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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嘉鎭
1846 ~ 1922
188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에도 참여했다. 정부고관 자격으로 독립협회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일본에게서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한 사실이 들통나서 작위를 박탈당하고 중국으로 달아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류하였다. 그치만 그의 작위는 공식적으로는 박탈된것이 아니었다.
1922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성대하게 치뤄졌다.
김가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다만 그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