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희종

금의 역대 황제
2대 태종 완안오걸매3대 희종 완안합라4대 해릉양왕 완안적고내
묘호희종(熙宗)
시호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
연호천회(天會, 1135년 ~ 1138년)
천권(天眷, 1138년 ~ 1141년)
황통(皇統, 1141년 ~ 1149년)
여진어왕기얀(Wanggiyan)
중국어완안(完顔)
여진어합라(合剌)
중국어단(亶)
생몰기간1119년 8월 14일 ~ 1150년 1월 9일
재위기간1135년 2월 10일 ~ 1150년 1월 9일

1119년 ~ 1149년 (재위 1135년 ~ 1149년)

금(金) 제국의 3대 황제. 묘호는 희종(熙宗) 또는 민종(閔宗) 시호는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 휘는 완안합라(完顔合剌). 중국식은 완안단(完顔亶).

금태조 아골타의 적자였던 종준(宗峻,繩果)의 장자였다. 본처는 여진 귀족 배만홀달(裴満忽達)의 딸 배만씨(裴満氏). 아들은 배만씨(裴満氏)가 낳은 태자 제안(濟安). 어머니는 여진귀족의 딸 포찰시(蒲察氏).

금태종이 자기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다 여진족 부족장들의 반발로 실패하자 1132년에 금태종의 황태자에 오르고 1135년 제3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희종은 여진족 부족장들의 지원으로 황제를 했으나, 즉위 후에는 부족장들을 탄압하고 황제 독재의 확립을 통한 중국풍의 관제를 도입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처음 시행했다. 희종 자신도 금나라 황제들 중 최초로 중국식 면류관곤룡포를 착용하였다. 또 중앙집권화로 중국북부 지배를 강화시켰다. 단 금나라의 중국화는 희종 때부터 시작이지만 본격적인 중국화는 해릉왕 때부터이다.

이 시기에 남송의 재상 진회와 화평을 맺었는데, 그 결과 금나라는 매년 25만냥의 은과 25만필의 비단을 조공으로 받았고, 남송의 황제가 금의 황제한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여기까지는 나름 잘 나가던 황제였는데... 아들들이 줄줄이 요절하고 공신인 완안종한(完顔宗翰)도 죽자 제어력을 잃고 사치와 술에 빠져살며 여진족 중신과 황족들을 숙청하는 등 공포 정치를 폈다.

끝내 1149년 사촌동생인 해릉왕 완안양(完顔亮)이 반란을 일으켰다. 해릉왕은 호위군관을 매수한 뒤 일부 귀족 대신들과 짜고 금희종의 침실에 뛰어들어 칼로 희종을 시해했는데 이 때 나이 31세였으며 이후 동혼왕(東昏王:동쪽의 혼미한 임금)이란 시호를 받았다. 참고로 혼(昏)이라는 이름은 선대황제인 금태종송휘종에게 준 이름(혼덕공)이었다. 육조시대의 동혼후보다는 조금 낫지만.

다만 폭군을 몰아낸다며 사촌형을 죽이고 황제를 한 해릉왕은 사촌형의 막장 행각은 가볍게 뛰어넘은 금나라 최고의 막장 황제였으니...

뒷날 해릉왕이 죽고 금세종 완안옹(完顔雍)이 즉위하자 다시 황제로 추증받아 희종의 시호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