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피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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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Pizarro y González
(1476? ~ 1541.6.26)

에스파냐콩키스타도르.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다. 공교롭게도 또 다른 유명한 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와는 7촌 친척 사이.[1][2]

신대륙 정복 활동에 참여,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그의 동료 디에고 데 알마그로를 처형한 탓[3]에 알마그로의 아들과 그 일파들에게 암살당한다.

1 잉카 원정 이전까지의 생애

곤살로 피사로 로드리게즈 데 아귈라(Gonzalo Pizarro Rodríguez de Aguilar)라는 인물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은 불명으로, 1471년 혹은 1476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죽을 때까지 문맹이었기 때문에 직접 남긴 잉카 원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의 아버지는 신사(hidalgo) 계급이었고,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해서 약간의 명성을 남긴 용병이었지만 집안 살림은 영 좋지 못했다고 한다.

피사로의 고향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에스파냐에서 가장 못 사는 동네(..)였기 때문에, 고향에서 땅이나 파서 먹고 살기 싫었던 피사로는 20살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나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중 신대륙 개척에 합류하여 한몫 잡을 생각으로 1502년 신대륙으로 향한다.

이후 1513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의 원정대에 합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목격한 유럽인 중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1519년 파나마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총독의 지시로 직접 발보아를 체포하였으며 발보아는 처형크리(...).

어쨌든 이 과정에서 공도 세우고 줄도 잘 선 피사로는 파나마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문맹에 가난뱅이였지만 어쨌거나 신사 가문 출신이었고, 본인 또한 야망과 능력, 인망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 파나마 시티는 같은 해인 1519년에 세워졌기에 당시로서는 아직 개발 중이라 사실상 밀림이나 마찬가지였던 상황. 즉, 겉으로는 그럴듯했지만 내실은 썩 좋은 게 아니었다는 것. 이 자리가 좋은 자리였다면 피사로가 굳이 머나먼 잉카까지 떠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1521년에 먼 친척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겨우 1,000명 가량의 군사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여기에 더하여 먼 남쪽 어딘가에 황금의 나라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여기에 자극받은 피사로는 동료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 등과 함께 개척회사를 설립, 남쪽 지역을 조사하고 원정하기로 한다.

2 잉카 원정

아래 내용이 작성되기 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항목이 아닌 남동생 곤살로 피사로 항목에 잉카 정복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하의 내용은 곤살로 항목에 기재된 내용과 더불어서 읽기를 추천.

2.1 명예로운 13인

당시 남아메리카 지역은 그야말로 미지의 땅으로 에스파냐의 영향력이 미치는 가장 가까운 지역이라 해봤자 2,000km 이상 떨어져있는 파나마였다. 1524년에 이뤄진 최초의 원정은 정보 부족, 식량 부족, 적대적인 원주민 등의 이유로 거지꼴로 콜롬비아 해변가를 헤매다가 대실패. 심지어 동료 알마그로는 이때 한쪽 눈을 잃고 애꾸눈이 되었다.

이 결과로 파나마 총독은 피사로의 원정을 반대하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때는 파나마가 탄생한지 5년 밖에 안 된 상황. 단 1명의 일손도 모자라는 판에 허황된 얘기로 젊은이들을 꼬셔 데려가는 것이 좋았을 리가(...)

이후 1526년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자 허가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피사로는 2차 원정에 나선다. 하지만 2차 원정의 초반 역시 1차 원정과 마찬가지 상황으로 개고생 개삽질의 연속. 급기야 사망자까지 발생하자 열이 뻗친 신임 총독은 연락대를 보내 피사로의 귀환을 종용하게 된다.

그러나 피사로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땅에 선을 긋고, "나와 함께 할 사람은 이 선 안에 남으셈!"이라고 선언, 13명이 남는다. 그리고 이들은 Trece de la Fama(명예로운 13인)이라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이 13인은 귀환을 거부하고 근처의 섬에 남아 거지꼴로 7개월을 버틴다. 그러자 파나마에서도 어쩔 수 없이 원정이 계속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지원군이 도착한다.

그리고 탐험이 계속되어, 1528년에 마침내 현재 페루 북서부 툼베스에서 우호적이고 부유한 부족과 접촉하게 된다. 피사로는 이들에게 환대받고 재물까지 받았고, 내륙에 존재하는 거대 제국에 대한 정보까지 얻게 되었다. 여기에 훗날 통역으로 맹활약(?)할 원주민 2~3명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대성공.

하지만, 파나마 총독은 그새 또 다른 인물로 바뀌었으며, 신임총독 역시 피사로의 원정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결국 피사로는 파나마 총독보다 더 좋은 끗발을 찾아 근 2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2.2 국왕의 허가

공교롭게도 이때 에르난 코르테스 역시 아즈텍 정복에 대한 보고와 사후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고국 에스파냐로 돌아와 카를로스 1세의 궁전에 머무르고 있던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피사로가 남쪽에 아즈텍만큼이나 부유한 국가가 존재한다고 보고하고, 그 증거로 각종 재물과 원주민 통역사까지 선보이니 카를로스 1세로선 그야말로 입이 절로 찢어지는 상황. 카를로스 1세는 바로 피사로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정복군의 총사령관, 미래의 신 카스티야 총독 지위를 약속한다. 여기에 더하여 250명의 군인을 모집할 권한까지 부여한다.

국왕의 허가를 받은 피사로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차피 땅이나 파먹고 살 신세였던 동생들, 에르난도 피사로후안 피사로, 곤살로 피사로를 꼬셔 함께 신대륙으로 떠난다. 이 동생들 중 에르난도는 30대의 나이로 큰형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카나리아 제도에서 뻑뻑 구른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아는 상태였으나, 나머지 동생 2명은 후안이 20살, 곤살로가 19살로 아직 어린 나이였으며 고향을 벗어나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이는 영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 결과적으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들은 잉카 원정의 막장화에 크나큰 공(..)을 세우게 된다. 둘째인 에르난도는 큰 형을 제외하면 가족 중에 유일하게 군대 경험이 있었던 탓인지, 원정 도중 동료 에스파냐인들에게도 매우 오만하게 굴었다. 에스파냐인들이 남긴 거의 모든 기록에 "에르난도 오만한 시키, 짱 시름"이라고 적혀있었을 정도. 이는 결국 동료들과의 불화를 낳게 되었고(...)이하 생략, 그리고 막내인 곤살로는 너무 좋고 싫고가 분명한 성격인데다가 어린 탓인지 참을성이 없고 분별력이 부족했다. 결국 곤살로는 잉카 반란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버린다.

한편,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처우도 훗날 문제의 불씨를 낳게 되었다. 사실 원정대에서 선봉은 피사로가 거의 도맡다시피 했고, 알마그로는 대체로 후방 지원 및 후발대 지휘를 맡았기 때문에, 피사로 입장에선 "내가 사장이고, 알마그로는 부사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때 국왕에게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알마그로에게 약속된 몫은 피사로에 비해서 현저하게 적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두 원정대의 사이에 내분에 싸이게 된다.

2.3 푸냐의 전투

1530년 연말에 피사로의 선발대가 파나마를 출발해 1531년 초 툼베스에 도착한다.

그런데 지난번과 달리 툼베스의 분위기는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알고보니 피사로가 에스파냐로 떠났던 사이, 잉카 제국 내에 내전이 발생했던 것. 툼베스 역시 내전에 엮였던 탓에 제 코가 석자라 이방인들을 환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결국 눈칫밥을 먹던 피사로는 가까운 푸냐섬으로 옮기기로 결정, 이를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이게 병크였다.

처음에 피사로 선발대는 평화롭게 푸냐섬을 접수하고 원주민들과 교류했다고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이 높아져갔다.

당시 푸냐섬 원주민들은 잉카 제국에 대한 소속감이 적은데다가 호전적이었고, 인근 툼베스 사람들과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피사로 원정대의 통역은 툼베스 인이었던 것.

결국 긴장감이 높아져 가는 상황에서 툼베스 출신 통역이 "에스파냐님들아, 지금 퓨냐족이 님들 치려고 계획 중임!"이라고 꼬바르자정보를 전하자, 그렇잖아도 자기들 인원이 200명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적어 겁에 질려있던 피사로 선발대는 선빵(...)을 날려 푸냐족 지도자 몇 명을 체포, 고문하고 툼베스로 보내버린다. 그러자 툼베스인들은 기다렸다는듯 이들을 죽여버렸다고(...).

이런 병크가 발생하자 푸냐족이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 결국 1531년 4월 경에 전투가 벌어진다.

그런데 수천명의 푸냐족을 180명의 에스파냐인들이 개발라 버린다.[4] 하지만 전투 결과와 상관없이, 선발대는 푸냐족으로 가득찬 섬 한복판에 갇혀버린 셈이 되었고, 이후로도 피사로 원정대는 게릴라에 의해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원정대의 지휘관 중 하나인 에르난도 데 소토[5]가 이끄는 후발대가 도착하자 피사로는 다시 툼베스로 귀환한다.

다만, 이 사건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에스파냐 측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푸냐 섬에 진입할 때 당한 공격으로 에스파냐 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푸냐족 족장과 원로들을 생포한 뒤, 이들을 바베큐로 만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전투라고 할만한 충돌이나, 그에 따른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몇몇 후세 사가들은, 이 푸냐의 전투(?)가 바로 다음에 일어날 아타우알파 체포 사건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아타우알파가 에스파냐인들에게 비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사실 아타우알파가 에스파냐인들과 처음으로 접촉했을 때 보인 부정적인 태도는, 다른 경우들과 비춰 봤을 때 예외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경우, 케찰코아틀의 화신으로 대접받았으며[6], 아타우알파 다음 황제인 망코 잉카 역시 피사로의 원정대를 비라코차의 화신으로 대접한 사례가 있기 때문.

3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 황제 생포와 살해

3.1 황제 아타우알파와 마주치다.

1532년 5월 툼베스로 돌아온 피사로는 이곳에서 몇 개월 보낸 뒤, 잉카 제국의 중심부까지 들어가 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2달 정도의 여정을 통해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카하마르카 부근에 다다른 피사로는, 바로 근처에 잉카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도달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놀하게 된다.

기록과 이후 행적으로 볼 때, 피사로의 원래 계획은 잉카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뒤 최대한 충돌 없이 순조롭게 잉카 제국을 접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에르난 코르테스의 케이스에서 교훈을 얻어, 좋은 부분(황제 신병 인수 뒤 이용)만 취하고 나쁜 부분(슬픔의 밤)은 버릴 심산이었다는 것. 그런데, 뜬금없이 황제 본인이 대군을 이끌고 접근 중이라니 놀랄 수 밖에(...)

사실 이때 아타우알파가 피사로의 원정대에게 온 것이 그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7] 당시 아타우알파는 형제인 우아스카르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로, 포로가 된 우아스카르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쿠스코를 향해 승리의 행군을 하던 참. 포로가 된 우아스카르는 야마 오줌을 받아 마시며(..) 자기 두 발로 직접 걸어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던 중이었기 때문에,[8] 우아스카르의 속도에 맞추어 아타우알파의 행렬의 속도 역시 매우 느리고 느긋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에 온 첫 번째 목적은 온천욕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어쨌거나 마침 푸냐에서 발생한 불쾌한 사건[9]을 들은 아타우알파는, 이 사건의 주범인 기묘한 이방인들이 근방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직접 보기 위해 에스파냐인들에게 다다렀다는 것. 여기 근처에 신기한 게 있다고? 보러 가자!

