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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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15대 기림 이사금 석기림16대 흘해 이사금 석흘해17대 내물 마립간 김내물
시호흘해 이사금 (訖解 泥師今)
석(昔)
흘해(訖解)
생몰년도음력? ~ 356년 4월
재위기간음력310년 ~ 356년 4월(47년)

1 개요

신라의 제16대 왕.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사금 칭호를 쓴 마지막 왕이다. 또한 신라 역사상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으로, 아버지는 내해 이사금의 태자였던 석우로라 하고 있으나, 석우로는 249년 혹은 253년 경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죽은 딱 그 해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 나이는 100세(!)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수명상 신빙성이 낮다. 삼국사기에 흘해는 어리지만 나이 많은 사람의 덕이 있다며 왕위에 올렸다는 말이 나오니 더욱더 말이 안 된다. 그러기에 정말 석우로의 혈통이라면 아들보다는 손자 혹은 증손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머니는 조분 이사금의 딸인 명원(明元)부인이다.

2 석씨 왕실의 몰락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으로, 이후 석씨 왕실은 석씨 어머니를 둔 실성 마립간을 제외하고는 신라 왕계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더 먼저 왕위 계승에서 빠져버린 박씨 왕실은 이후에도 왕비를 배출하고 아주 오랜 후에는 잠깐이나마 다시 왕위에도 오르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라 볼 수 있겠다. 석씨왕실의 몰락에 관해서는 각종 설이 난무하고 있다.

2.1 족내혼으로 인한 몰락

석씨가 이렇게 몰락하게 된 데에는 족내혼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혁거세거서간부터 시작하는, 신라 개국시부터 존재했던 박씨와는 달리, 석씨는 석탈해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 동해 바다 건너 외부에서 온 세력들이었고 묘하게도 석씨는 족외와 혼인을 하면 자신들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배타성이 강해서였는지는 몰라도 같은 석씨 근친끼리 혼인하는 족내혼이 잦았다. 실제로 석씨 출신 왕인 내해 이사금도 같은 석씨를 왕비로 들인 기록이 있다. 이런 근친혼의 누적 부작용으로 결국 석씨들의 자손 단절로 이어졌다고 보는 시각이다. 석씨 왕실의 왕통이 자주 단절되곤 했던 것도 이런 족내혼에 의한 자손 단절의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이는 비슷하게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인 김씨가 개국시부터 존재했던 토착 세력인 박씨와 혼인관계를 통해 세력을 확장한 것과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자손이 자주 단절된 탓에 세력이 약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김씨에게 권력을 내줄수밖에 없었던것이 석씨 몰락의 이유라는 추정이다.

비슷하게 나중에 김씨 왕가의 성골 혈통의 단절도 진골을 배제하기 위해 근친혼을 계속하다가 결국 자손 단절로 이어졌다는 설도 있다.

2.2 골정계와 이매계의 대립

두 번째는 바로 석씨 내부 왕실계통의 대립 때문이라는 것이다.

석씨 집단은 9대 벌휴 이사금이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왕실 내에 장남 골정 계열(骨正)과 차남 이매 계열(伊買)로 분화되었다. 골정계는 상대적으로 석씨뿐만 아니라 박씨, 김씨와 개방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집단이며, 이매계는 석씨 족내에서만 폐쇄적인 혼인정책을 추구했다. 이 두 집단은 벌휴 이사금 시기부터 대립적인 소지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벌휴 다음인 내해 이사금은 일단 차남 이매계였으나 그 다음의 조분 이사금부터는 장남 골정계가 왕위를 독점했다. 두 집단의 정치적 대립은 이매계 핵심세력인 석우로(昔于老)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다. 석우로가 일본인들에 의해 화형당해 끔찍하게 살해당할 때 당시 왕이었던 첨해 이사금은 이미 김구도 계열 김씨와 정치적 연합을 맺어 석우로가 왜군에게 죽임당하는 것을 방관하였다. 석우로의 죽음으로 이후 이매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기에 이른다. 즉, 우로의 죽음은 당시 권력 구조를 골정계 중심으로 재편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정치적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던 구도계 김씨의 정치세력을 급격히 확대하는 발판이 된다. 그로 인해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이 뒤를 이어 왕위에 이르는데, 미추는 바로 구도계 김씨이다.

물론 미추는 일단 석씨의 사위 신분으로 왕위를 이은 것이라 미추 사후에는 다시 석씨 집단이 일단 왕위를 잇지만 이미 김씨의 도움이 없으면 제대로 나라를 이끌 수 없는 상태였음이 여러 사례에서 등장하며, 계속해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성장한 구도계 김씨의 입김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뒤 구도계 김씨가 고구려와도 손을 잡고, 뒤로 밀려난 박씨 집단과는 혼인정책으로 연합상태를 이루게 되었으니 석씨 집단은 결국 역사의 흐름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2.2.1 반론

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두 가지 설 모두 맞지 않는 것이 많다.

