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가 재현한 조선 임금의 9류 면류관 |
1 개요
冕旒冠. 면(冕)과 류(旒)로 만든 모자. 면은 위의 넓직한 판으로써 달리 평천판이라 부른다. 류는 앞뒤에 드리워 얼굴을 가리는 구슬 꿴 발을 뜻하나, 류를 면류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류를 드리우지 않고 판만 있는 작변(爵弁)이라는 모자도 있다. 면관(冕冠)·평천관(平天冠)이라고도 한다. 면류관은 동아시아에서 임금이 쓰는 왕관의 일종이다. 복두관이나 익선관이 만들어지기 이전 고대 중국에서는 면류관만이 왕관이었다. 하늘과의 교통, 즉 제사는 하늘의 후손인 天子만이 주관할 수 있었는데, 이 때 제사장이 쓰는 모자가 면류관. 다시말해 제정이 일치하던 시대로부터 유래된 유물이다. 따라서 유교의 영향력 아래 들어 있던 동양 문화권에서는 왕관하면 곧 면류관이었다. 면류관은 보통 황제나 왕이 머리에 쓰지만 류의 개수나 곤복에 들어가는 무늬의 개수에 차등을 둬서 황족 또는 신하들도 쓸 수 있도록 허락된 시절도 있었다.
2 역사
2.1 중국
중국 천자들이 평상시와 행사 때를 불문하고 항상 쓰던 왕관이 면류관이다. 그러나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 천, 비단이나 말총 등으로 만들어 더 가벼운 복두관을 써, 평상시에는 복두관. 즉위식, 종묘 제사, 조회 등 국가적 행사 때에만 면류관을 썼다. 이러한 풍조는 후대 왕조에도 이어져 송나라 때는 절상건이, 명나라 때는 익선관이 천자가 평상시에 쓰는 왕관이 되었다. 면류관 자체는 고대부터 시작되어 명나라 때까지 존속했지만 왕조마다 그 제도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가령 면류관에 늘어뜨리는 류에 들어간 구슬이 백옥인지 아니면 다섯 가지 옥 또는 일곱 가지 옥인지, 평천판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관모에 꽂는 비녀가 옥잠인지 아니면 금잠인지 등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청나라 때는 중화풍의 면류관을 사용하지 않고 만주족의 전통 관을 썼지만[1] 청조 멸망 후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를 자칭했을 때 잠시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류가 없다.
중화제국 위안스카이의 사진 | 명나라 만력제의 초상화.[2] |
2.2 한국
한국 역사에서는 삼국시대까지는 백라관이나 금관 등의 전통 관을 사용했으나 실용성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절상건으로,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익선관으로 대체되었다. 금관의 경우 금이 꽤 고밀도이다 보니 금의 비중이 높은 왕관을 쓰게 되면 목이 꽤나 불편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 표현에 있어서는 금을 능가하는 소재가 없기 때문에 그걸 불사하고 금제 왕관을 착용했던 경우도 많다. 그러나 신라가 진덕여왕 때 당나라의 복식 제도를 수용하면서 금관 대신 복두가 들어왔고, 태조 왕건의 초상화에서는 12면류관을 찾아볼 수 있으며, 1065년(문종 19) 요나라로부터 9면류관 9장복을 사여받았다. 고려 시대에는 관리들도 직급에 따라 면류관을 썼고 고려 말부터 신하들의 조복에는 금관[3]을 쓰게 되면서 면류관은 왕, 혹은 세자, 세손의 전유물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익선관이 왕의 평상시 왕관으로 자리잡았고, 이 때 면류관도 같이 들어왔는데 1403년(태종 3)에 명나라로부터 사여받은 이후 대한제국 때까지 면류관은 행사용으로만 사용했다. 결국 특별한 날에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장교 정복과 의미가 비슷하다. 면류관을 쓸 때는 옷도 평상시의 곤룡포가 아니라 '곤복'이라는 더 복잡한 구조의 옷을 입는다.