이렇게 되어 1532년 11월 5일, 에르난도 데 소토가 사자로 파견되어 에스파냐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접견한다. 이때 아타우알파는 쿨하고 시크한 태도를 보였지만, 속으로는 난생 처음 을 본 탓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소토가 허세를 부리기 위해 황제 쪽으로 말을 돌진시킨 뒤 급정지를 하는 기마술을 선보이자, 아타우알파의 친위대원들이 순간적으로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타우알파는 소토가 떠난 뒤 쿨하지 못했던 친위대 전원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문제는 이런 인상 깊은 사건까지 일어났는데도, 아타우알파가 심각한 판단 미스를 저질러 버렸다는 것. 에스파냐인들을 깔보고 특별한 호위 병력도 없이 다음날 직접 찾아가보기로 한 것이다.

한편, 예상치도 못하게 황제의 대군과 마주친 데다가 그가 직접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피사로 원정대는 잔뜩 겁에 질려 뜬눈으로 밤을 센다. 그도 그럴 것이, 잉카 군대는 수만 명은 되어 보이는데[10], 자기들은 겨우 168명[11]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3.2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 1, 아타우알파의 체포

결국 이런 우연이 역사를 바꾸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에스파냐인들의 심리 상태는 겁에 질린 나머지 손대면 톡 터질 것만 같은 봉선화 같은 상태.

아타우알파가 가마를 타고 찾아오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일행에 속해 있던 도미니코회의 발베르데 수사. 기록에 따르면 발베르데는, '레케리미엔토(Requerimiento)'를 읽어주었다고 한다. '요구', '통고'라는 뜻의 레케리미엔토는 에스파냐 국왕의 조서인데 1513년부터 원주민과 접촉 시 의무적으로 읽어주도록 되어 있었다. 이 조서의 내용은 대충 "교황님이 에스파냐의 왕에게 이 땅의 지배권을 부여하셨음! 그러니까 너님들은 에스파냐의 왕에게 복종하고 가톨릭 믿어야 함! 안 그러면 너네 전부 노예! 반항하다 죽으면 니들 책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엄청난 수행원들을 이끌고 찾아온 잉카 황제 코앞에서 절대 읽어서는 안 될 그런 내용이지만(...) 당시 정복자, 개척자들은 의무적으로 이걸 읽어줘야만 했다.[12] 장담하건데, 벌벌 떨면서 읽었을 것이다. 현대의 몇몇 역사가들은, 당시에 통역이 워낙 허접해서 아타우알파가 이걸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거라고 보고 있다. 뭐라는 거야 후비적후비적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통역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협박이 씨알이 안 먹혔는지 "에스파냐 왕의 권리"나 "싸우자" 같은 내용에는 별 관심을 안보였다고 한다. 오히려 이 조서를 읽은 뒤 수사가 "하느님 말씀이 들어있다"며 읽어 주던 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왜냐면 아타우알파는 책이나 문자를 태어나서 처음 보았기 때문.

이후 벌어진 일은(...)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성경을 빼앗아 귀를 대본 아타우알파가, "이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있다고 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네?!!"하며 땅바닥에 던져버렸다는 것. 이 이야기는 베르너 헤어초크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원주민의 선교 이야기로 써먹은 탓에 꽤 유명해졌다. 따라서 짤방으로 보고 싶다면 아귀레 항목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왜곡되었다.

다음으로는, 발베르데가 유일신을 강조하며 황제, 사파-잉카의 신성성을 인정하지 않아 화가 난 아타우알파가 책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어떤 견해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정말 아무런 의도도 없이 책을 던진 것이라고도 한다. 왜냐면 잉카의 황제는 원래 신성하기 때문. 애초에 황제가 먹다 남긴 뼈다귀조차 아랫사람들이 공손하게 집어 황금 단지에 고이 모아둘 정도였다. 따라서 이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황제는 고의로 자신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이방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책을 땅에 던졌으며,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곧 아랫사람 중 누군가가 와서 책을 집어 공손하게 다뤘을 것이라는 것.

하지만 기록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다음과 같다.

이때 발베르데 수사는 성경이 아니라 기도서, 혹은 성무일도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타우알파 입장에선, 허옇고 수염난 상거지 같은(...) 외국인이, 네모나게 생긴 이상한 것을 사르륵 펼쳐가며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지껄여대자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아타우알파는 책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보았으며, 얇고 하얀 종이를 넘긴다는 행위 자체도 신기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적힌 문자를 소리내어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보는 신기한 행위. 이에 아타우알파는 냉큼 책을 집어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을 펼쳐보는 것 자체가 난생 처음 하는 일. 따라서 책장을 넘기는 법도 몰라 쩔쩔맸고 책을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쓰다듬다가 흔들었다가.. 뭐 그런 식으로 다뤘다고 한다.[13] 그러자 발베르데가 도와주기 위해서 책을 펼쳐 넘겨주려 했다는데(...)

문제는, 아타우알파는 지고지엄한 황제이자 태양신의 대리인이라는 것.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황제가 낯선 이방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열폭했다. 자존심의 상처 + 신경질이 난 아타우알파는 발베르데의 팔을 때리고, 혼자서 책장을 넘겼지만, 아무리 봐도 알 리가(...) 어쨌든 황제는 이내 표정관리를 하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책을 자기 발 앞에 던졌다.

그리고 발베르데가 연설을 끝내자, 아타우알파는 거만한 태도로 선언했다. "난 너희들이 여기 오는 동안 저지른 병크를 알고 있음. 잡아간 족장과 재물을 내놔라. 안 그러면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겠음!"

그런 뒤 황제는 가마 위에 우똑 서서 휘하 전사들에게 전쟁을 시작한다고 소리쳤다.나는 관대하다

그러니까, 책을 던진 일은 분명히 일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게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기보다, 황제가 보인 부정적인 태도가 문제였다는 것. 사실 잉카 쪽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아타우알파가 "전쟁 시작"을 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에스파냐인들이 아타우알파한테 책임을 돌리려고 기록에 껴놓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하게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던 콩키스타도르들에게 제대로 된 친위 병력도 없이 제발로 찾아간 아타우알파는, 그들 앞에서 책을 집어 던졌고, 이어서 그들 눈에 협박으로 보이는 행동(앞에서 언급한 소리지르기(...)라던지)을 했다는 것.

이는 그야말로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특히나 황제 바로 앞에 서서 극도의 긴장 상태로 상황을 지켜보던 발베르데의 정신줄이 끊어져 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매우 흥분하고 겁이 난 발베르데가 에스파냐측 진영으로 도망치며 "저놈들을 공격해라! 하느님을 거부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자기네들이 봐도 병맛돋는 리케리미엔토를 원주민 황제 코앞에서 읽어줘야 했고 그나마 도와주려고 했던 행동들조차 저지당했으며 황제가 막 책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치니 인간적으로 공포감을 이길 수 없었던 것. 이에 어쩔줄 모르던 피사로가 반대편에 숨어있던 포병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리고 곧바로 WAAAGH!! 몰려나와 몸싸움을 벌이고, 황제를 생포하고, 잉카인들을 향해 냅다 대포를 쏘아버리고, 기병이 돌진하여 잉카인들의 모가지를 댕강댕강!Esto es España!

이런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 잉카인들은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한 채 겁에 질려 도망치다가 대규모로 학살당했다. 즉 이 사건은 본격적인 전투가 아니라, 극도의 흥분 상태였던 에스파냐인들이 돌발적인 상황으로 폭발,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잉카인들을 도륙한 것.

이 사건으로 결국 아타우알파는 어처구니 없이 피사로 원정대에게 생포되었으며, 2천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잉카인들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에스파냐 측의 피해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0명(..)에서 최대 5명 정도.

<잉카 제국의 최후>를 쓴 저널리스트 킴 매쿼리에 따르면 다친 사람은 1명, 그것도 바로 피사로 였다고 한다. 그런데 피사로가 다친 것도 잉카인의 공격이 아닌 자신의 부하 때문이였다고 한다. 싸우느라 정신없던 에스파냐 보병이 중요한 인질인 아타우알파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는 것을 피사로가 제지하려다 손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때 수많은 잉카 고위 귀족들이 한순간에 갈려나갔다고 한다. 황제의 가마를 메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고 고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고위 귀족인 가마꾼들은 팔이 잘려나가더라도 가마를 붙잡고 있었고, 가마꾼들이 죽으면 다른 귀족들이 달려와 가마를 멨다고 한다. 물론 전부 다 끔살(...) 또, 사망자 중 많은 수는 도망치려다가 넘어져 깔려 죽었다고 한다.

책 좀 집어던졌다고 광란의 대학살이 벌어졌고, 잘나가던 잉카 제국이 멸망의 첫걸음을 떼게 된(...) 이 사건이 바로 아타우알파의 체포(Captura de Atahualpa) 혹은, 카하마르카 전투(Batalla de Cajamarca)라고 후세에 알려진 그 유명한 사건이다.

3.3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 2, 아타우알파 살해

아타우알파는 그야말로 인생의 절정에서 순식간에 나락에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상황이 정리되자 피사로는 황제를 안심시킨다. 휴우 살았다 아 맞다 우리 황제 잡았지 첫째, 전쟁에 지고 포로로 잡혔다고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말 것(너 안 죽일 거고 어느 정도 대우해주겠다). 둘째, 툼베스를 비롯 저멀리 아즈텍이나 파나마에서 우리에게 복종하고 충성한 사람들은 다 자유롭게 풀려났다.(너도 내 말만 잘 들으면 된다). 셋째, 우리는 평화적으로 만나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집어던지며 거부했다(싸움이 일어난 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네 잘못!). 어찌보면 사실이잖아 아타우알파도 이번에는 용케(...)도 속뜻을 전부 알아들었는지,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은 휘하 장군들이 잘못된 간언을 했기 때문인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이미 일전의 전투에서 전부 죽었다고(...) 대답했으며, 살아남은 잉카인들에게 명을 내려 더 이상 도망치거나 당황하지 말고 계속 황제를 따르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서 피사로는 한숨 돌리게 된 셈이었다. 피사로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식민지 건설 및 본인이 그곳의 총독이 되는 것이기에 피사로로선 잉카의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를 최대한 옆에 끼고 있어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식민지 건설이 가능했기 때문에 황제를 죽인다거나 잉카에 대해 정복전쟁을 벌인다거나 할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피사로가 미친놈이 아닌 이상 200명으로 거대 제국을 정복할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코르테스는 그나마 휘하 병력이 천 단위인데다 틀락스칼라라는 든든한 동맹 원주민 세력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피사로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달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차근차근 공을 들여 잉카의 통치체제를 에스파냐에 흡수하는 일 뿐일 리가 있나(...). 곧바로 아타우알파는 이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이방인들의 약점을 알아차렸다. 바로 에 대한 끝없는 탐욕. 그리고 이 탐욕스러운 침략자들에게 그 유명한 제안을 한다.바로 자기가 잡혀있던 방의 부피만큼 금과 은을 줄 테니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타우알파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으나, 이 제안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게 된다. 어차피 피사로는 재물과 상관없이 황제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꿈도 희망도 잃은 것은 아타우알파 본인. 어쨌든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 버려 아타우알파는 살해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에스파냐인들의 탐욕이 너무 커서 더 많은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 아타우알파를 죽였다거나, 욕심을 채워 쓸모가 없어져 죽인 것은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살아있는 ATM을 죽일 리가 없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복잡한 내막이 있었다.

