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조선의 귀족 신분을 가리키는 용어.

조선왕조에서는 제후국의 예에 따라 오등작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으나,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오등작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다가 경술국치 이후 친일파에 대한 보상의 일환으로 덴노의 칙명인 '조선귀족령'에 따라 작위를 수여하게 된다. 아래에서 볼 수 있듯 이완용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된다(…).

당연히 해방된 대한민국 사회에선 친일파로 분류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기준이 되었다. 다만 이완용이나 송병준처럼 악질적인 매국노를 제외하면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그냥 받은 경우도 많고 매국노의 자손이라서 작위를 자동 세습하기도 했기에[1] 조선귀족 작위만으로는 악질 친일파로 분류하기는 쉽지 않고 그 행적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한다. 병합시 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는 반납하거나 자살한 사람도 있으며, 극히 일부지만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도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 역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면서도,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등"은 예외로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2 명단

아래는 경술국치 이후 작위를 받은 자들이다. 물론 친일파매국노들. 다만 김윤식, 이용직 등은 자작작위를 받았으나 3.1 운동때 독립청원서를 보내면서 자작 작위를 박탈당한다. 덕분에 친일 혐의도 약간 벗게 되었다.[2] 남작 작위를 받은 김가진은 아예 망명을 하여 독립운동을 했으며, 유길준처럼 작위 수여 자체를 거부한 사람도 있지만 이 분들은 예외적인 경우고 대부분은 친일파에 속한다.[3]

여담으로 일제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조선인 신분으로 공작에 서임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구 조선 왕실의 직계인 이왕가에는 덴노 아래의 '왕공족' 신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 뒤에 붙는 '공(公)'이란 호칭은 단순한 존칭의 성격에 그친다. 일본에서도 왕실 방계나 조정원로가 아닌 이상 공작 작위를 받은 사람이 없었으니, 식민지의 귀족들이야 뭐 당연하지 않았을까.[4]

3 1910년 병합당시 작위를 받은 자

3.1 공작

공작을 수여하지 않았으므로 왕공족 참고.

3.2 후작

  • 박영효 : 철종의 부마로서 왕실의 일원. 을사조약 이후 이완용 내각에 편입되었으나 순종의 퇴위를 반대하는 등 저항을 지속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엔 체념했는지 완전히 친일로 돌아서서 3.1운동의 서명도 거부했다.
  • 윤택영 : 순종의 두번째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아버지로 해풍부원군에 봉해진 조선의 마지막 외척이었다. 병합 당시 막대한 은사금을 받았으나 헤픈 씀씀이로 모조리 말아먹고 빚더미에 앉아 이 때문에 작위를 상실하기도 했다. 작위는 훗날 복원되었으나 끝내 부채를 탕감하는데는 실패하고 1920년 중국으로 도망가 숨어살다 1935년 객사했다.꼴좋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해적왕채무왕.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도망갔던 큰아들 윤흥섭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 이재완 : 흥선대원군의 조카이다. 한성은행 등 주로 금융쪽에서 열심히 나라를 팔아먹었다.
  • 이해승 : 역시 왕족[6] 으로 일본의 통치에 적극협력했다. 자신의 재산에 더해 앞서 서술된 윤택영이 파산할 때 임시로 맡긴 재산까지 합쳐 막대한 재산을 보유했으나, 본인은 한국전쟁중 납북되었고, 재산 중 318억원에 달하는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 이해창 : 왕족으로 이재완과 같이 한성은행 운영에 참가했다. 병합 전에 민족계몽운동 계열에서 활동했는데 특이하게도 병합이후인 1931년단군을 모시는 단군신전봉찬회의 고문을 맡아 민족주의 활동을 지속했다.

3.3 백작

  • 민영린: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 순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순명효황후와 남매지간이다. 1910년 병합당시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아편흡입죄로 작위를 박탈당했다.
  • 이완용: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트리플 크라운그랜드 슬램을 차지하는 친일파의 최고봉. 친일파 행적이 너무 많아 이 문단에 다 적기 힘드니 해당 항목을 참고하자. 친일행적의 대가로 받은 작위가 생각보다 높지 않아 놀란 위키러도 있을것이다.
  • 이지용: 을사오적. 당시 내부대신으로 조약체결에 찬성했다. 일제시대 막대한 부를 가지고 도박에 몰두했던 듯 하다.