2.3 베트남
베트남 응우옌 왕조 카이딘 황제 |
2.4 일본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일본도 덴노들은 면류관을 사용했다. 7세기 스이코 덴노 시절 관복을 정비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데,(발표하는 학회 모습) 다만 모양 차이가 크다. 그리고 나중에는 정장까지 완전히 칸무리와 소쿠타이로 교체되면서 상당히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면류관을 쓴 고다이고 덴노* 잘 보면 그냥 스이에이노칸 위에 괴이한 평천판과 면류를 얼려놓은 모양새... | 고메이 덴노가 생전에 쓰던 면류관.* |
재현 복원한 모습(위)와 당시 복식을 고증해 그린 그림(아래).* |
3 구조
면류관의 구조를 보자면 관모 위에 '평천판(平天板)'을 얹어놓았으며 앞뒤로 '면류(冕旒)'라고 하는, 실에 구슬을 꿰어놓은 것을 매달아 만들었다. 그런데 무조건 아무렇게나 만드는 게 아니라 임금의 관모이니만큼 만드는 것부터도 격식이 중요했다. 명나라 천자가 쓰는 면류관과 조선 임금이 쓰는 면류관은 면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명나라 천자의 면류관은 면류가 앞뒤로 각 12개씩 24개를 달아서 만들도록 되어 있는 반면 조선 임금의 면류관은 앞뒤로 각 9개씩 18개를 달아서 만든다. 면류에 꿰는 구슬도 아무렇게나 꿰는게 아니라 황제는 붉은색-백색-푸른색-누른색-검은색의 순서로 한 줄당 12개를, 조선 국왕은한 줄당 9개를 꿴다. 양 옆에는 간신배들의 아첨하는 소리로부터 귀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청옥을 귀 부분에 늘어뜨린다. 곤복도 명나라 황제는 12가지 무늬가 들어간 12장복, 조선 왕은 9가지 무늬가 들어간 9장복으로 차별되었고, 조선 세자는 8면류관(구슬은 붉은색, 백색, 푸른색 3개 색만 사용하고 한 줄당 8개를 뀀) 7장복을 입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들어선 청나라는 만주족 고유의 황제복을 도입했기 때문에 익선관과 장복은 폐지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대한제국에서는 황제의 예를 따라 12면류관 12장복으로 승격되었다. 현재도 종묘제례 행사 재현 때 황사손 또는 황사손을 대신해 황제 역을 하는 분은 12면류관 12장복을 입고 참석한다.
삼국지 시리즈를 보면 헌제나 조환,장거, 원술 등이 면류관을 쓰고 있다.면류의 숫자를 세어보면 12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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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를 재현하는 문화행사로 고종 역을 맡은 사람이 9장복을 입고 9개의 면류가 달린 면류관을 쓴 모습이 보인다. | 종묘제례에서 대한제국 황제 역을 맡으신 분. 12면류관 12장복을 착용하고 있다. |
4 가시 면류관
성경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퍼지자 예수를 잡아서 처형하려는 로마 제국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로마 제국 황제가 쓰는 월계관을 본따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예수의 머리에 강제로 씌워서 가혹행위를 했다. 이때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유태의 왕(I.N.R.I.[4])이라는 명패를 십자가에 달았고, 예수가 피를 흘리며 강제로 쓴 가시관을 왕관이라 불렀다. 이후 동양 문화권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월계관을 면류관으로 번역한 것이다.
복음서 원문에는 그냥 '가시 왕관'(마가복음, 요한복음에서는 ἀκάνθινος στέφανος(thorny crown). 마태복음에서는 στέφανος ἐξ ἀκανθῶν(crown made from thorns). 누가복음에는 언급 없음)으로 나온다.
요한계시록 등에서 '면류관'으로 번역된 어휘 역시 원문에서는 그냥 στέφανο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