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의 역대 황제 | |||||
7대 철종 소황제 조후 | ← | 8대 휘종 현황제 조길 | → | 9대 흠종 인황제 조환 |
묘호 | 휘종(徽宗) | |
시호 |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 (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 |
연호 |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10월) 중화(重和, 1118년 11월 ~ 1119년 2월) 선화(宣和, 1119년 2월 ~ 1125년) | |
성 | 조(趙) | |
휘 | 길(佶) | |
생몰기간 | 1082년 11월 2일 ~ 1135년 6월 4일 | |
재위기간 | 1100년 2월 23일 ~ 1126년 1월 18일 |
1 소개
공부 따위 안한 영웅보다 더 멍청한 황제 생긴것부터가 참 무능하게 생겼다. '어디사는 환경운동가닮은것 같기도 하고
북송의 제8대 황제(1082 ~ 1135, 재위기간 1100 ~ 1125) 휘는 길(佶). 시호는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한마디로 요약하면 송나라 멸망의 원흉이자 암군. 그의 삽질은 당대에는 나라의 절반을 잃게 했고, 이후 송과 금 간의 원수 관계를 만들어 150여년 뒤에는 나라의 나머지 절반도 잃게 하였으니, 그야말로 혼덕공[1]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2 생애
6대 황제 신종의 11남이며 전임 황제 철종의 이복 동생이다.[2] 황자시절에는 단왕(端王)으로 불리었다. 항렬이 멀고[3]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라면 계승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종의 외아들 조무가 요절하고 철종 본인도 일찍 붕어하자 황태후(상태후)[4]가 직접 차기 제위계승자로 지명했다. 따라서 철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 지명 당시에도 신하들 사이에서는 '그 분 노는걸 너무 좋아하지 않나? 적장자라면 몰라도 황족자제를 지명하는데 꼭 이 분이여야만 하나?'라는 여론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는 당시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도 관련되어 있었는데 송 철종은 서출이었고 신종의 정처[5]는 철종의 모후[6]와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철종 사후 철종의 유지를 무시하고 철종의 동복동생이 아닌 이복동생인 휘종을 옹립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집안 기싸움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2.1 그의 천부적인 재능
파일:Attachment/송휘종/Example.jpg |
휘종의 수금체[7] |
휘종은 문인으로서 상당한 재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황제 고유의 필체와 서체를 고안하기도 하였으며, 시서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휘종이 개발한 서체인 수금체(瘦金體)는 자획을 가늘고 길게 뽑아 날렵하면서도 가냘픈 것이 특징인데, 후대의 역사가나 감정가들로부터 '글자에 기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약한 서체'라고 까이기도 한다.
휘종이 그린 도구도. 복숭아 꽃과 비둘기를 그린 그림이다. |
그리고 화가로도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휘종이 그린 그림들은 단순히 황제가 그린 그림이라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게 아니라 정말로 그림을 잘 그렸다. "꽃을 밟고 돌아가는데 말발굽에 향기난다 踏花歸去馬蹄香"이라는 제목을 화제로 내걸었더니 다른 화가들이 모두 데꿀멍할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림을 그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이 시절 이야기.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을 따르는 나비의 구도는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
문제는 그가 문인이 아니라 황제였다는 것이고 예술활동에 심취한 까닭에 국정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예대 나온 대통령이는 문인으로 능력이 있을 뿐더러 나름 명군으로 대접받는 선덕제와 대비되며 명나라 말기 취미생활로 국정을 내팽겨친 천계제의 프리퀄 격이기도 하다. 루이 16세 : 나랑 비슷한 사람이 여기 있었네
2.2 취미생활을 위해 나라를 파탄내다
우선 선대 황제였던 송신종, 송철종이 왕안석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국고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놨는데, 이걸 고귀하신 황제님께서 예술활동한다는 이유로 파탄내버렸다. 그러자 채경 등의 신하들이 나서서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둔다거나, 소유문제가 애매한 토지들을 일괄적으로 국고에 환수시키는 방식으로 파탄난 국고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고태후는 구법당을 다시 복권시켰으나, 송휘종은 신법당의 채경을 재상으로 등용했고, 채경은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모조리 몰아내버렸다.