3.4 자작

  • 고영희: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의 이관왕. 갑신정변에도 관련이 되어 있는 개화파의 일원이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고종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려 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으나 고종의 양위를 막지 못한뒤 자포자기했는지 이후 완전히 친일로 돌아섰다.
  • 권중현: 을사오적. 국방분야에 주로 종사했으며 조약체결 당시엔 농상공부대신을 맡고 있었다. 이후 의병들을 탄압하는 명령을 내리며 그 악명을 드높였다. 몇차례 암살위험에 노출되었으나 아쉽게도 목숨을 건졌다.
  • 김성근: 서예가로 유명했으며 그의 필체는 '미남궁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그리고 왠지 혹사를 잘 시켰을 것 같다
  • 민병석: 경술국적. 이완용과는 사돈간이자 절친이었다고 한다.끼리끼리 모여논 듯 민씨척족의 일원으로 1889년 평안감사를 지내면서 개막장 행보를 보여 탄핵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에 친구인 이완용을 따라 친러파에 속해 있다가 친러파가 몰락하자 역시 친구/이완용와 함께 잽사게 친일파로 갈아탔다.
  • 민영규
  • 민영소: 대표적인 민씨일족으로 임오군란때 집이 습격당하기도 했으나 집만 파괴되고 목숨은 건졌다. 갑신정변이후 상해로 도망쳤던 김옥균의 암살을 배후교사한 인물.
  • 민영휘: 역시 민씨일족의 거두로 임오군란때 집이 습격당했다. 초반엔 대표적인 친청수구파로 동학농민운동당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일을 맡기도 했고, 탐관오리로 지목되어 유배되자 청나라로 도망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친일파로 전향하여 작위를 받았으며, 경제에 밝아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휘문의숙과 풍문여고[7]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 박제순: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의 이관왕. 동학농민운동 당시 토벌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공주 우금치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 직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청파였으나 동학농민운동당시 일본군과 같이 작전을 수행하는 등 접촉을 가지다가 일본의 협박에 못이겨 을사조약에 서명을 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파로 돌아섰다. 이 일을 계기로 조약체결 반대파였던 한규설을 밀어내고 부수상의 자리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 송병준: 정미칠적.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의 양대거두로 불린다. 본래 서얼 출신으로 기생집에서 잡일을 하던 사람이었으나 우연히 민태호의 눈에 들어 민씨일족에서 일하게 되었다.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중국으로 파견되었으나 오히려 그에게 설득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8] 역시 자세한 내용은 해당항목을 참조.
  • 윤덕영: 경술국적. 후작작위를 받은 윤택영의 형이다.형제가 친일 조카딸의 간택으로 왕실관련 일에 종사했는데, 이 때 보여준 친일솜씨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조선왕실의 덴노 방문을 추진하려는 일본의 앞잡이로써 일주일간 고종을 쫓아다니며 압박을 가해 결국 승낙을 받아내었다.[9] 이 때의 활약은 일본인 관료였던 곤도 시로스케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 한일 병합 이 후 중대한 안건을 해결하였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경술국치 당일. 동생인 윤택영, 민병석 등과 함께 대궐의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했으며 조카딸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자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뺏어다 일본에게 갖다 바쳤다.
이렇듯 고종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행적 때문에 1919년 고종이 사망했을 때 독살설의 배후로 강력하게 지목되기도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윤덕영은 고종의 장례식 때 왕실장례에 참석한 민간인들에게 명예직이나마 관직을 내린다는 조선시대 법을 이용. 조선총독부의 직원임명장을 위조해 장례참석인원들에게 팔아먹었다가 물의를 빚었다.본격 고인드립 당시 이왕직에 근무하던 곤도 시로스케가 쓴 회고록 '이왕궁비사'에서는 이왕비 전하(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왕실의 지친이라는 사람이 막장짓한다고 대차게 깠다.