처음에 아타우알파의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포된 이후에도 잉카인들 앞에선 냉정하고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시종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고 하며, 매일같이 만찬을 열어 에스파냐인들과 함께 식사했다고 한다. 참고로 잉카는 아즈텍과 달리 인육에 환장할 필요는 없었다. 야마고기가 있었기 때문.

아타우알파는 에스파냐인들의 앞에선 황제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매우 활기차고 다정하게 굴었다고 하는데, 특히 에르난도 데 소토와 피사로 가문의 둘째 에르난도 피사로와 친해져, 체스를 두는 법을 배워 몇 시간씩 같이 두었다고 한다. 에스파냐인들의 기록 또한 호의적이어서 황제는 매우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책 던지고 잔뜩 쫄아있는 포병대 앞에서 소리질러서 문제지

문제는 막대한 양의 재화를 수집하고 분배하다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아타우알파 입장에선, 쿠스코 입성을 앞두고 인질로 잡혀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 못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좀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또, 피사로 입장에선 운 좋게 황제를 생포하긴 했으나 선발대 인원이 너무 적어 쿠스코에 입성하기엔 불안한 상황. 그렇다고 툼베스까지 황제를 끌고 갈 수도 없었던 게, 그렇게 되면 황금을 수집해서 운반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된다는 것.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에 피사로의 구원 요청 + 황제 생포라는 희소식을 들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서둘러 후발대를 이끌고 도착했는데, 이는 아타우알파의 사망을 낳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버렸다. 왜냐면 후발대는 아타우알파 체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산 분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 알마그로 일행 250명의 입장에선 바로 코앞에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가 존재하는데 늦게 왔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갖다 대지 못하게 되었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에스파냐인들 사이에 질투와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알마그로 일행은 피사로의 의견에 일단 이의 있음부터 외치게 되었고 피사로의 ATM기였던 아타우알파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는 사이 잉카의 재물이 다 모였다. 그리고 피사로의 원정대가 이것들을 처리한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악명 높다. 전부 용광로에 넣고 녹여버렸다.그리고 많은 학자들과 페루 문화재청은 오늘날까지 이를 갈고 있다. 사실 피사로가 다른 문명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야만인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였던것 같다. 단지 휘하의 장병들에게 재물을 정확하게 분배하기 위해서였던 것. 기록에 따르면 기병 1인당 은 82kg와 금 41kg, 보병들에겐 그 절반이 분배되었다. 이를 2014년 기준 시세로 계산하면, 기병 1인당 18억, 보병 1인당 9억원 정도 받은 셈. 물론 16세기 시세로는(...)ㄷㄷㄷ. 그냥 전원 다 로또 1등 당첨된 셈이나 마찬가지. 피사로의 경우 기병의 일곱 배를 받았으며, 아타우알파에게서 보너스로 80kg짜리 황금 가마까지 선물 받았다고 한다. 30살 넘을 때까지 무명이었던 야구선수가 1년 반짝 활약해서 역대 최고액 FA 대박에 보너스로 람보르기니까지 받은 셈. 한편, 카를로스 1세는 도장 한번 잘 찍어준 덕분에 금 1톤(..)과 은 2톤을 받았다. 오늘날 페루, 칠레, 에콰도르, 볼리비아에 달하는 무지막지하게 방대한 영토도 얻게 된 사실은 일단 제쳐두자. 그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니.

그런데 아타우알파는 절망한다. 금을 다 모았는데도 풀려날 낌새는커녕 새로운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한데다가, 이들은 자기들이 재물분배에서 제외되었다며 흉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상태. 게다가 이 무렵 아타우알파는 대화를 통해 피사로의 진짜 속셈까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피사로가 어느 잉카 귀족에게 무심결에 "각 족장마다 에스파냐인을 한 명씩 붙여서 제국을 통치할 계획"이라고 털어놓은 것.

게다가 하필이면 피사로 집안의 둘째인 에르난도 피사로가 에스파냐로 돌아간다. 국왕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추가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피사로와 알마그로 간의 분쟁도 조정하기 위했던 것. 에스파냐인들 중에서 가장 친했던 에르난도가 떠난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아타우알파는 울음을 터뜨렸으며 에르난도가 떠나게되면 알마그로 무리가 자신을 죽일거라고 외쳤다고 한다. 에르난도 본인도 몇 년 뒤 국왕에게 "신변의 위험을 느낀 아타우알파가 차라리 에스파냐로 함께 데려가달라"고 사정했다고 보고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이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런 의심을 주변인들에게 숨기지 않고 전했다. 이로 인해서 급기야 아타우알파가 비밀리에 휘하 장군들에게 전갈을 보냈으며, 이들이 카하마르카를 향해 행군 중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게 되었다.

당연히 에스파냐인들은 또다시 심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에르난도 데 소토가 기병 몇 명을 이끌고 정찰을 위해 떠나는데(...) 소토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니카라과에서 데려온 원주민이 달려와 도시 주변에서 잉카군을 목격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멘붕 상태가 된 에스파냐인들은 긴급 회의를 열었으며, 격론 끝에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이때, 피사로는 황제를 살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처형에 반대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강력하게 처형을 주장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동의. 자신이 처형된다는 것을 알게 된 아타우알파는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엉엉 울면서 이들의 뒤통수를 친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으며 금과 은을 두 배로 주겠다고 제의하지만, 이미 에스파냐인들은 의심암귀에 들린 상태.

결국 1533년 7월 25일, 아타우알파는 억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14] 교살된 뒤 시신은 화장된다. 죄목은 근친상간[15], 일부다처제[16], 우상숭배였다.

기록에 따르면 피사로는 매우 안타까운 나머지 흐느꼈다고 한다. 누가 봐도 이 어이없는 상황의 전개를 보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그런데 아타우알파가 죽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온다는 잉카 대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원주민:"훼이크다 이 흰둥이들아" 게다가 에르난도 데 소토가 정찰을 마친 뒤 귀환하여 '잉카군은 없.다.'라고 보고하며 확인사살. 피사로는 또 한 차례 흐느껴 울었으며, 황제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소토는 그야말로 격분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소토는 에르난도 피사로와 더불어 황제와 가장 친하게 지냈었기 때문. 이때 소토 역시 에르난도 피사로가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차라리 황제를 에스파냐로 보내버리지 왜 죽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소토나 에르난도 피사로 둘 중 한 사람만 현장에 있었어도 아타우알파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학살자에 식민주의자로 악명 높은 피사로지만(...) 그래도 눈곱만큼이라도 남아있는 피사로의 명예를 위해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당시 상황은 원정대에 참여했던 여러 에스파냐인들의 기록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내용이다. 피사로가 황제의 처형을 반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1969년작 영화 <태양제국의 멸망>에서는, 한 가지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피사로는 하류층 출신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했으며, 신앙을 강요하는 성직자들에 대항해 아타우알파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것. 하지만,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들은 성직자가 아닌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왕실 회계사인 알론소 리켈메였으니 이는 약간 무리한 해석.[17]

4 쿠스코에 입성하고, 망코 잉카가 새 황제가 되다

자기 손으로 황금알 낳는 거위를 잡은 셈이 된 피사로는, 그의 형제인 투팍 우알파를 새로운 황제로 세운다. 하지만 투팍 우알파는 스트레스 탓인지 유럽인들에게 얻은 질병 탓인지 황위에 오른 지 겨우 2달만에 사망하고 만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 3개월의 여정 끝에[18] 쿠스코에 다다른 피사로 원정대는, 쿠스코 인근에서 아타우알파의 동생인 17살짜리 망코 잉카를 만나게 된다.한국인이라면 왠지 달콤하게 느낄 이름이다. 일본인이라면 왠지 얼버무릴 이름이기도 하다.

한편 망코 잉카 입장에서는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원래 아타우알파는 잉카의 북부 키토를 기반으로 황제 자리를 찬탈한 까닭에 쿠스코 쪽 귀족들에게는 원수나 마찬가지였던 것. 망코 잉카 역시 아타우알파의 마수를 피해 숨어다니던 도망자 신세였으며, 아타우알파에게 체포되었다면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상태였다.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던 피사로와 망코 잉카는 손을 잡는다. 피사로가 구 아타우알파 세력을 쿠스코에서 몰아내어 점령하고, 망코 잉카는 새로운 잉카 제국의 황제가 되기로 한 것.

쿠스코에는 아타우알파의 장군이었던 키스키스(Quizquiz 혹은 Quisquis)가 남아있었고 쿠스코 외곽에서 전투가 발생하여 하루 정도 침략자들의 입성을 저지하긴 했으나, 평지에서 에스파냐군을 상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깨달은 키스키스는 키토로 후퇴한다.

1533년 11월 중순, 마침내 피사로의 원정대는 쿠스코에 입성했으며, 망코 잉카는 새 황제로 등극한다.

목숨이 달랑달랑했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망코 잉카로서는 그야말로 인생역전. 에스파냐인들을 케찰코아틀의 잉카 버전인 비라코챠로 대우했으며,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가 뿌린 것보다 더 많은 재물을 자진해서 원정대에게 뿌렸다고 한다. 그동안 손가락만 빨던 알마그로 일행도 이번에는 제대로 챙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알마그로는 신이 났는지 아타우알파와 때와는 달리 망코 잉카와는 친구를 먹었다.

이후 1535년 중반까지 1년 반 동안 모두에게 바쁜 시간이 흘러갔다. 망코 잉카와 피사로는 제국의 통치체계를 정돈하고 아타우알파 세력을 진압했다. 몇 차례 원정 끝에 키스키스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1535년 사망했고 키토는 1536년 경 완전히 정복되었다. 망코 잉카는 제국의 행정체계를 복구했으며 알마그로의 힘을 빌려 반대세력이었던 이복형제 아톡 소파를 암살했다. 피사로 원정대 중 잉카에 남기로 한 사람들에겐 '엥코미엔다(encomienda)'[19]가 수여되었다. 그리고 피사로는 쿠스코를 떠나 툼베스 해변에 신도시 리마를 건설하기 시작한다.[20]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피사로의 세력과 알마그로의 세력 간의 불화는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프로도계속되었다는 것. 게다가 알마그로는 어느 샌가 망코 잉카에게 붙어먹었다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는 본국에서 온 연락 때문. 에르난도 피사로를 통해 원정대의 불화를 전해들은 카를로스 1세가 잉카를 둘로 나눠서 피사로에게 북쪽, 알마그로에게 남쪽을 맡기기로 했다는 것. 이 결정으로 알마그로는 국왕에 의해 피사로와 동급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피사로의 동생들은 이에 크게 반발한다. 급기야는 쿠스코에서 정복자들 사이에 가벼운 내전까지 발생했다!

