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

屈原
B.C. 343 ~ B.C. 290 (추정)

1 개요

전국시대 초기 (楚)의 정치가, 시인.
성은 미(羋), 씨는 굴(屈)[1]. 이름은 평(平). 자(字)인 원(原)을 붙여 굴원이라 부른다. 성과 씨가 다르기에 드라마 등에서 미원이라고 호칭되는 경우도 있다. 초 회왕(懷王)[2]의 좌도(左徒)[3] 및 삼려대부[4](三閭大夫)의 직책에 있었다.

2 시련

모국인 초나라의 귀족이자 고위공무원, 게다가 능력도 있었는지 왕의 신임도 받고 한창 리즈시절을 즐기고 있을 때, 그를 시기하던 동료가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기에는 상관대부(上官大夫)라고 직책만 나올뿐,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흔히 근상(靳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동일인물이라는 근거는 없다.

王使屈平為令 衆莫不知 毎一令出 平伐其功 (曰)以為 非我莫能為

대왕께서 굴평(屈平)에게 법령을 만들게 하신 일은 모르는 자가 없는데, 법령이 나올 때마다 굴평은 자기의 공적을 자랑해 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사기 굴원열전)

당연히, 이 말을 들은 왕은 분노하여 그를 멀리했다. 상관대부는 굴원의 직책과 동급이었는데, 왕의 명을 받들어 만들고 있는 법령의 초안이 작성되기 전에 그 일을 뺏으려고 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이런 일을 저질렀다 한다. 일 하고 싶은데 못하게 했다고 참소하다니..높으신 분치고는 제법 성실하다?

그렇게 삽시간에 백수가 되어버린 굴원은 하소연 할 곳도 없고, 우울한 마음에 글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한문학의 역사를 논하면 빠지지 않는 작품인 이소(離騷)이다. 제목의 뜻에 대해선 사기 굴원 열전 중 '이소란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다는 뜻이다(離騒者 猶離憂也)'라고 나와 있다. 이 작품과 구가, 천문 등을 포함한 작품이 초사이다. 글항아리에서 처음으로 출판하였다.

3 국가의 위기

(秦) 혜왕(惠王)[5]이 제(齊)를 정벌하기 전 동맹관계에 있던[6] 초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그 유명한 종횡가(縱橫家) 장의(張儀)를 보냈다. 진 혜왕 9년(BC 328)에 장의가 재상이 되었고, 13년(BC 325)에 초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니 사신으로 파견된 시기는 그 사이일 것이다.

大王誠能聴臣 閉關絶約於齊 臣請獻商於之地六百里 使秦女得爲大王箕婦之妾 秦楚娶帚嫁女 長爲兄弟之國 此北弱齊而西益秦也 無便此者

대왕(초회왕)께서 진정 신의 말을 따라서 관문(關門)을 닫고 제나라와의 합종의 맹약을 끊어버린다면, 신은 상(商), 오(於) 일대의 땅 6백리를 초 나라에 바치고, 진나라의 여인을 대왕의 시첩(侍妾)이 되게 할 것이며, 진나라와 초 나라는 서로 며느리를 맞아오고 딸을 시집보내 영원히 형제의 나라가 되게 하겠습니다. 이는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약화시키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에 보탬이 되게 하는 계책으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라고 설득구라을 했는데, 이것이 먹혀들어[7] 제나라와 단교를 하니[8] 제나라는 진나라와 동맹하게 된다. 장의가 연횡가였으므로 진나라 우위의 동맹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초왕은 6백리 땅을 털도 안 뽑고 잡술 생각에 부풀어 사신을 보넸는데,

臣有奉邑六里 願以獻大王左右

신이 소유한 진나라의 봉읍 6리를 대왕께 바치고자 합니다.

분노가 대뇌의 전두엽까지 차오른 초왕은 군대를 일으키고 닥돌했으나, 오히려 단양(丹陽)과 한중(漢中)지역을 빼앗기고 많은 인명손실[9]을 입었으나 재차 공격! 안타깝게도, 남전(藍田)에서 패배하여 결국 성 두개를 건내주고 강화를 맺게 된다.

하지만, 초나라의 안습전설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4 초왕의 실수

이렇게 탈탈 털린 회왕이지만, 자존심만은 세우고 싶었다. 진나라에서 땅을 교환하자는 제의가 들어오자

不願易地 願得張儀而黔中地

땅은 필요없고, 장의를 받는다면 검중(黔中)의 땅을 바치겠소.

(사기 장의열전, 굴원열전에 공통으로 기록)

지도자로써, 세치 혀에 속아서 나라의 운명을 기울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치졸하게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국토를 양도하겠다고 한 것이다.