  • 이근명: 을사조약 체결당시만 해도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1907년부터 본격적인 친일로 돌아섰다.
  • 이근택: 을사오적. 무인집안 출신으로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바친 일을 계기로 관직에 올랐다. 을사조약 체결당시 군부 대신으로 조약체결에 찬성하고 집으로 돌아와 "우리 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야 이...[10]
  • 이기용: 왕족으로 별다른 능력은 없었는지 그저 왕실관련 업무에만 종사했다. 병합 이후 작위와 돈을 받았으나 이를 잘 관리하지 못해 한차례 파산하기도 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후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처벌을 면했고 병합당시 작위를 받은 귀족 중 가장 최근까지 살아 있었다.[11]
  • 이병무: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이관왕. 무관출신으로 이른시기부터 친일파로 활약(...)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위기에 몰렸을 때 고종이 양위를 거부하자 고종의 앞에서 자해소동을 벌여 결국 양위에 동의하도록 했다. 이후 정미신협약 때는 군부대신으로서 조약체결에 서명했고 조약체결로 해산된 군대가 해산명령에 불복하고 한양시내에서 봉기 시가전을 벌이며 저항하자 진압을 지휘하여 자신의 옛 부하들을 자신의 손으로 괴멸시켰다.
  • 이완용: 왕족출신으로 앞선 이완용과는 동명이인이다.
  • 이재곤: 정미칠적. 정미신협약 체결때 학부대신으로 조약체결에 찬성하였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을 했다. 한일 병합 후에도 불교와 왕실을 중심으로 친일활동을 꾸준히 전개했으며 광나루에 별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호화롭게 살았다. 3.1 운동 당시 권중현과 함께 작위반납을 원했으나 일본에 의해 거부당했다.
  • 이하영: 오성 이항복의 후손.[12] 일찍이 가계가 몰락하여 행상을 하는 등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으나 개화기 당시 조선에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전무했던 영어를 어느정도 익히는데 성공하여 당시 의료선교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알렌 등의 통역을 맡으며 출세했다. 이후 외교관련 업무에 종사하며 열심히 나라의 이권을 외국에 팔아넘겼다. 찹쌀떡 행상출신에서 고위관리로, 다시 친일파로 돌아선 그의 기구한 행적이 흥미를 끌었는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일화를 방영하기도 했다.[13]
  • 임선준: 정미칠적. 조약체결후인 1908년 탁지부(재정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의 대신으로 취임하여 일본소유의 군용지와 철도용지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주고 의병에게 살해된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도대체 어느나라 장관인지 모를 정도로 친일에 몰두했다. 이완용과는 사돈사이.
  • 조민희: 경술국적. 이완용의 처남이다. 이놈의 집안이 진짜 한일병합조약 체결 당시 고종의 개인적인 일을 담당하는 승녕부총관의 자리에 있었으나 고종을 지키려들기는 커녕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고종과 왕실을 압박해 조약체결을 이끌어냈다. 병합 후 막대한 은사금을 받았으나 관리를 잘 하지 못해 파산했다고 한다.
  • 조중응: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의 이관왕. 일찌기 해외로 여행을 다니고 돌아와 러시아 등과 대립하고 일본과 친해야 한다는 북방남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청일전쟁직전 의친왕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본격적인 친일파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당시 법부 형사국장으로 명성황후의 폐비작업을 지휘하는 등 사후처리에 가담했다. 이후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여기서 일본인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문제는 그가 이미 유부남이었다는 것. 훗날 상황이 호전되어 귀국했을 때 이 일본인 부인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기다리고 있던 전부인은 이 황당무계한 사건에 빡쳤고 말썽이 벌어지자 고종이 중재에 나서 두명 다 정실부인으로 인정하고 같이 살도록 조치했다.뭐야 이 막장드라마는