우선 족내혼으로 인한 몰락의 경우 당장에 석씨 왕실을 열었던 벌휴 이사금의 어머니가 김씨이다. 이미 여기서부터 석씨 왕실이 족내혼으로 이어온 집안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후에도 벌휴 이사금의 두 태자 골정과 이매의 부인도 죄다 석씨가 아닌 다른 성씨다. 우선 골정의 부인은 구도의 딸 김씨이고, 이매의 부인은 내례부인으로 지마 이사금의 딸로 추정되므로 박씨다. 이후 내해 이사금의 경우 골정의 딸과 결혼했고, 조분 이사금은 내해 이사금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족내혼이 되지만, 조분 이사금의 경우 박씨 성의 부인이 따로 또 존재한다. 첨해 이사금 이후 석씨 왕실의 왕들의 부인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미추 이사금 사후에 오른 석씨 왕들은 선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른다는 관습에 비추어보면 전부 미추 이사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김씨 성의 부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석씨 왕실의 족내혼은 실상을 뒤져보면 그다지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이후에 김씨 왕실에서 족내혼이 꽤나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맞지 않는다.

두 번째 설인 골정계와 이매계의 대립도 당시 신라 왕실의 계승원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설이다. 무엇보다도 조분 이사금은 골정계가 아닌 이매계의 사위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 위에서 말하는 설명 자체의 하나가 이미 망가진다. 두 번째로 석우로와 미추는 모두 조분 이사금의 사위 신분에 있었다. 한마디로 구도계가 골정계와 손을 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즉 우로가 아니더라도 미추가 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에서 첨해가 왕위에 오를 경우 미추의 왕위계승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첨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미추가 관여했다는 것이 높다고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위에서 나온 두 가지 설보다는 이미 미추의 즉위로 김씨가문이 강해진 상황에서 미추의 사위신분으로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대의 석씨 왕들이 제대로 된 세력확장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김씨 가문에게 왕위를 내줬다는 해석이 더 맞다고 본다. 그리고 석씨 왕실이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는 자신 세력의 피가 섞인 실성이 내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후 눌지가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석씨 왕실도 같이 몰락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본다.

3 재위

재위기간 내내 와의 전쟁에 시달렸다. 왜의 침입을 줄여보고자 즉위 3년(312년) 왜국 왕의 아들과 아찬 급리의 딸을 결혼시킨다. 왜는 그로부터 30여년 뒤 344년, 왜왕이 다시 공주와 혼례를 요청해오나 공주가 이미 결혼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사실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석우로가 왜인들에 의해 끔찍하게 화형당해 죽었던 걸 생각해보면 흘해 이사금은 일본이 죽도록 싫었을 것이다. 혼인 거부로 인해 왜는 다음해 345년 외교를 단절했고, 346년에 군사를 보내 금성을 포위하였으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방어한 후 퇴각하려 하자 기병으로 공격해 격퇴하였다.

즉위 21년(330년)에 벽골지를 개척했다고 하는데, 벽골지가 있는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는 당시 어떻게 봐도 백제의 영토다. 남의 나라, 그것도 적국에 방둑이 1800보나 되는 저수지를 쌓았다는 기사는 아무래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당시 신라 내에 벽골지라는 지명이 따로 있었던지, 아니면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잘못 기록되었다고 추정된다. 아니면 백제 측 기록이 흘해 이사금으로 기록되었던지. 즉위 41년인 350년엔 큰 홍수가 나서 관청과 가옥들이 다 떠내려가고 산이 13개(30군데라고도 함)나 무너졌다고 한다.

356년 사망했고, 아들이 없었기에 김씨인 내물 마립간이 다음 왕위를 잇는다. 이 때까지는 석씨가 완전히 몰락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음 세대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로 결국 석흘해가 석씨 마지막 왕으로 남게 됐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六月 흘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급리를 아찬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왜국 왕이 혼인을 청해 와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내다
四年秋七月 백성들이 굶주려 사신을 보내 구휼하다
五年春一月 아찬 급리를 이찬으로 삼다
五年春二月 궁궐을 중수하다가 비가 오지 않아서 그만두다
八年 봄과 여름에 가물어서 왕이 죄수를 사면하다
九年春二月 농사에 방해되는 일을 금지시키다
二十一年 벽골지를 만들다
二十八年春二月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二十八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五年春二月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나 거절하다
三十五年夏四月 폭풍이 불다
三十六年春一月 강세를 이벌찬으로 삼다
三十六年春二月 왕이 문서를 보내 국교를 끊다
三十七年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자 이벌찬 강세가 물리치다
三十九年 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다
四十一年春三月 황새월성 귀퉁이에 집을 짓다
四十一年夏四月 수해로 관청과 민가가 물에 잠기고 산이 무너지다
四十七年夏四月 이 죽다

47년이라는 긴 재위기간에 비하면 기사가 매우 빈약하다.
흘해 이사금을 끝으로 아달라 이사금부터 시작한 2권이 마무리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