결국 리마에서 이런 한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피사로가 직접 중재에 나선다. 일단 쿠스코 통치권은 제쳐두기로 하고 알마그로에게 아직 정복하지 않은 잉카 남쪽의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남방 원정대를 조직, 지원해주기로 한 것. 그리고 여기에 혹한 알마그로는 원정대를 이끌고 미지의 남쪽으로 떠난다. 그리고 이 무렵에 알마그로의 지지자로 돌아섰던 에르난도 데 소토는 아예 파나마로 돌아가 잉카에서 얻은 재물을 바탕으로 새로운 원정대를 조직하여 북아메리카로 떠나버린다.그리고 거지꼴로 북미의 미시시피 강변에서 죽게 된다.

이렇게 해서 상황은 대충 정리되었다. 아타우알파의 세력 및 내전을 틈타 불순한 태도를 보인 부족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망코 잉카는 황제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혔다. 에스파냐인들 사이의 갈등은 알마그로가 남쪽으로 떠나자 대충 봉합되었다. 피사로는 이제 더 이상 신경 쓸 일 없이 리마 건설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으며, 쿠스코의 망코 잉카 곁에는 피사로의 동생들인 후안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가 남게 된다.

여러가지 병크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해피 엔딩(...) ...이었을 리가 없었다!!

5 곤잘로의 초초초대형 병크와 망코 잉카의 탈출

잉카 제국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아니라 곤살로 피사로가 멸망시켰다.
역사를 바꾼 네토라레 오줌도 한몫했다

피사로 가문의 막내였던 곤살로 피사로는 쿠스코에 남은 1535년 당시 만 25살이었다. 형제 중에선 가장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적었다. 그와 함께 쿠스코에 남은 후안 역시 곤살로보다 1살 많을 뿐이기에 경험 없기는 마찬가지.

이런 애송이들에게 잉카 황제를 맡긴 것은 그야말로 실수 중의 대실수였다. 사실 원정대의 고참급 지휘관들은 북아메리카며 칠레며 리마며 뿔뿔이 흩어진 까닭에 피사로로선 자기 동생들 외엔 딱히 믿을 만한 사람도 없긴 했지만(...) 어차피 둘째 동생인 에르난도[21]가 본국에서 돌아오는 즉시 쿠스코로 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이들을 믿고 맡기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안과 곤살로는 그새를 못 참고 일을 저질러버렸다.

알마그로, 소토 같은 고참급 인물들이 떠나고, 큰형은 머나먼 리마에 머물러 있는 탓에 이들을 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밤낮으로 망코잉카를 쥐어짜 재물을 뜯어낸 것은 그렇다치고, 여자란 여자는 다 건드리고 다니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22]

이 와중에도 망코 잉카는 여전히 이들을 비라코챠로 대우했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결국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한다. 곤살로가 황제의 여동생이자 황후코야 오크요(Cura Ocllo)를 탐내기 시작한 것.[23][24]

황후를 NTR당할 막장사태에 직면한 망코 잉카는, 곤살로에게 미녀를 있는데로 다 갖다 바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는 다른 여동생인 잉힐(Inghil)을 황후로 속여 바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처음에 속아넘어간 곤살로는 잉카인들이 보거나 말거나 잉힐을 주물럭거리며(...) 끌고 가 쿵떡쿵떡을 했지만 신방을 차렸지만, 애초에 서로 다른 사람을 갖고 끝까지 속이는 것은 무리. 얼마 지나지 않아 곤살로에게 들켰으며, 열받은 곤살로는 강제로 코야 오크요를 납치한다.(...) 이렇게 해서 은근슬쩍 자매덮밥이 이뤄졌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망코 잉카는 이 무례하고 탐욕스러운 침략자들에게 맞서 저항을 하기로 결심, 영토 각지에 전갈을 보내어 궐기를 준비하고 쿠스코를 탈출...

...하려는데, 결국 후안과 곤살로에게 발각되어 체포된뒤에 감금된다. 이때 곤살로는 또 한 차례 초대형 병크를 저지르는데, 망코 잉카를 족쇄와 사슬로 묶고 망코 잉카의 몸 위로 오줌을 갈겼다. 당연하지만, 코야 오크요를 비롯 망코 잉카의 모든 부인은 이 시점에서 후안과 곤살로에게 끌려가 몸으로 시중을 들었고(...), 또 한 차례 막대한 재물을 뜯어냈다.

결국 망코 잉카는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란을 일으키기로 굳게 결심했으며, 소문을 들은 잉카 제국 전역에선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쿠스코 외곽에서는 일부 원주민들이 몇 명의 에스파냐인들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런 와중인 1536년 2월, 마침내 본국에서 돌아온 피사로 가문의 둘째 에르난도가 쿠스코에 도착했다. 에르난도는 도착 즉시 동생들이 저지른 초대형 병크의 수습에 나섰는데, 망코 잉카는 즉시 풀려났고, 에르난도는 그에게 일전의 유감스러운 일들에 대해 사과했으며, 다시 황제로서의 대우를 하였다. 물론 NTR 당했던 황제의 부인들도 모두 풀려났다.

아타우알파를 대한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에르난도는 잉카 황제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에르난도 개인의 판단뿐 아니라 본국의 카를로스 1세 또한 비슷한 판단을 내린 상태였던 것. 카를로스1세는 제대로 된 개척과 안정을 위해 망코잉카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망코잉카를 주권국의 황제로 대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망코잉카는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황후는 NTR을 당해버렸고 곤살로는 황제에게 오줌을 갈겼다.

결국 망코 잉카는, 에르난도의 호의를 이용하여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겠다는 핑계로 쿠스코를 탈출한다.

6 잉카, 정복자들에 맞서 싸우다

이렇게 해서 잉카 제국은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에 맞서 최초이자 최후의 전면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전쟁은 에스파냐의 잉카 정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잉카는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기 때문.

7 쿠스코 포위전 Sitio del Cuzco

결국 1537년 6월, 쿠스코 포위전 혹은 쿠스코 공성전(Sitio del Cuzco, Cerco del Cuzco)으로 알려진 전투가 일어나게 된다.

쿠스코를 빠져나온 망코 잉카는 잉카인들에게 "에스파냐인들을 비라코챠로 생각했으나 그건 내 실수였다."고 선언했으며, 마누라를 빼앗겼던 것과 오줌 세례를 받은 사건도 낱낱이 고한다. 당연히 잉카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기세가 되었으며, 추정치 약 10~20만 대군이 조직되어, 쿠스코를 포위한다.

이때 쿠스코에 남아있던 에스파냐인들의 숫자는 기록에 따르면 정확하게 196명. 다만 흑인 노예와 중앙아메리카에서 데려온 하인들이 존재했으며, 3~5백명으로 추정되는 에스파냐 정복자 세력을 지지하는 잉카 원주민들[25] 이 있었다. 다만, 하인이나 원주민 지지자들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에스파냐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병참, 보급, 도로 건설, 구호 활동 같은 보조 임무를 맡았다. 이들에겐 갑옷과 무기가 없었을테니 당연한 일.[26]이 압도적인 병력차이에 이제 에스파냐인들의 운명은 아 망했어요(...)

..가 아니었다. 잉카인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고, 침략자들에 맞서 봉기한 행위는 분명 정당한 선택이었으나, 군사적으로 따져봤을 때 이 포위전은 명백한 실수였다. 이것을 모 게임에 비유하자면, 완전무장한 공성전차 1개 중대에게 창칼로 무장한 저글링 10만 마리가 한데모여 덤벼든 셈이었으니(...).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당시로서는 거의 최신식 병기라고 할수 있는 철제 무기와 투구 및 갑옷으로 무장했으며 대포, 총기까지 갖춘 상태였던 반면에, 잉카인들은 전통적인 직물 소재의 갑옷에 흑요석 무기로 무장한 알보병으로 병력이 구성되어 있었다. 궁병이 있기는 했으나, 저 멀리 아마존 유역에서 불러모은 부족민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잉카인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투석[27]투창, 화공으로 대항했으나, 병기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잉카의 병기로는 에스파냐인들의 튼튼한 철제 갑옷과 투구를 뚫을수 없었다. 손이나 목처럼 일부 노출된 부위에 맞추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러 맞추기엔 드러난 면적이 너무 작았고, 맞추더라도 붓거나 멍들지언정 무력화 시키기는 힘들었다는 게 문제.

정황상 이 시점에서 잉카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 전술은, 게릴라전이어야 했다. 잉카 제국은 험한 산지로 가득찬 광대한 곳이다. 영토 곳곳을 요새화하고, 정복을 위해서 파견된 에스파냐군이 진형을 갖추지 않고 이동 중일때 험악한 지형을 이용하여 하나씩 각개격파 한다(...) ..그러나 이 전술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망코 잉카는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알마그로와 함께 키토의 반군을 잡기 위해 나섰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인들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략적 선택, 어택땅 공격을 시전한 것은 대실수였다.

결국 대전투가 벌어졌으나 190명의 정예 콩키스타도르들은 최소 10만에서 최대 20만 병력의 잉카 대군을 막아냈다. 잉카인들은 공성 전차에 돌격하는 저글링들처럼 녹아내렸으며, 에스파냐인들은 리얼 진삼국무쌍을 찍었다(...).

그렇다고 콩키스타도르들에게 이 전투가 쉬웠다는 것은 절대 아니였던듯 하다. 별의별 기록을 다남긴 에스파냐인들답지 않게 사상자 수는 기록하지 않아 불분명하긴 하나, 에스파냐 측의 피해도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 쿠스코는 무려 10개월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던 상태였다.

8 삭사이와만 공략전

포위가 시작되자 쿠스코의 정복자들은 반에스파냐 봉기세력이 점거하고 있는 쿠스코의 방위 요새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28]을 점령하기로 한다. 삭사이와만 요새는 쿠스코 공략 및 방어에 있어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이었기 때문.

공략 첫날 피사로 가문의 셋째인 후안 피사로는 수비대의 투석에 턱을 맞는다. 다음날에는 턱이 너무 부은 탓에 투구를 쓸 수가 없어서 결국 맨 머리로 전장에 나섰다가 머리에 투석을 맞아 두개골을 골절 당한다. 그리고 결국 그 부상으로 후안은 3일 후에 사망했다.[29]

이 공략전은 처절하기 그지없었기에, 후안 피사로 외에도 숱한 전사자가 발생했다. 어떤 에스파냐인 병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이라는 기록까지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번 전투에서는 인질이나 몸값같은 제약이 전혀 없는 상황인데다가, 이 요새의 중요성을 양측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정사정없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에스파냐측의 기록에 따르면, 잉카인 3,000명이 전사했으며 요새 주위는 시체로 가득했다고 한다. 잉카 쪽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남은 잉카인들 대다수가 투신자살을 택했으며,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잉카의 어느 지휘관은 화살을 2대나 맞은 상태에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투신자살을 택했다고 한다.[30] 한편, 에스파냐 측의 피해는 후안을 포함하여 전사자 4명(...). 다만, 이 요새를 점령하기 전에 정찰 등에 나섰다가 사망한 이들이 30명 정도라고 한다.

어쨌든 정복자들을 결국 삭사이와만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방어에 필요한 전초기지를 얻었고, 이는 쿠스코 포위전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9 키소 유판키Quizu Yupanqui의 활약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리마에서 발이 묶여 애만 태우고 있었다.

피사로는 처음에 쿠스코의 막장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리마를 건설하며 행복한 노후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쿠스코 포위전이 시작되기 이틀 전에 망코 잉카의 탈출과 대규모 반란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고 쿠스코와의 연락은 두절된다.