3.5 남작

  • 김가진: 안동김씨로 작위를 받았으나 3.1운동이 일어난 후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당연히 작위는 박탈.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 사망하고,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계속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김의한은 6.25전쟁 때 납북되고, 정정화는 1982년, 김의한은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으나, 김가진은 남작 작위를 받은 이력 때문에 작위를 버리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음에도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는 항일 행적을 인정받아 올라가지 않았다.
  • 김병익: 안동김씨 일족으로 흥선대원군 집권시절엔 기를 펴지 못하다가 민씨일족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야 관직에 올랐다. 병합 당시 원로대신으로 작위를 받았으나 훗날 작위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14] 그의 아들이 작위세습을 거부하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났다가 소식이 끊어졌다 카더라
  • 김사준: 의친왕의 장인으로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서예실력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병합직후 남작작위를 받았으나 1917년 고종망명을 꾀하는 해외독립운동조직과 연계하고 있던 것이 발각되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옥사했다. 이를 인정받아 친일인명사전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 김사철: 암행어사 등을 역임했다. 한일병합 이후 남작의 직위가 내려지자 큰 잔치를 열어 기쁨을 표시했다고 한다.좋텐다
  • 김영철
  • 김종한: 젊어서 개화파 관료로 정계에 투신했으며 이 때 안중근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양반답지 않게 이재에 밝아 고리대금업으로 재산을 불리고 있다가 친일로 전향한 후엔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처럼 재산축적에 열을 올렸다.
  • 김춘희
  • 김학진: 척화파 원로관료로 개화기 반일활동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 중에서도 굉장히 명망높은 사람이었던 걸로 보이며 이 명성을 바탕으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라도 감영감사로 임명되어 농민들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 때 그는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전면수용하여 1차 농민봉기를 종료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당시만 해도 최익현을 옹호하고 일본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일본 헌병대에 구금될 정도로 반일활동을 벌였으나 결국 친일로 돌아서 병합이후 일본이 내려준 작위를 받았다.
  • 남정철: 본래 성리학자 출신으로 수구파였다. 갑신정변때 김윤식과 함께 청군출병을 요구해 개화파의 정변을 좌절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아관파천때도 고종의 환궁을 압장서서 교섭할 정도였으나, 이후 정적인 이완용과 협력해 나라를 팔아먹었다. 글씨를 잘써서 덕수궁 현판을 쓰기도 했다.
  • 민상호
  • 민영기: 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황국협회 창설에 관여하여 독립협회 해산에 기여했다. 을사조약 당시 한규설과 함께 마지막까지 조약체결에 반대한 인물이었으나 한규설과는 달리 끝까지 반일을 고집하지 못하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로 취임하며 친일로 돌아섰다.
  • 민종묵: 민씨 척족. 을사조약 체결 당시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1910년 병합 당시 남작 작위를 받으며 슬그머니 친일로 돌아섰고 1911년 매일신보에 병합 1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올리며 빼도박도 못하는 친일파가 되었다.
  • 민형식: 민씨 척족에서 국방분야를 담당하던 사람으로 삼도수군통제사등을 역임했다. 그의 작위는 세습되지 못했는데 민형식의 아들 6명이 모두 아편중독자이거나 전과범이었기 때문이었다.
  • 박기양: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척 요구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격렬하게 반발하여 상소를 올렸고 이 때문에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낙향했다. 그러나 훗날 일본에게 협력하여 친일파로 돌아섰다.
  • 박용대: 당대 유명석학으로 시문에 능했으며 1906조선시대의 백과사전인 문헌비고의 증편에 총책임자로 참여하여[15] 1908년 '증보문헌비고'라는 이름으로 고종에게 진상했다. 병합 후 회유책으로 제시된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유학자들과 서예관련 협회에서 일하며 친일행위를 했다. 예전 일본 탐방시 후지산에 관련된 시를 남겼다 한다.
  • 박제빈
  • 성기운
  • 윤웅렬: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온건개화파. 별기군의 총책임자였으며 이 때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임오군란 때 일본 대사관에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군인들의 표적이 되어 집이 파괴되기도 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여기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1910년 작위를 받았으나 1년만인 1911년 사망했다. 그의 온건개화파로서의 생전행적[16]과 작위만 받고 관직엔 나가지 않은 점. 작위를 받은지 1년만에 사망한 점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견이 있다. 일단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었다.
  • 이건하