於是張儀往相楚 楚懐王聞張儀來 虛上舎而自館之 曰 此僻陋之國, 子何以教之(초나라가 제나라와 연합을 하자) 이에 장의는 초나라로 가서 재상이 되었다. 초 회왕(楚懷王)은 장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상등(上等)의 객사(客舍)를 비워 몸소 장의를 객사로 안내한 다음 묻기를 “여기는 구석지고 누추한 나라입니다. 선생께서는 무엇을 가르쳐주시겠소?" 하였다. (사기 장의열전 중)

이정도까지 대접했는데 저런 짓을 했으니 뭐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리고 장의는 갔다.

초왕 입장에서는 회를 떠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지만, 사신으로 왔으니 일단 가두고, 죽이려고 하는데, 초왕의 사랑을 받고있던 부인(夫人)[10] 정수(鄭袖)를 모시는 근상(靳尙)[11]과 친했던 그는 초왕이 부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부인이 자신을 풀어달라 부탁하게 만든다. 사기 장의열전어째 굴원열전보다 장의열전을 더 많이 인용하네.

근상 : 진나라에서 미녀들과 땅을 보내 장의를 살리려 할 터인데 왕은 땅을 좋아라 하고 진나라도 존중하니, 당연히 받을터이고, 그 미녀들도 진나라를 봐서 존중해주겠죠. 님 꿀 빨던 시절 끝났음요.

정수 : (왕에게) 장의 죽이면 진나라가 처들어올꺼임. 난 진나라에 끌려가 죽고싶지 않음요.T..T 뿌잉뿌잉
초왕 : 어이쿠~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장의를 잘 대접해야지.

그리고 장의는 풀려났다. 잠깐...숨 좀 돌리고 그냥 풀려난 것도 아니고, 전처럼 후하게 대접했다.(懐王後悔 赦張儀 厚禮之如故)
이에 굴원이 "어찌하여 장의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자 그제서야 군사를 보냈으나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굴원열전과 장의열전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굴원:전에 대왕이 장의에게 속으셨으므로 신(굴원)은 대왕께서 그를 삶아죽이실꺼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차마 죽일수는 없다하더라도 다시 그의 사설(邪説)을 들으시는것은 안 됩니다.(前大王見欺於張儀 張儀至 臣以為大王烹之 今縦弗忍殺之 又聴其邪説 不可)

초왕:장의를 용서하고 검중을 얻는것은 큰 이익이오. 약속후에 배신하는 것은 불가하오.(許儀而得黔中 美利也 後而倍之 不可)그럼 제나라 통수치고 욕한 너님은 뭐니?(여기서는 굴원열전의 기록을 따랐다.)

5 죽음

그렇게 시간은 흘러, 장의로 초나라를 괴롭히던 진나라 혜왕이 죽고 소양왕(昭襄王)[12] 때까지도 초 회왕은 살아있었다. 소양왕은 초 회왕을 만나고자 하여 직접 가려고 하였다. 소양왕이 초나라와 혼인관계가 있다고 한다. 장의가 말한 국혼의 결과로 추정한다. 이에 굴원은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같은 나라입니다. 믿지도 말고, 가지도 마십시오."(秦虎狼之國 不可信 不如毋行)라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들인 자란(子蘭)이 "왜 진나라의 호의를 거절하십니까?"(柰何絶秦歓)라는 말에 그만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예상했다시피 진나라의 무관(武關)에 들어서자 병사들이 뒤를 차단하고 억류한 채 땅을 내 놓으라고 요구를 하였다. 땅의 할양을 거부한 회왕은 조(趙)나라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더 달아나지 못하고, 결국 진나라로 가 죽게 된다.

그리해서 한 많은 초왕의 삶은 종지부를 찍고, 그의 장자가 즉위하게 되었다. 이 자가 경양왕(頃襄王) (B.C 298 ∼ 263). 초나라가 제나라에 패하고 난 후 제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다른 왕자도 아니고 장자를 볼모로 보낼 정도로 비참하게 당했다는 얘기. 즉위 과정도 기가 막힌게, 희왕이 잡히자마자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태자를 데려와서 왕위에 얹혔다. 당시 초나라 정세를 보아 간신들이 잡혀서 단물 다 빠진 왕을 구할 바엔 새로운 허수아비를 세울 생각으로 일을 진행했을거라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볼모 출신인 왕이 조정에서 힘을 낼 수 있을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동생 자란은 영윤(令尹. 초나라 최고의 관직)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전대 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를 두고 초나라 사람들이 비판을 하고, 굴원도 나라가 잘 되길 바라는 충심에 쓴소리를 하고 시도 지었다.

