후안의 뒤를 이어 곤살로가 삭사이와만 요새 공격의 선봉장이 되었다. 곤살로는 이복형 에르난도와 함께 초승달이 뜬 밤을 틈타 공격하는 야습을 계획했고, 일련의 전투와 함께 삭사이와만 요새는 결국에 함락당하고 만다.

두개골이 깨지는 부상을 당한뒤 2주일후 후안 피사로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후안은 일종의 유언을 남겼는데, 쿠스코에 위치해 있는 잉카의 성소를 허물고 거기에 성당을 지어달라고 청원한 것이었다. 이 성당은 오늘날 쿠스코에 남아있으며, 페루의 문화재중 하나이다. 후안은 곤살로와 1살 차이밖에 안되었으며, 맏형 프란시스코와는 30살 차이, 차남 에르난도와는 10살 차이 나는 곤살로에겐 누구보다도 각별한 우애관계였다. 하지만, 후안이 죽음으로써 이제 곤살로 피사로는 더욱 막장으로 치닫게 되며, 곤살로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줄 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전투를 통해 잉카인들의 사기는 완전히 꺾이게 되었으며, 도리어 1537년 1월, 페루 남부 원정에서 돌아온 알마그로가 지휘하는 에스파냐인 500여명, 원주민 보병 1만의 군대가 쿠스코 외곽까지 오고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알마그로는 페루 남부 원정에서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왔었는데, 망코 잉카가 피사로 형제들과 내전중이란 소식을 전해듣고선, 자신이 쿠스코를 점령할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이었다.

망코 잉카는 알마그로의 에스파냐인들이 가까이 오자 어쩔 수 없이 쿠스코 포위를 풀고 퇴각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망코 잉카는 오얀타이탐보로 돌아가 군대를 추스르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알마그로는 군대를 이끌고 쿠스코로 무단 칩입한뒤, 자신이 쿠스코의 새 총독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이는 피사로 형제들과 알마그로 일파간의, 정복자 세력간의 내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8 알마그로와의 전쟁

쿠스코로 진격한 알마그로의 군대는 잉카인들이 물러나 안심하고 있었던 에르난도와 곤살로의 에스파냐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에르난도와 곤살로는 이미 알마그로의 야심을 꿰차고 있었기 때문에 알마그로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쿠스코 시는 알마그로에게 함락되었고, 에르난도와 곤살로는 포로신세가 되었다. 한편 자신의 도시 리마를 건설하는 피사로 가문의 맏형 프란시스코는 자신의 이복동생들이 포로신세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 변호사 가스파르 데 에스피노사(Gaspar de Espinoza)를 파견하였다. 에스피노사는 현란한 말솜씨로 알마그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같은 에스파냐인들간의 분란은 없어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알마그로도 결국 그와 같은 의견을 받아들이고 에르난도와 곤살로, 두 피사로 형제들을 풀어주기로 마음 먹는다.

결국 알마그로는 에르난도와 곤살로에게 평화조약에 약조하면 풀어주겠노라 선언했고, 에르난도는 마지못해 그에 조인하였다. 하지만, 에르난도와 곤살로는 풀려나자마자 알마그로에게 전쟁을 선포하였고, 둘은 맏형 프란시스코의 지원하에 800명의 에스파냐인과 7000명의 원주민 동맹군을 이끌고 1538년 4월 26일 라스 살리나스(Las Salinas)에서 알마그로 세력과 격돌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에르난도는 알마그로에게 승리하였고, 그 결과 포로가 된 알마그로는 일전에 자신이 에르난도를 풀어주었던 사례를 들며 선처를 사정하였다. 하지만 에르난도는 냉혹하게도 알마그로를 처형해버렸고, 이러한 처사는 살아남은 알마그로 잔당들에게 피사로 형제들에 대한 복수심만 돋구게 된다.