망코 잉카의 봉기를 듣기 전까지, 피사로는 잉카 원정은 이미 끝났다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원 요청을 하는 편지에 본인이 직접 "노년에 이런 시련이 닥칠 줄은 몰랐다" "평생에 걸친 업적이 물거품이 될 위기다"라고 적었기 때문.

어쨌거나 피사로는 즉각 가장 가까운곳에 위치한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파나마에 헬프를 날렸지만, 당시의 교통 사정상 구원병이 도착하는 것은 수개월 뒤에나 가능한 상황. 때문에 피사로는 일단 리마 주둔병 중에서 구원부대를 편성하여 쿠스코와 인근의 에스파냐군 주둔지역으로 파견하는데(...)

하지만 이 구원부대는 모두 중간에서 갈려 나간다.

망코 잉카의 명령으로 키소 유판키(Quizu Yupanqui) 장군이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카 북부로 파견되었던 것. 특히 유판키는 기병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어 대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계곡 위에 매복하여 이동 중인 에스파냐 기병대에게 바위를 굴려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한 것. 이 단순호쾌한 방식으로 리마에서 출발하였던 구원부대는 거의 전원이 몰살당했다. 사실 험한 지형으로 기병의 발을 묶고 갈아버린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수도 없이 등장한 아주 기초적인 전술이지만, 말이라는 것 자체를 경험해보지 못한 잉카인들이 이를 이용해먹었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 이렇게 인류의 전투력이 또 한 차례 입증되었다. 이렇게 삭제된 에스파냐군은 무려 200명. 당시 쿠스코와 리마, 그 인근의 주둔한 에스파냐의 총 병력은 500명 수준이었으므로, 이 것이 에스파냐 측에 얼마나 큰 피해였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판키는 동쪽에 있는 하우하(Jauja)를 야습해 이곳에 머무르고 있던 에스파냐인 엥코미엔다르[31] 수십 명을 살해했다. 그동안 쌓인 원한이 깊었던 탓에 붙잡힌 이들은 하루 종일에 걸쳐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오체분시당했다고 하며, 흑인 노예들과 말들도 몽땅 끔살. 하지만 이 중에 한 사람이 간신히 리마로의 탈출에 성공하고 파견했던 구원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부대가 자초지종이 담긴 전갈을 보냄으로써, 피사로는 유판키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더 이상 쿠스코에 구원대를 보내어 몰살당하게 하는 삽질을 피할 수가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이 시점에서 피사로는 그야말로 절망. 아마 모든 것을 잃고 죽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0 오얀타이탐보 전투 Batalla de Ollantaytambo

쿠스코 역시 절망적인 상황은 마찬가지. 구원지원 없이 고립된 것은 둘째 치고 리마에서 어떤 소식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

이와 반대로 망코 잉카는 유판키의 승전소식과 전리품을 받고 큰 기쁨에 싸인다. 그래서 이 전리품들을 쿠스코의 에스파냐인들에게 자랑삼아 던져 주기로 하는데(...) 문제는 이 전리품들이 바로 에스파냐인들의 머리와 조각조각 찢어진 편지였던 것.

에스파냐인들의 대가리는 일단 그렇다치고(...) 편지는 엄청난 실수였다. 이 편지는 사실 리마에서 고립되어있는 쿠스코의 병력에게 보내는 전갈이였고, 쿠스코의 수비병들은 이 조각난 편지들을 한데 모아서 복원해낸다. 이렇게 해서 리마에서 보낸 전갈, "우리는 상황을 알고 있음. 구원병력도 계속해서 보낼 것임. 아, 참고로 요새 본국에서는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더라" 등의 내용을 읽고 쿠스코의 에스파냐인들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잉카인들은 문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찢어진 조각들을 모아서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저지른 병크였던 것(...).

어쨌든 여건이 불리함을 알게 된 피사로 가문의 둘째이자 쿠스코 수비대의 총 지휘관인 에르난도 피사로는 단 한 번의 도박으로 전황을 뒤집기로 한다. 쿠스코에서 50km 떨어진 망코 잉카의 본영, 오얀타이탐보를 습격해 망코 잉카를 생포하기로 한 것. 1537년 1월의 일이었다.

하지만 잉카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본진 방어를 게을리할 리가 없었으며 오얀타이탐보의 한 계곡에서 3만 명의 수비대가 에르난도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수비대에는 아마존에서 불러온 정예 궁병까지 존재했던 데다가, 싸움이 벌어진 곳은 찰랑찰랑 물이 흐르는 기병들에게 불리한 지형이었다. 심지어 잉카인들은 둑을 터뜨려 기마대의 기동력을 방해하는, 을지문덕스러운 작전까지 구사했다

결국 에르난도 부대는 숱한 사상자를 내고 쿠스코로 철수한다. 이것이 오얀타이탐보 전투(Batalla de Ollantaytambo)이다.

다만,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대부분의 견해는 "에스파냐 측의 확실한 패배"라는 것.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에스파냐인들은 다시 두더지처럼 요새에 처박힌 신세가 되었으며, 잉카인들과 망코 잉카의 사기는 하늘을 찔러 쿠스코에 대한 공세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에스파냐인들이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전쟁에는 이겼다"라는 견해도 있다. 일단 이번 전투에서도 잉카인들의 피해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승리에 고무된 탓인지 망코 잉카가 바로 아래에서 언급될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11 리마 포위전Cerco de Lima

오얀타이탐보 전투의 승리 이후, 망코 잉카는 유판키에게 전갈을 보낸다. 리마를 공격하고 침략자들을 갈아버리라는 것. 단, 피사로는 가급적이면 생포하라는 명령도 덧붙였다고 한다.

망코 잉카가 대체 왜 이러한 시점에서 리마에 대한 공격을 명했는지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은 유판키의 활약과 오얀타이탐보 전투의 승리 덕분에 그냥 들뜬 상태여서 그랬다고 보고 있다.

사실 전략적으로 따져봤을 때 리마 공격은 나쁜 선택이 아니다. 에스파냐인들의 진출기지이자 본거지인 리마만 없다면 잉카 제국 내의 모든 에스파냐인들은 고립되는 신세가 되며, 쿠스코 역시 끝장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 문제는, 현실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있냐는 것.

그동안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단순히 보급선을 끊어먹기에 치중한 것으로 볼 때, 유판키는 리마 점령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을 것이라고 몇몇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어쨌거나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이상,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 유판키는 리마를 포위하기 위해 나선다. 기록에 따르면, 리마를 포위한지 6일 째가 되었을 때 유판키는, "오늘 리마를 점령하거나, 아니면 싸우다 죽기로 했음. 오늘 밤엔 리마로 들어가 에스파냐인들을 다 죽일 것임. 에스파냐 여인들은 다 나눠가져서 힘세고 튼튼한 전사들을 낳는데 쓸 것. 내가 죽으면 너네도 죽고, 내가 도망치면 너네도 도망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이라고 부하들에게 연설한 뒤 총공세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리마에 주둔중이던 에스파냐 병력은 약 100명, 잉카군은 4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문제가 2가지 있었다.

첫째, 에스파냐인들에게는 잉카인 동맹군이 있었다. 아타우알파는 인질이었던 시절, 피사로에게 싸바싸바하기 위해 자기 여동생인 키스페 시사(Quispe Sisa)를 시집보냈는데,[32] 이 여자의 빽이 꽤나 든든했던 것. 키스페 시사와 아타우알파의 어머니인 파차 투치셀라(Paccha Duchicela)는 전 황제의 부인이자, 잉카 통일 이전 존재했던 키토 왕국의 공주이자 왕위 계승자였으며, 이때 당시 어딘가의(..)[33] 지도자[34]였던 것. 장모님의 사랑(?)은 그지없어서 사위에게 2만명의 원군을 보내주셨다.[35]

둘째, 잉카인들은 전투 시에 총지휘관이 최전방에 나서는 관습이 있었다. 지휘관은 가마를 탔기 때문에, 잉카인들끼리의 싸움이라면 이들을 죽이는 게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차피 잉카인들의 무기가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 그러나 이번 상대는 에스파냐인들이었고 때문에 가마건 뭐건 그냥 쏴버려! 일점사로 장렬하게 순삭전사. 기록에 따르면, 에스파냐인들은 그냥 맨 앞에 나서는 놈을 죽였더니 그게 바로 장군이었다고(...).

이렇게 해서 잉카군은 패배했다.(...) 이는 단순히 한 전투에서의 패배로만 끝난게 아니라, 리마와 쿠스코 사이에서 호랑이처럼 굳건히 버티던 유판키 군이 사라지면서 다시 리마–쿠스코가 연결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잉카인들에게 다행인 것은 리마와 쿠스코 간의 거리가 워낙 먼데다가 리마에 주둔중인 에스파냐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어, 단기간 내에 리마에서 쿠스코를 지원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 전투 이후 4개월이 더 지날 시점까지 쿠스코 포위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포위가 풀리기 전에 리마에서 구원병력이 출발하게된다. 그리고 워낙에 거리가 멀었던 탓에 포위가 풀리기 전까지 도착하지는 못하였다.

12 알마그로의 귀환

잉카와 에스파냐 정복자들간의 전쟁이 일어난 지 10개월이 지난 1537년 1월 혹은 2월.

장장 10개월이 지났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잉카 측의 사망자 수는 에스파냐의 100배 수준에 이르렀다.
사실 고금동서 어느 경우에나 공성전공격하는 쪽이 더 어렵다. 게다가 잉카군은 본진의 이점을 갖지 못했었는데 애초에 잉카군은 제국 여러 곳의 부족 들이 모인 연합군으로서 사실상 원정군이나 다름없었던 처지였다. 게다가 이곳은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중턱이다. 지속적으로 인력을 투입하는 것도, 식량을 조달 하는 것도 점점더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즉,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것.

그런데 하필 이 시점에서 갑작스럽게도, 약 2년전에 남쪽으로 떠났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스코로 향하는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현재 잉카군은 200명도 채 안 되는 쿠스코의 병력 마저도 갈아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에 추가로 500명이 더해진다면(...) 아마 망코 잉카는 이 소식에 뒷목을 잡았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리마 쪽에서도 구원부대가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실 알마그로는 지난 2년 동안 아무 소득도 없이 개고생만 실컷 하고 실의에 빠져 귀환하던 차였다. 당시 알마그로가 향했던 "잉카의 남쪽"이란 곧 오늘날의 칠레로서, 당시 이 지역은 잉카의 지배지라기보단 마푸체족의 반독립 지역이었다. 마푸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에스파냐에게 저항한 근성갑의 전투민족들. 게다가 지형은 페루보다도 더 험했다. 당연히 500명 정도의 병력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노릇.[36]

‘잉카 남부 총독’이란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귀환중이던 알마그로 일행에게 '망코 잉카의 봉기'는 희소식이었다. 알마그로 일행은, 망코 잉카와 손을 잡고, 피사로의 몫을 뺏는다는 아주 쌈빡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게다가 알마그로는 예전에 망코 잉카와 나름대로 친분을 쌓아두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더해졌다. 이에 재빨리 쿠스코로 진군하여 인근에 다다르자 망코 잉카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의한다.[37]

한편 도착은 했는데 구원은 안 해주는 알마그로의 꼴을 보고 그의 속셈을 알아차린 쿠스코의 에르난도 피사로 역시 질 새라 망코 잉카에게 사절을 보낸다. 알마그로를 믿지 말고, 지난 일은 다 잊고 우리와 화해하자는 것.