그리고 열받은 자란은 상관대부를 시켜 굴원을 모함하게 하였다. 이 상관대부가 초 회왕에게 굴원을 매도한 그 사람과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결국 굴원은 추방된다. 뭐 그 다음에 말할 거 없이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허구헌날 털리는 신세나 된다. 백기에게 수도까지 털려서 부득이하게 수도를 옮겨야 했으니......나라를 말아먹은 자란에 대한 기록은 이게 끝이다.

추방당한 굴원은 슬픔으로 시를 읊으며 멱라강을 떠돌다 어부를 만났다. 어부는 그를 알아보고 놀라 물었다.
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于斯

"초나라 삼려대부 아니십니까? 어찌 이곳에서 방랑하십니까?"

굴원이 답하였다.
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是以見放

"온 세상이 모두 흐렸는데 나 혼자 맑으며, 뭇 사람이 모두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 이로써 추방당했다오"

어부가 다시 말하였다.
"성인(聖人)은 만사에 엉키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속과 어울린다 했습니다. 모두 흐려 있으면 함께 흐려지면 되고, 모두 취해 있으면 어울려 취하면 되거늘, 무슨 까닭에 스스로 추방되었습니까?"[13]
그러자 굴원이 다시 답한다.
"어찌 청결한 몸에 더럽고 구저분한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배 속에 묻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오" [14]

<어부사(漁父辭)>中 [15]

대부님과 세상살이를 논하는 지나가던 어부의 위엄

사기 굴원세가에서는 강가를 떠돌며 시를 읇다가, 마침내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졌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후난 성(湖南省) 동북부에 위치한 멱수(汨水)라고 한다. 어떤 책들에는 율라(汩羅)로 잘못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물 이름 멱(汨)"자와 "흐를 율(汩)"자가 너무 비슷해서 그런 것이다.
이 부분이 참 비극적인데, 굴원 부분 한 곳에서 다루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으므로 여기를 참조...하는게 좋겠으나 지금은 지워져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어부사(漁父辭)>를 인용하여 얕게나마 최후의 비극을 표현하였다. 이보다 더 잘아시는 분이 있다면 추가바람 전설에서는 그가 투신을 하자 근처 백성들이 배를 몰아 구해내려 했으나 시체조차 건지지 못해 슬퍼하며 참대 잎에 찰밥을 싼 ‘종자(棕子)’를 뿌리며 애도했다고 한다.[16] 공교롭게도 이때가 5월 5일인 단옷날로 지금도 멱라강 일대에는 명절을 맞이하며 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배를 몰고 나오는 것에서 유래한 배몰기 시합인 '새룡선(賽龍船)경기'를 하고 대나무에 찹쌀과 여러 재료를 넣어 찐 만두류의 음식을 먹는 행사를 거행한다. 이 풍습이 옛 우리나라에도 퍼져서 단오에 나뭇잎으로 싼 떡을 먹는 등의 풍습이 있다.

6 기타

전한가의는 스스로의 처지를 굴원에 비유하며 복조부, 조굴원부, 초사(楚辭)[17]에 수록된 석서(惜誓)등을 썼다.

삼국지 12,13

삼국지 12 PK 고대무장으로 등장. 68/28/91/92에 계략, 내정에 적성이 맞는 무장. 물론 전투능력치는 전투에 쓸모없는 능력치에 전법이 진정이라서 계략부에 배치된 모습을 볼수있다. 혐오무장에 진시황이 들어가있는데. 문제는 굴원이 살아있는 시기가 진시황이 태어나지 않거나 왕위에 올라가지 않은 상태이다.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능력치는 68/28/84/89로 중신특성은 원정보좌. 전법은 어그로 형인 도발. 병종은 C/B/B이다. 당연 도발을 쓰는 순간. 심한다굴과 함께 퇴장당한다. 특기는 농업5 / 문화7 / 언변5 로 달랑 3개다.