9 망코 잉카에 대한 추격

피사로 형제들에게 알마그로의 군대가 궤멸하자, 이제 남은 것은 잉카 부흥을 명목으로 한 망코 잉카의 군대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에르난도는 곤살로에게 원정대를 꾸리게 한다음, 1539년 4월 쿠스코를 떠나 망코 잉카의 잔당을 토벌하게끔 하였다. 곤살로 피사로는 험난한 정글이 위치한 페루 동부의 안티수유에 위치한 망코 잉카의 군대와 격돌하였고, 망코 잉카는 거짓패퇴를 거듭한뒤 깊숙한 정글로 곤살로와 그의 군대를 유인하고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곤살로는 정글에 꼼짝없이 갇힌 채 에르난도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쿠스코에서 온 지원군이 도착하자마자 망코 잉카가 위치한 팜프코나스 도시를 급습하였으며, 이내 망코 잉카는 자신의 아내이자 예전 곤살로에게 능욕당한 쿠라 오크요를 내버린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곤살로는 도망간 망코 잉카 대신 아내 쿠라 오크요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옛날 자신이 애정을 품었던 쿠라 오크요에게 가차없이 고문을 가한 다음 시신을 토막내어 강가로 흘려보내게 하였다. 망코 잉카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기에, 에스파냐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된 아내를 잃은 것을 슬퍼하였다. 망코 잉카는 얀티수유에 위치한 정글도시 빌카밤바로 후퇴하였으며, 망코 잉카의 게릴라 전을 감당할수 없는 곤살로 피사로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10 엘도라도 원정

피사로 가문의 형제로써 곤살로는 맏형 프란시스코 다음으로 페루의 최고 권력자중 하나였으며,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탐욕스런 곤살로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직도 부족했으며, 더 많은 것을 갈구하였다. 마침 곤살로에게 찾아온 소식이 있었으니, 바로 페루 동쪽의 안티수유 정글에 위치하고 있다는 ‘엘도라도’로 불리는 도시의 전설이었다. 곤살로는 몇 번의 답사를 통해 황금 도시 엘도라도에 대한 전설을 확신하고선 대규모의 원정대를 꾸렸다. 곤살로는 막대한 재력으로 350명의 에스파냐인(200명은 기병), 2000마리의 사나운 개, 식량으로 쓰일 2000마리의 돼지, 4000명의 원주민 짐꾼, 2000마리의 야마를 동원, 1541년 2월 21일 원정을 강행하였다. 이는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정복역사상 최대의 물자를 동원한 대규모 원정이었으며, 오로지 페루의 재력을 지닌 곤살로만이 행할 수 있는 막대한 사치와도 같았다.

하지만, 곤살로의 원정은 아마존 강의 시작 지점인 나포 강에 들어서자마자 난관에 펼쳐졌다. 낮선 침입자들을 적대시하는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잘못된 길을 알려주어 곤살로 일행을 더욱더 깊숙한 정글로 끌고갔다. 이윽고 곤살로는 자신이 원주민들에게 속아 정글에서 꼼짝없이 갇혔다는 신세를 알게 되고 한탄하였다. 곤살로는 자신이 가져온 돼지와 야마, 사냥견을 식량으로 충당하였으며, 더 나아가 군마까지 잡아먹었다. 이래도 안되자 이제는 정글의 동물들을 사냥하여 굶주린 배를 충당하였다. 이내 곤살로의 부관이었던 애꾸눈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Francisco de Orellana)가 자신에게 일부 병력을 주면, 정글을 빠져나갈 방도와 식량을 구해오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곤살로는 오레야나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오레야니를 별동대 대장으로 임명하여 식량을 구해오게끔 하였다.

하지만 오레야나는 아마존 강 깊숙한 곳으로 더욱 들어갔고, 이내 부하들의 동의를 얻어 곤살로를 배신하고, 스스로 사령관임을 선포하였다. 오레야니와 원정대는 아마존 강의 시작지점으로부터 고된 원정을 통해 1542년 8월 26일 아마존강 끝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오레야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아마존강'을 최초로 횡단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이는 444년후 미국인 탐험가에 의해 깨질 때까지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게 된다. 한때는 오레야나를 기려 아마존강을 오레야나 강이라 불렀지만, 훗날 아마존 여전사의 설화가 오레야니의 위대한 모험담을 감추면서 아마존 강은 오늘날에도 아마존 강이라 불린다.