망코 잉카로선 꽃놀이 패 2장을 손에 쥐게 된 셈이었지만, 아무래도 마누라를 따이고 오줌세례를 받아야 했으며 10개월 동안 피 튀기게 싸운 상대였던 피사로 형제들보단 알마그로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게 당연한 일. 따라서 결국 피사로 형제쪽은 무시하고 알마그로와 연락을 취하는데(...)

마지막 순간, 망코 잉카는 과연 알마그로가 얼마나 믿을만 한지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알마그로의 사절을 테스트해보는데, 바로 알마그로의 사절에게, 쿠스코 측에서 사로잡은 에스파냐인 포로를 죽여보라고 한 것. 이 사절은 고민 끝에 동족인 에스파냐인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고, 이에 망코 잉카는 '에스파냐인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절을 가두어버린다.[38] 이로써 망코 잉카와 에스파냐인들 간의 동맹 혹은 화해는 무산된다.

13 잉카 봉기군의 해산

쿠스코 포위전이 시작된지 10개월, 아타우알파가 죽고 망코잉카가 등극한 지 4년째인 1537년 3월 경.

망코 잉카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마그로와 동맹을 거부한 이상 이들은 적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이로써 에스파냐의 병력은 2배에서 3배가 된 셈. 더 이상 싸워봤자 남은 것은 패배뿐이라고 판단한 망코 잉카는 군대를 해산한 뒤 에스파냐인들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도주하기로 결심한다.이때 선택한 지역이 잉카 동부, 안티수유. 안티수유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사이의 매우 험한 지역으로, 이곳이라면 에스파냐인들이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망코 잉카는 잉카인들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으나, 이 말을 믿는 잉카인들은 별로 없었다. 망코 잉카의 아들이자 차차기 황제인 티투 쿠시(Titu Cusi)는 이때 한 족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잉카의 황제여,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른 군주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무력하게 버리지 마십시오. 아니면 적어도 당신과 함께 가서 행복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하지만 망코 잉카는 결국 안티수유로 떠난다. 선대 황제의 미라를 비롯, 사제, 귀족, 농민, 목동 등 사실상 쿠스코의 황제 정부가 통째로 안티수유로 탈출한 것. 결국 잉카군은 순식간에 해산되고, 잉카의 봉기는 이렇게 해서 끝나버린다.

이후 구심점을 잃은 제국은 차근차근 정복자들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며, 망코 잉카는 안티수유에서 에스파냐인들에게 추적당해 사로잡힐 뻔하지만 또 한 차례 탈주에 성공한다. 더욱 깊고 으슥한 곳으로 향한 망코 잉카는 1539년, 오늘날 에콰도르에 위치한 빌카밤바(Vilcabamba)에 마지막 잉카 망명 정부를 세웠으며, 잉카제국은 이곳에서 1572년 마지막 황제가 체포될 때까지 3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 잉카 정부를 기존의 잉카 제국과 구분하여 빌카밤바 잉카후잉카라고 칭한다.

어쨌거나 이로써 잉카'제국'은 사실상 멸망 혹은 해산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곤살로가 NTR했던 황후인 코야 오크요(Cura Ocllo)는 안티수유에서 에스파냐인들에게 체포당한다. 잉카의 반란에 빡쳐 있던 피사로는 이 불행한 여인을 잔인하게 처형했는데, 촉 없는 화살로 죽을 때까지 쐈던 것.

14 계속되는 막장, 라스 살리나스의 전투(Batalla de las Salinas)

망코 잉카가 퇴각하자 이제 남은 건 에스파냐인들간의 다툼 뿐. 사실 망코 잉카가 물러나기 직전, 알마그로는 야간에 몰래 쿠스코에 들어가 에르난도와 곤살레스, 피사로의 두 동생들과 그들을 따르는 20명의 에스파냐인들을 체포하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피사로가 리마에서 보낸 구원병력 500명도 쿠스코에 도착했다는 것. 결국 알마그로의 군대와 리마의 구원부대는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리마의 군대가 패배한다.(아반카이의 전투Batalla de Abancay)

알마그로의 수하들은 피사로의 동생들을 참수해버리라고 권했지만, 어디까지나 알마그로의 목적은 "나도 피사로 만큼 땅을 갖고 총독되고 싶다"이었고, 피사로 역시 두 동생의 안전을 원했기 때문에 양측은 협상에 나선다. 협상 중재자인 변호사의 설득에 따라 알마그로는 피사로의 동생들을 일단 석방하지만, 이후 2달 남짓 계속된 협상은 최종 결렬. 이래서 변호사를 믿으면 안된다.

결국 후세에 라스 살리나스의 전투(Batalla de las Salinas)라 알려진 전투가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 전투는 피사로 원정대 지휘관들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피사로 본인은 여전히 리마에 머물렀지만, 그가 보낸 구원병력은 쿠스코에 속속 도착하여 알마그로 쪽보다 병력이 약간 앞선 상태. 양쪽 모두 원주민 전투부대의 지원을 받았는데, 알마그로의 경우 허수아비 황제로 파우유(Paullu)[39]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가 보낸 원주민 부대의 지원을 받았고, 피사로는 툼베스 + 키토의 장모님이 지원한 원주민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최종 병력비는 알마그로: 에스파냐인 500 & 원주민 6,000 vs 피사로: 에스파냐인 700 & 원주민 7,000.

격렬한 전투 끝에[40] 알마그로 쪽이 패배. 쿠스코 포위전 이후로 생고생을 거듭한 에르난도 피사로는 잔뜩 독기가 오른 상태였기에 알마그로와 그의 지휘관들 몇몇의 목을 매달아버린다. 디에고 데 알마그로 향년 63세(추정)

이로써 반대세력이 거의 소멸된 피사로는 페루의 지배자가 된다.

알마그로를 처형한 뒤 피사로 가문의 둘째, 에르난도 피사로는 고국으로 돌아간다. 어찌되었든 알마그로는 카를로스 1세가 임명한 총독이었기 때문에 그를 죽인 일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돈 좀 뿌리고 제대로 설명하면 아무 탈이 없을 줄 알았던 에르난도였지만(...). 그의 운명에 대해선 여담에서 확인할 것.

15 피사로의 죽음, 망코 잉카의 죽음

피사로는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것을 이루었다. 후작이라는 높은 지위, 막대한 재산, 그리고 페루의 지배자라는 신분. 나름대로 소박한 생활을 하며 리마 건설에 몰두한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태클은 없을 줄 알았지만, 살아남은 알마그로 일파가 여전히 존재했다.

알마그로 일파는 칠레 개척도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지도자까지 잃었으며 잉카 원정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재산도 챙기지 못했던 상황. 이게 다 피사로 때문이라며 대놓고 피사로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피사로 역시, 나름대로 챙겨줬는데도 제몫도 못하면서 병크만 일으켜댔던 알마그로 일파를 곱게 볼 리 만무. 결국 알마그로 일파는 이들에게 철저히 왕따 신세가 되었고(...) 결국 알마그로 일파는 피사로가 살아있는 이상 꿈도 희망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라스 살리나스의 전투가 끝난 지 3년이 지난 1541년 6월 26일 일요일. 당시 피사로는 알마그로 일파가 영 수상쩍다는 정보를 몇 차례 전해들었긴 하나, 그래도 설마설마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므로 일요일 미사에 불참하고 집에서 머물며 손님들과 점심 만찬을 벌이는데... 식사 중이라 방심한 상태를 노리고 알마그로 일파의 암살자들 20명에게 습격당한다. 이 20명 중에는 알마그로의 아들[41]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사로와 그의 손님 중 일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쪽수도 딸리는데다 무장도 제대로 못 갖춘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끔살.

피사로는 격투 끝에 숱한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표시한 뒤 힘겹게"고백..."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ang? 목숨이 끊기기 전 신에게 죄를 사해달라는 의미였다는 견해도 있고, 암살자들에게 간단한 고해성사를 드릴 시간을 달라는 의미였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거나 암살자 중 한 사람이 냅다 꽃병으로 머리를 갈겨 피사로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향년 65세(혹은 70세).

이 소식에 놀란 카를로스 1세는 국왕의 대리인을 보내 이들을 제압하고(츄파스 전투Batalla de Chupas), 주모자들 대부분을 체포한 뒤 처형한다. 알마그로의 아들도 이 때 처형당한다.

그런데 암살자들 중 예닐곱 가량이 탈출에 성공한다. 이들은 빌카밤바의 망코 잉카에게 달아났고, 피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기분이 고소해진 망코 잉카는 이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들은 또 한 번 배은망덕한 잔꾀를 생각해냈으니(...) 망코 잉카를 죽여 그 댓가로 에스파냐 측에 용서받을 계획을 생각해낸 것.

이렇게 해서 피사로 암살 3년 뒤인 1544년, 망코 잉카마저 암살된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계획과는 달리 도주에 실패하고 잉카인들에게 붙들려 전원 끔살당한다.(...)

