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14대 유례 이사금 석유례 | ← | 15대 기림 이사금 석기림 | → | 16대 흘해 이사금 석흘해 |
시호 | 기림 이사금(基臨 泥師今) | |
성 | 석(昔) | |
휘 | 기림(基臨) / 기립(基立) | |
생몰년도 | 음력 | ? ~ 310년 6월 |
재위기간 | 음력 | 298년 ~ 310년 6월(12년) |
1 개요
제14대 유례 이사금부터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16대 흘해 이사금까지 3명의 왕들의 자세한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기림 이사금은 조분 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자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나이 차이로 보아 아들일 가능성은 적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설을 따르면 아버지는 이찬 걸숙인데, 삼국사기에는 걸숙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 표기하고 있다.
2 업적
300년 정월에 왜와 화친하고 비열홀에 순행해 노인과 빈민들을 위문하고 식량을 하사했다. 이 때의 비열홀이 현재 비정되고 있는 함경남도 안변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고 있다. 경상도 지역도 다 제패하지 못한 3~4세기 신라의 상태에서 그 정도 북쪽까지 올라갈 능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록상으로는 지금의 춘천시 근방인 우두우에 이르러 태백산을 망제했고 그해 음력 3월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고 한다. 다만, 낙랑과 대방이 이 시기에 항복해왔다는 기록은 다소 믿기 어렵다. 꼭 신빙성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하고 봐도 낙랑과 대방의 항복기사는 아무래도 진짜 항복이 아니라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직전에 고구려와 맞대고 있는 지역인 비열홀에 순행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 때 신라가 비열홀까지 갔을 가능성도 없어서 이 기사 자체에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되돌렸다. 그리고 신라로 확정한 것은 후대 지증 마립간 때의 일이다. 서라벌의 음차인 신라, 사로, 사라 등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이걸 확정했다는 언급은 지증 마립간 대에 나온다.
유례 이사금과 더불어 가공의 왕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기록들을 살펴봐도 전부 후대에 충분히 끼워넣을 수 있을만한 기록들 뿐이고 그나마 그 기록들도 시대에 안 맞고 정확성이 낮아 보인다. 왜 가공의 왕이란 설이 있는지 자세한 설명은 유례 이사금 문서 참조.
3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二月 기림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장흔을 이찬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一月 왜국과 강화를 맺다
三年春二月 비열홀에 순행하다
三年春三月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오다
三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七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 샘물이 솟아오르다
七年秋九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하다
十三年夏五月 죄수들을 사면하다
十三年夏六月 왕이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