  • 이근상: 을사오적인 이근택의 동생.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케이스이다. 형의 위세를 등에 업고 빠른 시간동안 출세했다.
  • 이근호: 이근택과 이근상의 형으로 이씨 형제의 맏이. 이들 형제들은 5명 중 3명이 작위를 받고 그 아들 3명까지 작위를 세습해 모두 6명의 작위자를 배출한 뼈대있는(...) 친일집안으로 세상에서 이들 5형제를 일컬어 오귀(五鬼)라고 불렀다고 한다.
  • 이달용: 후작인 이재완의 아들이자 정미칠적인 이재각의 조카.역적의 피 음서제도를 통해 1899년부터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처음엔 한성학교 교장 등 교육관련 업무를 보다가 차츰 외교쪽 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아버지나 숙부와는 달리 적극적인 친일을 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을사조약 등 시대의 격랑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은 채 각종 사절단업무를 맡았다. 한일 병합 이후 관직을 사퇴했으나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친일인명사전 등 각종 명단에 친일인사로 포함되지만 앞서 말한대로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 이봉의
  • 이용원: 원로 유학자로 수구파의 거두였다. 일찍이 유배된 최익현의 석방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최익현과 친밀한 관계였으며 을사의병이 봉기할 때 이런 명성 때문에 최익현, 노병대 등의 의병장들이 그와 계획을 의논하거나 참여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용원은 의병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며[17] 결국 한일병합 이후 남작작위를 받았다. 윤웅렬과 같이 작위를 받은지 1년만에 죽은점과 생전 행적때문에 친일행위에 논란이 있으나 일단 작위를 받은 사실을 중요하게 여겨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 이용태: 동학농민운동 발생 초기 안핵사로서 봉기를 진정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내려갔으나 봉기를 진정시키기는 커녕 강압적인 탄압을 일삼아 오히려 농민들의 기세를 천원돌파하게 만들어버려 파직되었다. 결국 이완용에게 붙어 친일파로 전향했다.
  • 이윤용: 이완용의 배다른 형제. 원래 이완용의 아버지인 이호준은 이윤용 외엔 자식이 없었으나 이윤용이 서자였던 관계로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다. 이후 형제는 격동의 개화기를 미꾸라지처럼 이러저리 헤엄친 끝에 친일파로 성공을 거두었다.(...) 징글징글하게 오래 살며 동생인 이완용의 임종까지 지켜보고 1939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이재극: 을사조약 체결 당시 궁내부대신으로서 고종을 협박하는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오죽했으면 일본 메이지 덴노 생일에 일본 공사관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축배를 들고 '천왕폐하 만세" 를 삼창하는 기행을 선보였고 이 소문을 들은 고종이 핀잔을 주자 하는 말이 "신은 만세(萬歲)라고 하지 않고 반자이(ばんざい)라고 했나이다라는 병맛 넘치는 대답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재산 관리에 능했으나 그가 죽자 모자란 아들과 며느리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나 버린다.
  • 이정로: 을미사변때까지만 해도 수구파의 일원으로 친일파를 격렬하게 증오하였으나 이후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권력에 눈을 떴는지 친일파로 전향했다.
  • 이종건: 주로 국방과 치안쪽 업무를 담당하던 관료로써, 한규설의 절친이었으나 친구와는 달리 친일파로 전향해 부귀영화를 누렸다.
  • 이주영
  • 장석주: 젊은시절부터 비상한 수재로 명성이 높았다. 관직에 들어서고 난 뒤엔 친일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는 등 주로 언론쪽에서 일본의 후장을 열심히 빨았다. 이 공으로 작위를 받았는데 대개 이시기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병합 이후 나이도 들고 쓸모도 없어져서 별다른 공식활동을 하지 않는데 반해 장석주는 쓸데없는 노익장을 발휘해 3.1 운동 당시 조선총독부에 시위의 무력진압을 촉구하고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끝까지 추태를 부리다가 1921년 죽었다.
  • 정낙용
  • 정한조
  • 조동윤: 풍양 조씨 척족으로 권세를 누렸던 조영하의 아들. 아버지가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게 살해당한 후 한동안 개화파와 척을 지고 살았으나 진심으로 그런 것은 아닌 듯 이후 슬그머니 친일로 전향하여 군사분야에서 친일행위를 자행했다. 이근택처럼 조동윤도 부인이 두명인데 첫 부인은 개화파의 거두였던 홍영식의 조카딸로 어린나이에 조혼하여 살다가 아버지가 개화파에 살해된 뒤 집안에서 내쫓아버렸다. 그 후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다가 개화파가 복권되자 은글슬쩍 고종에게 부탁하여 옛 부인을 다시 맞아들였다고 한다.친일파라 그런지 삶도 미연시처럼 산다. 이런 은혜(?)도 모르고 그는 윤덕영과 함께 고종의 장례식을 일본식으로 치루는데 앞장섰다.
  • 조동희: 일제로부터 남작작위를 받았으나 1921년 작위를 박탈당했다.
  • 조희연: 동학농민운동 때 초기 진압군의 일원으로 토벌군의 물자공급을 맡았다. 친일파로써 조정의 청군소환을 반대했고 갑신정변이 벌어졌을 때 가담하기도 했다. 특의하게도 죽을 때 작위를 반납하여 그의 작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 최석민
  • 한창수: 외국어에 능통하여 외교쪽 관직을 계속 역임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과 점차 친해졌다. 한일 병합 후 구왕실을 관리하는 관직에 올랐는데 싸가지 없는 거침없는 언행과 왕족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사로 민중의 분노를 샀다. 특히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를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로 유학보내고 거기서 일본인과 결혼하게 하여 정신병을 앓게 한 일로 격렬한 증오를 샀는데 고종이 죽었을 때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4 병합이후 작위를 받은 자