한 야사에서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명군이 심심해서 갑자기 어느 노대신에게 "신하로서 주군의 명령을 무조건 듣는게 당연하다 보시오?" 라고 질문했다. 그 신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그 명군은 "그럼, 궁궐 앞 호수에 들어가 스스로 익사하시오!" 라고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신하들이 경악했는데 그 신하는 말도 없이 스스로 호수에 몸이 반 정도 잠기게 들어가더니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도로 나왔다. 그리고 한 편지를 보여주면서 말하길 "신이 어명대로 그렇게 하려는데 바로 굴원의 넋이 나오면서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였사옵니다." 그 명군이 편지를 읽어보니 "나야 멍청한 주군을 만나 스스로 멱라수에 빠져 죽었지만 그대는 훌륭한 주군을 섬기면서 왜 쓸데없이 죽으러 오는거요?"라고 적혀있었기에 허허허 웃으며 명령을 취소하고 그 신하에게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1. 사기 굴원열전(屈原列傳) 중 '초나라 왕실과 동성이다(楚之同姓也)'란 구절이 있다.이는 초나라 왕성이 미성 웅(熊)씨인데, 분가하면서 다른 씨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중원국가에서 공손公孫씨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2. BC 329년 ~ 299년. 항우 항목에 나오는 허수아비 황제 회왕(의제)이 증손자.
  3. 왕을 도와 정사를 돕고, 법령을 만드는 직책
  4. 왕족(王族)인 소씨(昭氏)ㆍ굴씨(屈氏)ㆍ경씨(景氏)의 세 가문을 관리하는 직책. 쉽게 말해서 뼛속까지 귀족
  5. BC 356 ~ BC 311
  6. 사기 장의열전(張儀列傳) 중 진이 제를 정벌하려 하자 제나라와 초나라가 동맹을 맺었다.(秦欲伐齊 齊楚從親)로 보아, 이미 두 나라가 진나라의 전쟁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7. 진진(陳軫)이라는 유세객이 장의의 속을 꿰뚫어 본 듯이 반대를 한 것으로 나온다. 초나라에 죄다 바보만 있는 것도 아니고
  8. 사람을 시켜 국경에서 제나라 왕을 욕하게 했다.
  9. 초나라가 욕하고배신했던 제나라가 진나라와 연합하여 병사 8만이 죽었다.그러게 욕은 왜 하고 그래…… 인실좆의 역사적 사례
  10. 제후의 정처(正妻). 초왕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다보니 후궁들 몇명을 골로 보낸 일도 있었다. 한번은 후궁을 새로 들이자 그 후궁에게 '왕은 다른 이의 콧김 냄새를 싫어하니 그를 알현할 때 코를 막고 있으라' 고 했고, 그렇게 한 후궁에게 왕의 냄새를 역겨워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처형당하게 했다. 그만큼 왕의 총애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장의의 입장에서는 로비하기 쉬운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1. 사기 장의열전에서는 신하라는 말도 없고, 그냥 초왕의 부인을 모시는 일을 한다(尚得事楚夫人鄭袖)고만 되어있다. 상관대부가 어떤 직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려대부이자 좌도벼슬을 하던 굴원과 동급이었다 하니, 부인을 모시던 근상이 상관대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12. BC3 306 ~ 251. 혜왕과 소양왕 사이에 진무왕(秦武王 B.C 311 ~ 307)이 있었으나, 무왕은 천자를 굴복시킬 셈으로 주나라에 갔다가 호기심에 보기인 의 무게를 재어보던 중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소양왕은 진무왕의 이복동생.
  13. 요약, 의역하였다. 원문은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淈其泥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釃 何故深思高擧 自令放爲
    성인은 만사에 엉키거나 얽매이지 않고 능히 세속과 어울려 옮아갈 수 있다 했소. 세인이 모두 탁하다면 왜 그대는 썩는 진창의 물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탁한 물결을 일게 하지 않으시오? 또한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세인이 혼몽하다면 왜 그대는 어울려 술지게미를 먹고 진한 술을 마시지 않으시오? 무슨 까닭에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하여 스스로가 추방되게 하였소?
  14. 이 역시도 요약, 의역하였다. 원문은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晧晧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내가 듣길, '새로이 머리를 감은 사람은 관을 털어 머리에 얹고, 새로이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고 걸친다.'라고 했소. 그러니 어찌 청결한 몸에 더럽고 구저분한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배 속에 묻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오. 어찌 깨끗하고 흰 내가 세속의 더러운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15. 굴원의 대표작이라 알려지지만『사기』의 「굴가열전(屈賈列傳)」 가운데에 나오는 굴원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나 물에 빠져 고기밥이나 되겠다는 문장은 노골적으로 그의 최후를 암시하기에 후대에 만들어졌다는게 정설이다.
  16.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물고기들이 시체를 먹기 않도록 쌀을 뿌린 것으로 표현한다.
  17. 초사는 굴원의 글과 굴원에게 헌정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대부분 자신의 처지를 굴원에 비유한 글들이 상당수인데, 워낙에 굴원이 드라마틱한 인물이라서 괜찮은 글들이 많다. 가의의 글이나, 빙탄불상용으로 유명한 동방삭의 글도 초사에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