기암괴석을 그린 송휘종의 그림. 이런 소재를 앉은 자리로 옮겨오면 자기는 좋지만... |
그리고 새로운 정원을 꾸민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부과하여 숲을 밀어버리고, 운하를 따라 기석들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가는데 집이 있으면 집을 무너트리고 길을 내기도 했다. 워낙 이 기암괴석을 실고 가는 배가 많아서 '화석강' 이라고도 불렀다. 수호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양지 도 이 화석강 감독이다가 배가 침몰하자 죄인이 되어 도망다니게 되는 등 학정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말 그대로 암군.
결국 시달리다 못한 민중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방랍의 난이 있다. 더불어 수호지의 주인공인 송강 역시 이 시기 산동지역에서 활동하던 반란군 지도자 가운데 하나이다. 반란이 점점 격화되고 방랍의 경우 아예 독립국가를 세우는 수준에 이르자 요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조성하였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그 결과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지만, 송나라의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와중에 금나라가 건국되자 이이제이책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박살낸 후에 또 요나라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박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힘 및 자신의 세력의 규모 정도는 확인하고 이이제이를 해야 하는데 머리가 나쁜 휘종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고, 역시나 요나라 마지막 황제로 여기저기 도망치던 천조제가 결국 패하여 붙잡히면서 이런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게다가 대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니...
2.3 정강의 변
이에 분노한 금태조가 군대를 파견하자 깜짝 놀라 아들 조환을 송흠종으로 양위하고 자신은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현실의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남쪽으로 도망쳐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려 하였다. 결국 금나라와의 화의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송흠종이 어떻게든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쳤던 휘종을 개봉으로 다시 데려오는 바람에(...)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아버지!! 결론적으로 위험한 개봉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군대가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진정될 리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깨끗하게 갈려 나가고 뒤이어 개봉이 함락당하고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혔다. 이 때 황자, 황녀, 황후, 후비, 제왕, 왕비 등의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 때 끌려간 황족들은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태조의 지시로 전직 황제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8].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금나라 관기들의 기방인 세의원으로 보내져 창기(娼妓)가 된 경우도 많았다. 서진 시대의 영가의 난처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손들의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개중에는 여러 남자들의 성노예가 되어 끌려다니다 간신히 남송으로 도망쳐 온 공주가 진짜를 사칭한 가짜라 해서 처형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 공주가 사실은 진짜인데 그녀와 같이 금나라에서 돌아온 고종의 모후 위씨가 자신이 금나라에서 다른 남자를 모신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공주를 모함해 죽인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국 땅에서 온갖 수모를 겪다 간신히 돌아왔는데 계모에게 모함당해 죽임을 당한 게 된다. 사실이라면 진짜로 불쌍하다.[9] 원래 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이렇게 금나라로 끌려나고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동생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으로 추정되는송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송태조의 자손들에게 송태조만한 역량은 없었으니, 결국 비슷한 짓을 하다가 망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를 내려 조롱하였다. 사실 금으로 끌려가면서 휘종은 '기생 이사사와 함께 끌려가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이처럼 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기생과 함께 가게 해달라는 말을 주절대는 꼬락서니가 금에서 보기에는 혼덕공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휘종 때문에 북송이 망했다는 주장도 사실 틀린 것도 아니고. 그 외에도 그를 금나라로 끌고 갈 때 한 백성이 술과 고기를 올리자 호송하던 금나라 대장은 그 술과 고기를 땅에 버린 다음 강제로 주워먹게 했다. 거기에 도중에 쉬는 도중 술을 마시던 대장이 흠종의 황후 주씨에게 술을 따르도록 권했고 주씨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 때 한 대신이 금나라 놈들은 인면수심의 인간말종이다!라고 부르짖자 그는 끌려나가 맞아 죽었는데, 이것을 본 금나라인들은 "요가 망할 때는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이가 그래도 족히 10명은 되었는데, 송이 망한 지금은 의를 위해 죽는 자가 저 사람 단 한 명뿐이구나!" 라고 서로 말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건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것이 요와 달리 송은 이 시점에는 완전히 망하지는 않고 그나마 충성스러운 인재들은 다 남송으로 갔기 때문. 남송이 망할 때는 그래도 문천상이나 육수부 같은 인물이 나와서 나라가 망할 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사태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송나라가 요나라의 인구수의 10배는 되었던 걸 감안하면[10] 안습이긴 하다.
2.4 타지에서 죽다.