16 여담

  • 피사로의 유해는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리마 성당 안뜰에 묻혔다. 이후 18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몸을 다시 발굴하여 전시되었으나 1977년 성당 공사 중에 피사로의 진짜 유해가 발굴되었다.(...) 80년 넘게 속아오늘 관람객들에게 애도 머리와 유골 일부가 담겨있는 관에, "여기 돈 프란시스코 피사로 후작의 머리가 묻혀있다. 페루를 발견한 돈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카스티야의 왕관[42]을 바친다"라고 적혀있었다.[43] 조사 결과, 암살 당시 정황에 맞는 수많은 자상이 발견되었고, 두개골 복원 결과 역시 피사로의 초상화에 그려진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에 피사로의 유골이 사실인 것으로 판정되었다. 20군데에 걸쳐 칼에 찔리거나 베였으며, 생전에 심한 디스크와 탈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코가 부러진 적이 있다거나 이가 많이 빠졌다거나 하는 온갖 시시콜콜한 사실까지 밝혀졌다.
  • 피사로 가문의 둘째인 에르난도 피사로는 라스 살리나스 전투 이후 에스파냐에 귀국한뒤 체포당한다. 에르난도 본인의 큰소리와는 달리, 카를로스 1세는 본인이 직접 임명한 총독을 살해한 사실에 크게 불쾌해했다. 게다가 알마그로의 지지자들이 속속 도착해 에르난도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결국 에르난도는 총독 살해 + 망코 잉카 봉기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무려 23년 간 깜방살이를 해야 했다. 망코 잉카 봉기 문제와 관련해선 에르난도가 억울하다며 열심히 자기 변호를 했지만, 결국 인정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1561년 풀려난 뒤에도 17년을 더 살았다! 에르난도의 출생연도(1478년에서 1508년 사이)와 사망연도(1578년에서 1608년 사이)는 불분명하기 때문에, 사망 당시 나이를 심지어 100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래에서 후술
  • 아타우알파의 여동생이자 피사로의 부인이었던 퀴스페 시사(혹은 이네스 유판키)는 피사로가 죽은 후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재혼하였다.
  • 피사로는 이네스 유판키에게서 2명의 자식을, 다른 잉카 황족 여인에게서 2명의 자식을 낳아 도합 4명의 자손을 남겼다.[44] 이 중 셋은 어린 나이에 죽었으며 딸 1명만이 살아남아 천수를 누렸다. 그녀의 이름은 프란시스카 피사로 유판키(Francisca Pizarro Yupanqui)이다.
  • 프란시스카 피사로는 카를로스 1세에 의해 법적인 지위, 즉 잉카 황실의 혈통이자 피사로 후작 작위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1550년에 깜방에 갇혀있던 삼촌 에르난도와 결혼했다는 것.잉카 황실의 후예답다.어차피 에스파냐도 근친혼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사람들이였다게다가 프란시스카는 당시 16세였다. 심지어 에르난도는 당시 아무리 적게 잡아도 42세, 높게 잡으면 64세(!)였다[45]. 어쨌거나 프란시스카는 존경받는 후작부인으로 살았으며, 에르난도가 죽은 이후에는 어떤 에스파냐 귀족과 재혼도 했다고 한다. 프란시스카 피사로는 6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5명의 자녀를 남겼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피사로 후작 가문의 혈통이 전해졌다. 덧붙여 프란시스카는 "첫번째 메스티소"라는 별명이 있다. 하지만 프란시스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에스파냐인들 사이의 혼혈이 태어났으므로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아마 메스티소로선 첫번째 고귀한 혈통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 듯.
  • 막내동생이었던 곤살로 피사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항목 참조. 간단하게 적자면, 피사로가 죽은 뒤 7년 후인 1478년에 페루 총독 자리를 놓고 본국에 반항하다가 처형되었다.(...)
  • 잉카는 망코 잉카가 죽은 지 28년 뒤인 1572년에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붙잡혀 처형당함으로써 멸망했다.
  • 피사로의 끔살 탓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피사로 가문은 단절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위에 적힌 듯이 피사로의 혈통과 작위는 딸과 동생을 통해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이후 피사로 가문은 대대로 이어진 '피사로 후작'들을 비롯하여 에스파냐와 페루에서 꽤 많은 수의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했다. 심지어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대통령[46]까지 지낸 사람도 있다!!(프란시스코 자비에르 데 루나 피사로Francisco Xavier de Luna Pizarro 주교. 1780~1855) 현재도 페루에는 피사로 가문의 후예로 추정되는 "피사로" 성씨의 인물들이 제법 존재하는데, 축구선수 클라우디오 피사로도 그 중 한 사람.

17 평가

피사로, 그는 역사를 바꿨다. 그것도 '제대로'.

역사학계의 정설은 다음과 같다.

신대륙 식민지에서 엄청난 양의 이 채굴됨 -> 유럽 경제와 역사에 중대한 영향 미침 -> 전 지구적인 변화 발생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이야기. 이 때 은이 대량으로 나온 신대륙 식민지가 바로 피사로의 원정 결과 획득한 지역, 즉 오늘날의 페루이다.

특히 피사로의 원정은 대체역사소설의 소재로 삼아도 될 정도. 일단 피사로의 원정은 제대로 지원받지도 못했을 뿐더러 반대가 심했다. 이는 파나마멕시코 건설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머나먼 미지의 남아메리카 원정에 투입될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 사실상 '국왕의 허가'라는 것도 실질적인 지원은 전무했으며 국왕이 서명한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았다.

원정 초기에 피사로가 용감한 13인 사건을 통해 원정을 계속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이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어차피 유럽인들의 남아메리카 진출은 이루어졌을 것이지만, 실제 역사보다 늦은 시점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그리고, 단 몇 개월이라도 원정이 늦게 이루어졌다면, 아타우알파는 이미 쿠스코에 입성해 정부를 수립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타우알파 체포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에스파냐인들과 잉카인들의 초기 접촉 형태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프란시스코 피사로"라는 인물의 원정이 없었다면, "곤살로 피사로"라는 인물의 원정 참여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후의 NTR도, 황제에게 오줌세례도 없었을 것이니 상당히 이른 시점에서 발생한 잉카의 대규모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피사로의 원정은 역사를 바꿨다.

18 대중적인 평가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주관적인 평가는 별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사로를 역사상 최악의 제국주의 악마, 흡혈귀 같은 식민주의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뭐 일단 그의 뜻이 다르다고 해도 벌어진 학살이나 약탈로 이어진 피의 역사를 보면 결코 좋게 이야기할 수 없다. 심지어 조국인 에스파냐에서도 일단 본국에 이득이 가게한 위인이지만 그렇다면 남미에서 걔가 한 짓도 훌륭하냐고 질문하면 피하거나 "뭐 거기선 악마이긴 하지..."라고 인정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특히 식민지 역사를 겪은 원주민들의 눈에는 피사로가 곱게 보일 수가 없다. 특히 20세기 이후 제국주의의 시대가 끝남에 따라 피사로의 평가는 영 좋지 않다. 페루인들의 경우, 자신들을 잉카인의 후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피사로라면 이를 간다. 카더라도 아니라, 남미 여행간 한국인 여행자가 현지인들과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피사로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 흡혈귀 색히... 겨우 꽃병에 맞아 죽으니 얼마나 편하게 죽었어! 온 몸을 산채로 다 찢어져 죽여도 과분한 죽음이거늘!" 이란 말을 듣던 게 2013년 일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일반인들, 특히 보통의 사람들이 피사로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 좀 집어던졌다고 잉카 제국의 황제를 납치, 체포했고
2. 막대한 보물을 갈취하고 용광로에 갈아버렸고
3. 다 뜯어낸 뒤에는 황제를 죽였다
4. 그렇게 해서 잉카는 멸망했다

이는 후대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거대 제국의 황제가 그리스도교 좀 안 믿는다고 체포되어 살해되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삥뜯기가 자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거대 제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 바꿔 말하면, 한주먹 정도밖에 안되는 피사로 원정대가 삽시간에 평화롭던 거대 제국을 멸망시키고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를 약탈했다는 것. 이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원정조차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탈 규모가 크고 일어난 사건들도 센세이셔널하다. 덕분에 코르테스는 상대적으로 욕을 덜 먹을 정도(...) 게다가 아즈텍은 그놈의 식인문화 때문에 영 이미지가 안 좋다보니.

참고로, 피사로 원정대의 인원은 코르테스 원정대의 5분의 1, 10분의 1수준. 그럼에도 이들이 획득한 재물은 코르테스 쪽보다 더 많다. 사실 역사상 단 한 번의 전투(아타우알파 체포 사건)로 승리자 전원이 이처럼 많은 재물을 획득한 경우는 없다.

19 피사로를 위한 변명 혹은 반론

하지만 실제 피사로의 원정 기록들을 보게 되면, 대부분의 일들이 피사로가 의도와는 다르게 일어났다.

1. 성경 사건(아타우알파 체포 사건): 일단 그 책이 성경이 아니라 기도서였다는 문제는 제쳐두기로 하자책을 집어던진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잉카 황제가 대규모의 인원을 이끌고 왔고 겁에 질린 에스파냐인들의 오해로 인해서 사건이 일어났다. 피사로가 황제의 신병을 확보할 의도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경우처럼 수도에 손님으로써 입성한 뒤 은근슬쩍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

2. 약탈: 아타우알파가 먼저 보물을 주겠다고 제시했으며, 피사로가 먼저 뜯어낸 것이 아니다.

사실 1과 2는 피사로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수천 명의 잉카인들이 영문도 모르고 학살당했으며, 잉카의 유물들은 공중분해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사실 황제가 먼저 보물을 주겠다고 제의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에는 피사로 원정대가 보물을 삥 뜯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 유물들을 용광로에 갈아넣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결과론.

3. 황제 살해: 피사로는 반대했지만 다른 이들의 주장이 거세어 막을수 없었다.

1, 2번과 달리 아타우알파의 죽음은 피사로가 억울해할 만한 일이다. 피사로가 반대했음은 기록상 빼도 박도 못하게 남아있는 분명한 사실이며, 에르난도 피사로나 에르난도 데 소토 둘 중 한 사람만 남아있었어도 아타우알파는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 뭐 그렇더라도 최종 결정권자로서 피사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이것도 어쨌거나 결과론.

가장 중요한 점은 다음이다.

4. 잉카 멸망: 피사로는 잉카를 멸망시킬 의도도 없었고, 멸망시킨 원흉도 아니다.

망코 잉카를 황제로 세운 시점에서 피사로의 목적이 달성되었음은 분명하다. 피사로의 계획은 해변가인 툼베스 지역을 직접 통치지역으로 삼고, 나머지 잉카 제국의 지역들은 잉카 황실 정부와 공동 통치하겠다는 것. 이는 기록상으로도 분명하게 남아있는 사항이며 피사로의 실제 행적으로도 확인된다. 그 증거로 피사로는 망코 잉카가 황위에 오른 이후 2년 동안 그와 협력했으며, 정국이 안정됐다고 판단한 이후에는 쿠스코를 떠나 죽는 날까지 리마 건설에 몰두했을 뿐 쿠스코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마 피사로는, 잉카 전역이 봉기하고, 이것이 잉카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바라지도 않았고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

만의 하나 피사로의 의도대로만 됐다면 잉카제국은 꽤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포르투갈동남아에 진출했던 것과 비슷하게 일부지역은 에스파냐의 직할 식민지가 되지만 나머지 지역은 상당한 수준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 어쩌면 태국같은 강력한 독립 왕국이 후세까지 남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무굴 제국처럼 야금야금 먹혔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잉카가 이렇게 단시간 내에 봉기해서 스스로 멸망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

하지만 막내 동생 곤살로 피사로가 대형병크를 일으킨 탓에 잉카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즉 잉카 버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 버린 것. 이는 정국이 안정된지 겨우 2년 밖에 지나지 않은 매우 짧은 시점이었고, 잉카는 침략자들의 습성이나 군사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해볼 여유도 없었다. 이는 결국 잉카의 급속한 쇠퇴 및 멸망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잉카 멸망"이라는 부문에 한정하면, 피사로로선 억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 이 때문인지 이 항목이 전면개정 되기 이전의 부실했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항목 말미에서조차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동생 곤살로 쪽이 형들보다 몇 배는 더한 막장인간이었기에(…) 곤살로 항목에 들어가면 상대적으로 프란시스코가 개념인으로 보인다.[47]

하지만 그 문제의 곤살로를 잉카로 데려가기로 한 것은 결국 피사로의 판단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피사로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고, 결국 본인이 직접 잉카를 다스리려 하지 않은 이유도 인원부족 때문이였지, 뒤에서 열심히 빨아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사로가 착실히 닦아놓은 식민지배의 길로 에스파냐가 곱게 접수하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살아있는 ATM으로 실컷 갈취할 생각이였는데 부하가 죽였으니 죄가 없다? 땅 좀 뺏고 노예 좀 부려서 열심히 갈취할 생각이였는데 어쩌다보니 멸망하게 된건데 억울하다? 흔하디 흔한 범죄자들의 반박할 가치도 없는 변명이다. 피사로가 직접 멸망시킨 것이 아니니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빨아먹자고만 했으니 이토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수준의 개소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피사로가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하는데 대중들은 무지해서 모른다는 식으로 써놨는데, 역사는 히틀러도 모택동도 김일성도 바꿨다. 그 사람이 역사를 바꾼것과 악마의 똥꼬털 같은 사람인것은 상관이 없는 문제다.

