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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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13대 미추 이사금 김미추14대 유례 이사금 석유례15대 기림 이사금 석기림
시호유례 이사금(儒禮 泥師今)
석(昔)
유리(儒理) / 유례(儒禮)
생몰년도음력? ~ 298년 12월
재위기간음력284년 ∼ 298년 12월 (12년)

1 개요

신라의 제14대 왕. 칭호는 이사금. 제11대 조분 이사금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나음 갈문왕의 딸 '박씨'라 한다. 하지만 조분 이사금의 비는 '석씨'인 내해 이사금의 딸이었던 아이혜부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조분 이사금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보는 경향도 있다.

삼국사기》에 "고기(古記)에는 제3대와 제14대 두 임금의 이름을 같이하여 유리(儒理) 또는 유례(儒禮)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유례인지 유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앞서 김씨미추 이사금이 석씨 왕실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다시 석씨인 유례가 미추 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도 아마 이전의 관례를 비추어보면 미추 이사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사위 신분으로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2 생애

2.1 출생 설화 - 가공의 왕?

출생이 기이하다. 어머니 박씨가 밤길을 가다가 별빛 안에 들어온 뒤 유례 이사금을 임신했고, 아이를 낳은 밤에는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고 한다. 기록만 본다면 아버지가 없는 셈이다.예수?? 더욱이 삼국사기 조분 이사금의 즉위 기록을 본다면 왕비는 내해 이사금의 딸인 아이혜 부인. 이건 정실 왕비가 둘 이상이거나 박씨가 후궁일 가능성, 혹은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기록만 놓고 봤을 때 아버지가 없다는 건 기이하다. 정통성을 매우 중요시하는 왕 입장에서 이건 치명적인 셈. 더욱이 3대 왕과 이름마저 유리로 똑같다. 이걸 염두해 두고 미추 이사금을 한 번 살펴보자.

미추 이사금 역시 김씨 세력에 의해 왕 계보에 가공으로 끼워넣은 전설의 왕이라는 설이 있다. 설화 속의 인물인 김알지의 7대손이라는 미추 이사금은 284년에 사망한다. 그런데 미추 이사금과 형제, 혹은 조카 사이로 알려진 내물 마립간실성 마립간은 402년, 417년에 사망한다. 무려 118년과 133년이라는 차이가 있고, 이 사이에 유례, 기림, 흘해 등 세명의 왕을 거친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미추왕과 내물왕 중 한 명은 실제 왕이 아닐 가능성이 점쳐지는데, 더 후대의 왕이자 업적과 행적이 비교적 뚜렷한 내물왕은 역사적 실재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대신 미추왕이 의심되고, 그 뒤를 이은 유례왕도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2.2 이서고국과의 관계

297년에는 경상도 지역 안쪽의 소국인 이서고국을 멸하였...는데, 그 과정이 좀 묘하다. 이서고국은 서라벌 근처의 작은 나라였는데 이런 나라를 치는데도 신라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서라벌까지 위협받다가 정체불명의 병사들이 나타나서 이서고국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병사들은 모두 머리에 대나무를 꽂고 있었고, 전투가 끝난뒤 홀연히 사라지길래 뒤를 따라가보니 미추 이사금의 능인 죽장릉에 대나무들이 수두룩하게 놓여져 있어서 무덤 속에 누워있는 미추 이사금이 보낸 귀신 병사들이었다...라는 게 기록의 내용.

학자들은 이를 김씨들의 사병으로 추측한다. 즉 이서고국과의 전투는 본래 석씨 왕인 유례 이사금의 주도하에 석씨 세력들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신라 전체가 아닌 석씨 세력의 전력으로만 상대하다보니까 의외로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되려 위기에 빠지자 유례 이사금이 결국 김씨들에게 SOS를 쳐서 도움을 청해서 김씨 세력의 사병들이 출동해 이서고국을 멸망시켰다는 해석. 이는 역으로 보면 이때쯤부터는 비록 석씨 세력이 왕위에 있어도 군사력이나 여타 세력이 상당히 약했다는 의미로 볼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전승으로 이서고국이 신라를 침공했을 때 금관국의 왕 거질미왕에게 HELP를 요청했고, 이에 거질미왕이 "너네 신라 땅에서 안 꺼지면 내가 너네 줘 팬다?"라고 이서고국을 협박해서 물러나게 했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실리지 않아 정식 사료로 취급되진 않는다.

2.3 왜국 원정 시도

그의 재위 연간에 의 공격이 특히 많아졌는데, 287년에는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 1천 명을 잡아서 도망갔고 292년에 사도성, 294년에는 장봉성으로 왜군이 쳐들어왔다. 이쯤되니 유례 이사금도 빡쳐서 왜에 대한 원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즉위 12년(295년)에 유례왕은 왜국원정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 "왜인들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으니 내 생각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서불한 홍권(弘權)이 만류하였다.

> "우리는 수전에 익숙지 못한데 모험을 무름쓰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면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까 우려되며,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백제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그만두었다.

당시 신라가 백제와 왜, 특히 그 중에서도 왜구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月 유례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二年春二月 이찬 홍권을 서불한으로 삼다
三年春一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다
三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四年夏四月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다
六年夏五月 왜병에 대비해 무기를 손질하다
七年夏五月 물난리로 월성이 무너지다
八年春一月 말구를 이벌찬으로 삼다
九年夏六月 왜병이 사도성을 함락하자 일길찬 대곡에게 구원병을 주어 보내다
九年秋七月 가물고 누리가 있었다
十年春二月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을 이주시키다
十一年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다
十一年秋七月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치다
十二年 왕이 왜국을 정벌하려다 실행하지 않다
十四年春一月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치다
十五年春二月 서울에 짙은 안개가 끼다
十五年冬十二月 왕이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