결국 금나라의 땅 오국성[11]에 끌려가 한 칸자리 방에 수감되어 망국의 한을 품다 1135년 숨을 거뒀다.[12] 그나마 아들 고종이 협상 끝에 유해를 송환받을 수 있었으며 송환된 다음 고종이 황릉지대로 정한 소흥 일대에 마련한 영우릉에 묻혔다. 고종 역시 이 일대에 묻혔으나, 이 후 도종까지 남송 역대 황제, 황후, 후비, 제왕 등 황족들은 대대로 이 지역에 묻혔다.
그러나 불행하게 죽은 휘종은 무덤인 영우릉이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 세조때 다른 남송 황릉과 함께 라마승이었던 강남석교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황야에 버려졌고 소뼈, 말뼈와 함께 섞여 상자에 담겨져 진남탑(鎭南塔)[13] 아래에 묻혔다.[14]
그 후 폐허가 된 소흥의 남송 황릉 지역은 명나라 때 주원장이 복구를 명했고, 청도 전 왕조를 계승하는 측면에서 이를 존중했지만 나라가 개판이 된 청나라 말기에는 다시 폐허가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1950년대 문화대혁명의 파괴와 1960년대 석재를 사용하기 위해 석재를 빼내가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구릉 일대가 차밭으로 마개조되었다. 그나마 1989년이 돼서야 공현[15] 일대의 북송 황릉 지역과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기 시작한다. 그나마 북송 황릉은 봉분이라도 남아 있는데 비해 남송 황릉은 개간되어 봉분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3 그의 사후 평가
예술에 심취해 나라를 오지게 말아먹었기에 조선 포함 후세의 성리학자들이 군주의 예술활동을 반대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됐다. 명나라 만력제의 스승인 장거정은 '황제는 글씨만 쓸 줄 알면 됐지. 예술에 심취하면 송휘종처럼 될 수 있다.'며 만력제의 예술활동을 반대했다. 문제는 만력제에게 파업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는 점은 까먹은 것. 이는 중국만 아니라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미쳐 조선 성종도 시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님 휘종처럼 되고 싶나여?'하고 대차게 까여야 했다. 연산군이 예술에 좀 심취하긴 했지만 그의 말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휘종의 업적이 없다고만은 할수 없는데, 휘종시기의 북송과 이후의 남송의 미술은, 미술사학적으로 중국미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휘종의 예술사랑은 궁내 도화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고, 재야 미술가 발굴과, 송나라 이전 미술품 들의 평가도 대대적으로 이루어 졌다. 초일류 갤러리스트 북송시기에 이성과 범관 등 걸출한 미술가는 물론, 휘종 자신도 서예 뿐만아니라, 그림에 능해, 미술가로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 냈다. 때문에, 송나라의 그림은 중국미술사에 남을 걸작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그것들이 문화대혁명 때 죄다 작살났다는 사실은 잠시 잊자.
중원의 황제는 일개 제후국의 왕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산이 생기고 없어지는 와중에, 그는 그 막강한 힘을 예술과 사치품에만 쏟았다. 그의 예술사랑은 북송은 물론이거니와, 남송대에 풍부한 예술자원과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며, 중국이 자랑하는 도자기 문화도 그 기법이 완숙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산과 개봉의 불야성과 송의 막대한 경제력에도 한 몫했을 것이다. 중국의 다양한 레시피도 송 대에 완성 되었다고 할 만큼, 문화적으로 완숙된 시기였으며, 현대에도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으나, 그것은 곧 '사치'를 의미하며, 사치는 언제나 망국에 다다르는 요소 중 하나 였다. 송 휘종은 중국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그는 동방을 아우르는 천자 였다. 중국 미술과 문화의 활로를 열었지만, 북송의 망국의 길도 열어버린 황제이다. 대국적인 경영과 경제측면에서 고려한 문화 융성이 아닌, 개인의 단순히 취미과 사치를 위해, 대륙을 뒤엎는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4 트리비아
- 휘종은 피휘에 매우 엄격해서, 황제를 상징하는 용(龍), 천(天), 군(君), 옥(玉), 제(帝), 상(上), 성(聖), 황(皇)의 여덟 자로 이름이나 자호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미 지은 이름과 자호도 고치게 했다. 명군이나 하다못해 능군이었으면 이런 조치도 욕을 크게 먹진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암군인 휘종이라... 그래서 수호전에서 이규등 여러 양산박 호걸이나 반란군에게 송휘종의 휘를 막 부른다.
- 전설에 따르면 휘종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 신종의 꿈에 휘종과 마찬가지로 예술가 황제로 유명한 남당의 3대 황제 이욱이 나타나 신종을 알현하였다고 한다.[16]
망국의 복수를 하려고 환생했나?