20 대중문화 및 서브컬쳐에 대한 영향

피사로의 원정은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기 때문에, 사실 대중문화에 한정해서 논할 수준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에 큰 영감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이를 단 한마디로 칭하면 다음과 같다. 엘도라도[48]

  • 폴 앤더슨의 타임패트롤 시리즈 중 한편인 몸값의 해는 피사로 원정대에 잠입한 한 타임패트롤 요원과 피사로 원정대원인 한 콩키스타도르아타우알파의 보물을 용광로에 녹이던 도중에 타임트러블에 얽히게 된다는 내용이다. 국내 출간된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에 수록되어있다.
  • 태양소년 에스테반은 피사로의 원정이 이루어진 1530년대 잉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실제 역사와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만큼 차이가 난다. 어쨌든 "프란시스코 피사로"라는 인물도 등장한다. 재물에 눈이 뒤집힌 전형적인 악당 캐릭터.

입에 착착 달라붙는 어감과 악당이미지 때문인지, 몇몇 서브컬처 작품에서 피사로의 이름을 차용하여 쓰고 있다.

  1.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이고, 피사로의 증조부인 페르난도(혹은 에르난도) 알론소 데 이노호사가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이다.
  2. 그런데 딱히 신기하다고까지 할 일은 아닌게,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관계로 얽히고 섥힌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3. 칠레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와 피사로에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해 피사로의 형제를 감금한 죄.
  4. 문헌에 따르면 피사로 선발대는 보병 160, 기병 27명이었으며 전사자는 단 3명뿐이었다고 한다.
  5.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훗날 플로리다를 탐험하고 미시시피 강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물이다.
  6. 물론 진심으로 그랬다기 보다는 에스파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취한 행동인듯 하다
  7. 다음 황제인 망코 잉카 때 일어난 일들부터는 잉카 쪽의 기록이 남아있다. 망코 잉카의 아들이자 차차기 황제였던 티투 쿠시가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구술을 통해 남겼기 때문. 하지만 아타우알파에게 일어난 일들은 에스파냐인들의 기록만 남아있다.
  8. 잉카 제국은 험한 산지가 많았기 때문에, 황제가 자기 발로 걷지 않고 가마를 타고 다닌다는 것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특정 부족에서만 가마꾼을 뽑을 정도였으니. 때문에 황족이자 전 황제였던 우아스카르가 자기 발로 직접 걷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치욕적인 일이었다.
  9. 사실 푸냐는 잉카의 변방으로 제국에 대한 소속감이 낮았다. 이후 아타우알파의 대처를 볼 때, 아타우알파는 푸냐인들이 수천 명 가량 전사한 사실은 까맣게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족장 몇 명이 끌려가서 죽고, 부족민이 끌려가서 괴롭힘을 당했다더라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10. 실제로는 아타우알파를 직접 수행한 인원은 약 3,000~8,000명 가량으로, 대부분 비무장이거나 경무장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 단위의 전투부대가 존재했다고 한다.
  11. 보병 106, 기병 62. 단, 대포도 10문 있었다.
  12. 이 병맛 돋는 조서는, 의외로 자비심과 동정심의 산물이었다. 이게 만들어지기 전에는 닥치고 학살부터 했기 때문.
  13. 현대의 스마트폰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쥐어주면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뭘 알아야 다루던지 말던지 하지(...)
  14. 개종해도 사형이지만, 개종 안하면 산채로 화형(...).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개종할 수 밖에 없다.
  15. 잉카 황제는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누나나 여동생과 결혼한다.
  16. 당연히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부럽다
  17. 알마그로와 리켈메가 어찌나 아타우알파를 싫어하는 티를 냈는지 처형되기 전부터 아타우알파는 이 두 사람이 결국 자기를 죽일 것이라 말해왔다.
  18. 도중에 아타우알파 지지자였던 장군을 사로잡아 처형하기도 했고, 아타우알파에 반대하거나 혹은 잉카 제국에 반항심이 컸던 원주민 세력의 환대를 받기도 했다.
  19. 위임, 위탁이라는 뜻으로 아주 단순하게 보면 '원주민 인력에 대한 징발권, 보호권' 정도가 된다. 이런 종류의 제도가 대부분 그렇듯이 식민지의 '봉토'에 대한 권리로 변형된다. 어쨌거나 원주민들을 다스리고 세금을 받는 '귀족'이 되는 것.
  20. 본국으로부터 물자와 인력을 공급받기 위해선 항구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 잉카 제국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산중턱에 있었으니(...) 덧붙이자면 리마는 오늘날까지 페루의 수도로 남게되었다.
  21. 저 위에서 언급됐듯이 에르난도는 30대 중반의 나이로 타지에서 군사 경험을 쌓아서 믿고 맡길만한 인물이었다.
  22. 사실 큰형이나 알마그로나 모두 잉카 귀족 여자를 첩으로 삼긴 했다. 하지만 피사로나 알마그로는 이미 5~60대인 탓에 부인 한두 명을 얻는 것 쯤으로 만족했지만, 후안과 곤살로는 20대 초반의 한창 때였으니(...)
  23. 잉카의 고위 귀족은 혈통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여동생이나 누나와 결혼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들이 단 1명뿐인 정실 부인이 되며 나머지는 이 된다.
  24. 쿠라 오크요는 훗날 망코 잉카와 함께 쿠스코를 탈출하지만, 몇 년 뒤 에스파냐군의 추격으로 생포된다. 망코 잉카의 반란으로 잔뜩 열이 받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명령으로 매우 잔혹하게 처형된다. 철촉이나 돌촉에 비해서 무딘 대나무 촉으로 된 화살을 죽을 때까지 쏘았던 것.
  25. 잉카버전 매국노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잉카제국에게 정복된 피지배종족들로 아즈텍이나 인도처럼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없었다.
  26. 참고로 영어판, 에스파냐어판 위키피디아의 쿠스코 포위전 항목에는 원주민 지지자의 인원이 3만 명으로 기재되어있다. 어떤 숫자이든 간에 모두 추정치이므로 실제 숫자는 불명. 사실 망코 잉카군이 4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숫자가 오락가락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쿠스코 지역"에 국한할 경우, 에스파냐 측 원주민들은 기록상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짱돌을 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에스파냐인들과는 달리 원주민들은 이거 맞으면 죽.는.다.
  27. 그냥 짱돌을 던진게 아니라 그 유명한 볼라를 이용한 투석
  28. 훗날 에스파냐인들이 건축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돌을 가져다 쓴 탓에 훼손되었지만, 요새의 성벽은 아직도 남아있다. 나름 알려진 관광지로 남미 3대 축제 중 하나인 인티 라이미(Inti Raymi)가 이 근처에서 열린다고. 2008년에는 이곳에서 잉카 문명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AD900~1200년 경의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29. 죽기 직전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원주민 여성에게 얻은 갓난 딸에게 재산 일부를 남겼지만, 친딸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즉, 서녀를 남긴 것. 아이 어머니에게는 한푼도 주지 않았고(...) 남은 전재산은 동생 곤살로에게 남겼다. 곤살로는 유언장도 없이 죽어서 이 돈은 결국 공중분해(...)
  30. 그의 용기에 감탄한 에르난도 피사로는 죽이지 말고 사로잡으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자살을 택하자 안타까워했다고. 에스파냐 판 조조와 조자룡
  31. 대충 농장주나 영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32. 시집간 뒤 이네스 우아일라스(Inés Huayl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여기에 잉카 황족의 성(姓)으로 알려진 유판키(Yupanqui)를 붙여 "이네스 우아일라스 유판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33. Contarguacho라고 한다.
  34. Kuraka라고 하는데, 대충 잉카의 지방 행정관 정도라고 한다.
  35. 이로 인해 몇몇 후세 역사가들은 당시 잉카 제국은 사실상 키토파(아타우알파와 그의 어머니)와 쿠스코(우아스카르와 망코잉카)파의 반 내전 상태였으며, 피사로와 알마그로는 각각에 연줄을 댔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36. 알마그로의 남방 원정대에는 원주민 동맹군 1만명도 포함되어있었다. 하지만 원정 도중에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도주했다고. 단 잉카 귀족들은 끝까지 동행했고, 이 중에서 황족이었던 파울루 잉카(Paullu Inca)가 훗날 에스파냐인들에 의해서 꼭두각시 황제가 된다.
  37. 편지에서 자신의 병력을 700명으로 부풀리고 2,000명이 더 올거라고 뻥을 쳐 자신들의 몸값을 부풀리는 얄팍한 수작까지 부렸다.
  38. 이 사절의 이름은 루이 디아스(Rui Dias)인데, 망코 잉카가 도주한 이후 피사로 일파에 의해서 구출된다. 그리고 알마그로가 처형될 때 같이 처형(...). 본인은 양심을 지킨다고 지켰지만,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 셈. 잉카 제국은 무너지고 자기 목숨까지 잃었으니(...)
  39. 황족으로서 알마그로를 따라 칠레 원정을 따라갔다가 망코 잉카의 봉기를 듣고, 기회는 이때다며 에스파냐에 붙어먹어 황제가 되었다. 이후 에스파냐 측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1549년에 병사
  40. 알마그로 측의 에스파냐인 전사자가 150명 가량이라고 한다. 그외의 숫자는 불명
  41. 파나마 원주민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당시 22세
  42. 에스파냐는 지배영역이 광대한 탓에 국왕을 대리하는 부왕(副王)제도가 있었다. 피사로가 정식으로 부왕에 임명된 적은 없었지만, 어차피 몇 년 지나지 않아 페루에도 부왕이 도입되었다.그냥 왕관을 바친다고 하면 얄짤없이 반역이지
  43. 함께 발견된 다른 관에는, 어린 나이에 죽은 피사로의 아이들, 피사로의 암살 때 그와 함께 죽은 이복동생, 이복동생의 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들어있었다.
  44. 자식 1명은 파나마 여자에게서 낳았다고도 하는데, 어차피 일찍 죽었으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45. 다만, 프란시스카 피사로와 에르난도 피사로가 결혼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잉카에서 획득한 피사로 가문의 막대한 재산이 분산되는 것을 막고 후작이 된 가문의 정통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정략결혼이라는 것인데... 근대 이전 유럽의 정략결혼에서 이정도 나이 차는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사실 정략결혼은 신랑과 신부의 정치적 입장만 따지지, 나이나 개인적인 특성에는 별로 관심 없이 하는거다.)
  46. 단 오늘날의 대통령과는 다른 것으로, 제헌의회 의장 정도의 수준.
  47. 곤살로 피사로 항목을 보면 알게된다. 아예 곤살로는 남미 식민 제국에서 왕을 자칭하며 막장 권력을 부리다가 반란까지 일으켜서 잡혀 참수당했고 잘려나간 목은 거리에 창대에 꽂혀 구경거리가 되며 대역죄인으로서 비참하게 몰락했다.
  48. 단, 엘도라도 전설은 곤살로 피사로의 아마존 원정 때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어차피 형이나 동생이나 다 같은 피사로 동생 곤살로의 원정부터가 막대한 재물을 획득한 잉카 원정에 필받아 계획된 것이니 그게 그거. 게다가 후세사람들은 '엘도라도'하면 '잉카의 보물'을 떠올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