11 귀환과 국왕에 대한 반역, 그리고 죽음

그렇게 정글에서 갖은 고생을 한 뒤에, 곤살로의 대규모 원정대는 인원이 엄청나게 감소하였다. 키토로 무사히 도착한 에스파냐인은 350명중 곤살로를 포함하여 고작 21명뿐이었다.

하지만 곤살로가 힘겹게 키토로 돌아오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지는데, 바로 맏형인 프란시스코가 알마그로의 잔당들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로써 후안을 시작으로 맏형 프란시스코까지, 피사로 형제들에게 차례차례 불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편, 차남 에르난도는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국왕 카를로스 1세가 잉카 총독으로 정식 임명하였던 알마그로를 내전이란 이유로 무분별하게 살해한 사건을 빌미로 법적공방이 벌어지는 바람에 본국 에스파냐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제 피사로 가문을 책임질 자는 곤살로 단 한 명뿐이었으며, 곤살로는 맏형 프란시스코를 대신해서 자신이 페루의 최고 통치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카를로스 1세는 신대륙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르는 콩키스타도르들에 대한 권한을 박탈하고자 자신이 직접 임명한 부왕을 본국에서 보내어 통치하게끔 하였다. 이는 곤살로로써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왕명이었다. 페루의 부왕으로 임명된 블라스코 누녜스 벨라(Blasco Núñez Vela)가 왕명을 선포하고, 선정착민이던 콩키스타도르들의 권한을 박탈하기 시작하자, 엔코미엔다(대농장)를 이루던 엔코미엔다로(농장주)들은 곤살로 피사로에게 한데 모여 부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국왕 카를로스1세가 자신에게 줄 페루 총독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는 소식에 화가 난 곤살로는 엔코미엔다로들의 요청을 승낙하고 군대를 이끌고 페루 부왕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약 700여명의 에스파냐인 부대를 이끌고 반란에 나선 곤살로는, 부왕 누네스 벨라가 툼베스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 아나퀴토까지 쫒아가 1547년 10월, 누네스 벨라를 살해하였다.

이를 통해 약 2년 동안 곤살로는 스스로를 페루 최고 총독으로 위임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페루에서 일어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카를로스 1세는 본국에서 곤살로와 그의 추종세력을 제압할 부왕으로 페드로 데 라스카(Pedro de Lasca)를 임명하였다. 라스카는 페루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곤살로에게 서신을 보내 직접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곤살로는 즉시 거절하였다. 곤살로가 항복을 거절하자 라스카는 엔코미엔다로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권한박탈을 일부 철회해줄 것을 권고하였고, 곤살로 파 내의 부하들을 국왕군의 무리로 끌어모았다. 이리하여 페루의 대부분의 에스파냐인들이 국왕군의 무리로 합류하였고, 이에 난처해진 곤살로는 쿠스코 인근의 하키하우아나에서 국왕군과 대적하게 되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곤살로는 대패하였고, 국왕에게 반기를 든 죄목으로 참수당함으로서 1548년 4월 11일,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12 곤살로가 행한 짓거리

곤살로가 처형당할 때까지의 짓거리들은 참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패악질적인게 많다. 곤살로는 맏형 프란시스코의 잉카 원정을 따라 공을 세우면서 스무살 초반 나이대에 최고의 부자로 자리매김하였지만, 이런 급성장은 곤살로에게 자만과 탐욕이라는 안좋은 인격형성을 주게 되었다. 맏형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자신이 추대한 꼭두각시 황제 망코 잉카를 황제로써 최대한 우대하였고, 예법에 따랐지만, 정작 쿠스코에서 공동통치자로써 망코 잉카와 함께 있었던 곤살로는 망코 잉카를 박대하였고, 황제가 아닌 인간 이하의 동물로써 취급하였다.

곤살로의 계속되는 황금 요구와, 잉카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망코 잉카에게 오줌을 갈구고 심지어는 황제의 아내를 보는 앞에서 끌고가 몸을 더듬는 추악한 행위는 곤살로가 정말로 제대로 된 인간이 맞나싶을 정도로 인간말종이란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사실 피사로 형제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망코 잉카의 대대적인 반란은 곤살로의 이러한 추악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망코 잉카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통해 피사로파와 알마그로파가 나뉘어져 에스파냐인들끼리 내전을 펼치고, 곤살로가 끔찍이 아꼈던 1살차 형 후안은 전투에서 죽음에다가, 둘째형 에르난도는 평생 감옥살이에, 맏형 프란시스코는 암살로 끝을 맺는 비극적인 결말을 곤살로 스스로가 펼치게 되었다. 이에 곤살로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반역행위를 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이게 된다.