- 시대적 배경이 되는 수호지에도 등장한다. 바탕은 선량한데 놀기만 좋아하는탓에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순진한 황제로 나오다가 개봉부에 잠입해 이사사와 의남매가 된 낭자 연청을 통해 양산박 호걸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이들을 용서하고 장군으로 임명하는 대인배로 등장. 하지만 이들이 각지의 난을 평정한 뒤에는 이들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나중에 이를 알고는 크게 슬퍼하며 그들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준다. 휘종보다 그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하던 4명의 간신(고구, 채경, 동관, 양전)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에 불과하고, 북송 멸망의 중심은 애시당초 휘종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4명의 간신들도 모두 휘종이 어리석은 것을 이용하여 국정을 농당한 것이다. 본래 송나라는 황제권이 막강했기에 황제의 의도에 따라 정국을 운영하고 관직을 편성하는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채경 등 간신들을 등용하고 지나친 예술 탐닉과 사치로 국정을 파탄낸 1차 책임은 휘종 자신에게 있기에 수호전에서 지나치게 휘종을 옹호한 면이 있다.
-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이나 수호지에서 휘종은 희대의 멍청이로 나온다. 수호지의 리메이크작인 수호지 2000에선 초반[17]빼고 아예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실제로도 멍청이가 맞았다.
- ↑ 굴러들어온 복을 망친 얼간이.
- ↑ 생모는 진귀인(陳貴人)으로서, 흠자황후(欽慈皇后)에 추존되었다
- ↑ 철종의 이복동생이지만, 철종의 생존한 동생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였다
- ↑ 신종의 황후였던 흠성황후 상씨로 철종과 고종의 할머니이다.
- ↑ 흠성황후 상씨(欽聖皇后 向氏)
- ↑ 흠성황후 주씨(欽成皇后 朱氏)
- ↑ 천지현황의 현玄자를 원元으로 쓴 것은 송 황실의 시조인 조현랑의 이름자 중 玄을 피휘한 것이다.
- ↑ 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 ↑ 사실 송고종의 항목에도 일화가 있듯이 위씨가 뻔뻔한 안면몰수의 철면피라는 것을 보면 진짜 이게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 ↑ 대충 요는 500만, 송은 5000만은 잡는다.
- ↑ 오늘날의 한반도 북부, 북한 함경북도 회령의 회령청년역 자리 라는 설이 있지만 오늘날 하얼빈 이란현 부근이라는 설이 정설이다.
- ↑ 다만 정강의 변 항목에도 나오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은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 ↑ 남쪽, 즉 남송의 기운을 진압한다는 주술적인 의미의 탑으로 도굴을 한 것은 양련진가가 남송의 부활을 막기 위해 건의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도굴에 있었으며 이런 짓을 한 것은 혹여나 죽은 황제들과 황후들이 자신에게 해를 입힐까봐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정복왕조도 어쨌건 이전 왕조를 계승한 것으로 정당성을 부여했기에 양련진가의 이 만행은 원나라 조정 내부에서도 당연히 문제가 되어 결국 주살되었고 그의 수하 승려들은 같이 주살당하거나 부장품 분배를 가지고 싸우다가 이미 죽은 경우도 있었으며 병으로 갑자기 모두 죽었다고 한다. 당시 원세조는 양련진가가 도굴한 보물들을 몰수해서 대도에 절과 탑을 지았다고 전해진다.
- ↑ 진남탑의 구체적인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진남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이와 비슷하지만 대치되는 기록이 있다. 양련진가에 의해 황릉이 비참한 피해를 입자 이를 비통하게 여긴 그 일대 주민들이 황야에 버려진 역대 황제와 황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상자에 담고 비단으로 싸서 감람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 대신 소뼈와 말뼈를 황야에 흩어놨고 이걸 자기가 버린 황제의 유해인지 알았던 양련진가는 완벽하게 속았다. 그런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감람나무를 찾을 길이 없다. 8백년 가까이 됐는데 그 나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진남탑이든, 감람나무이든 이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그래도 어딘가 땅 속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을거다. - ↑ 낙양 근처에 있다.
- ↑ 둘다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똑같이 나라를 말아먹었다.
그래도 이욱은 백성을 쥐어짠다던가 하는 폭정은 하지 않았다. - ↑ 고구가 건달이던 시절로 당시 단왕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