맏형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선대 아스텍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마저 고개를 숙이고 굴복했던, 유럽 최고의 제왕이자 최강의 제국중 하나의 군주인 카를 5세에게 반역을 꾀하는 멍청한 짓을 한 것 자체도 곤살로가 얼마나 생각없는 자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이십대 초반에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최고의 벼락부자가 되어, 있지도 않는 엘 도라도의 환상에 빠져 정글에서 개고생하고, 국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로 처형되는 곤살로의 최후는 어찌보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13 여러 매체에서 곤살로 피사로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1972년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부관 페드로 데 우루수아에게 군대를 이끌고 엘도라도를 찾아오라는 총독으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 역사속 배경상 곤살로 피사로는 실존 인물인 페드로 데 우루수아의 원정 당시 ‘반역행위로 처형된’ 상태였다. 영화의 배경은 비록 실제 역사적 고증과 약간 틀린 면일지라도 영화 자체와 내용은 최고의 명작중 하나이니 한번쯤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앙투안 B 다니엘의 3권으로 이루어진 소설 ‘잉카’에서도 단연코 곤살로가 등장한다. 작품은 피사로의 잉카 정복과 그 이후 망코 잉카의 항쟁을 다루었으며, 가상의 인물인 콩퀴스타도르 가브리엘과 수수께끼의 푸른 눈의 잉카 소녀 아나마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작품내에서 잉카인들의 사회와 문화를 놀랄만큼 완벽한 고증을 이루었으며, 실제 역사적 사건을 주인공 가브리엘과 잘 매치시켜 독자들에게도 잘 전하고 있는 명작중의 명작이다.

작품에서의 곤살로 피사로는 가브리엘과 처음 대면했을 당시 ‘천사같은 얼굴’을 지닌 연악한 모습을 지닌 미소년으로 나타나지만, 잉카 정복 도중에 가브리엘과 자주 사적인 일로 다툼을 시작하며, 결국엔 얼굴에 감춰진 영악하고 잔혹한 모습을 서슴없이 보여주게 된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소설속에선 매우 착하게 나오는 1살차이 형 후안 피사로와의 우애속에 어느정도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무엇보다도, 후안을 의지하는 브라더 콤플렉스적인 면모도 보인다. 하지만 삭사이와만에서 후안이 전사하자 곤살로의 성격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형을 죽인 잉카인들을 끝까지 저주하고선, 잉카인들을 감싸고자 하는 가브리엘과 가브리엘을 돕는 아나마야를 박대하고 둘에게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된다.
  1. 16세기 역사가로써 피사로의 잉카 정복에 대한 저서를 지술했다. 페루를 직접 탐험해서 나스카 지상화에 대한 존재를 알린 사람이기도 했다
  2. 이 때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자신의 7촌이자 일찍이 아스텍 정복에 성공해 권세가가 된 에르난 코르테스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이때 코르테스는 '원주민 국왕을 생포하라'고 말했으며, 프란시스코는 이를 착실히 시행하게 된다
  3. 아타우알파는 비록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아타우알파의 행위도 그다지 썩 좋진 못했다. 일단 아타우알파는 형이자 본래 잉카 황제였던 우아스카르에게 반역을 꾀하여, 우아스카르를 포로로 붙잡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이윽고 피사로의 군대가 쳐들어와 자신을 감금하자, 아타우알파는 우아스카르가 왕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해, 자객을 보내 암살시킨다.
  4. 잉카의 사회에서 황제의 아내가 된 여성은 오로지 황제만을 섬겨야 되며, 황제가 죽더라도 그의 지어미로써 평생을 살아야 됐었다. 곤살로의 통보는 잉카 사회에서 결단코 내릴 수 없는 엄청나게 큰 파격적이고 무서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