승급한 자는 승급한 작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4.1 공작

위 항목과 동일하게 왕공족(공족) 참고.

4.2 후작

  • 박찬범: 박영효의 작위를 계승.
  • 윤의섭: 윤택영의 작위를 계승. 맏형인 윤흥섭은 독립운동에 투신했기에 차남인 그가 대신 작위를 계승했다.
  • 이달용: 1922년 아버지인 이재완이 사망하자 이전의 남작직위를 버리고 아버지의 후작직위를 승계했다. 이 때 무척 황송해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대로 병합 이후에도 적극적인 친일활동은 하지 않고 그저 이왕직의 관리로서 조선왕족들의 건강을 관리하고 가끔 일본황실에 행사가 있을때마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정도의 활동만 하였다. 다만 이 때 아버지인 이재완의 재산을 그대로 계승하여 부유한 삶을 살았으며 이는 비판받고 있다. 아들은 셋이 있는데 첫째 아들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둘째아들인 이철주와 셋째아들인 이계주는 각각 연세대학교와 숙명여대의 교수를 지냈다.
  • 이덕용: 이재각의 작위를 계승.
  • 이완용: 친일파의 거두답게 1920년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급했다. 그의 큰아들이 일찍 죽었기에 둘째아들인 이항구의 아들 중 첫째인 이병길을 큰아들의 양자로 들여 작위를 계승했다. 이병길은 한국전쟁 중 실종되었다.

4.3 백작

  • 고희경: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이었던 고영희의 아들로 일찍부터 영어 등 외국어를 배워 외교관련 직위에 종사했다. 부자가 2대에 걸쳐 중추원(조선총독부의 고문기관)에 소속되었다는 명성 아닌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16년 아버지의 자작작위를 승계하여 열심히 노력(…)한 끝에 백작으로 승급되었다. 이후 그의 작위는 아들인 고흥겸과 손자인 고중덕(이사람은 1923년생으로 태평양 전쟁때, 학병에 지원한 조선귀족 출신이다. 놀랍게도 현재도 생존해 있다!)라에게로 이어졌다. 절대 구마적이 아니다!
  • 송병준: 병합 당시 자작작위를 받았던 송병준은 뼈를 깎는 친일행위(…) 끝에 1920년 백작으로 승급된다. 그러나 그 직위를 오래 누리지 못하고 1925년 연회에 참석했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죽었다.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는듯. 그의 작위는 양아들인 송종헌에게 계승되었다. 근데 후작으로 승급된 이완용보다 끝까지 한단계 낮은 작위인게 어째 콩라인의 냄새가...
  • 이영주: 을사오적인 이지용의 작위를 계승.

4.4 자작

  • 김호규: 김성근의 작위를 계승.
  • 민병삼: 민영규의 작위를 계승.
  • 민충식: 민영소의 작위를 계승.
  • 민형식: 민영휘의 작위를 계승. 앞에 서술한 남작 민형식과는 동명이인이다. 아버지인 민영휘와는 여러모로 성격이 달랐으며 어려운 사람을 돕기를 좋아하고 의를 숭상했다고 한다. 글씨도 잘썼다고... 젊은시절 나철, 오기호 등의 을사오적 암살단에 거액의 자금을 댄 사실이 적발되어 유배되기도 하고. 신민회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1936년 아버지인 민영휘가 죽자 작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민영휘의 친자가 아닌 양자인데, 민영휘는 소실 소생의 서자들은 있었지만, 정실 소생의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양자를 입양. 민영휘와 성격이 다를만한 이유로 볼 수도...
  • 민홍기: 민병석의 작위를 계승.
  • 박부양: 박제순의 작위를 계승. 계승당시 10대였기에 청년자작으로 불렸다. 당시로선 드물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가 사고를 당해 기사가 나기도 하는 등 젊은나이부터 얻은 부와 권력으로 제멋대로 살았던 듯 하다. 훗날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다른 대부분의 친일파가 그렇듯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처벌을 면했다.
  • 윤강로: 경술국적인 윤덕영의 작위를 계승. 윤덕영의 손자로 윤덕영의 아들이 일찍 사망하자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였다. 반민특위에 소환되었으나 1940년 작위를 계승했을 때 나이가 20대 초반에 불과했고 곧이어 반민특위가 와해되었기에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후 병원을 경영했다고 한다.
  • 이규원: 이하영의 작위를 계승.
  • 이창훈: 을사오적인 이근택의 작위를 계승. 아버지와 함께 떵떵거리며 살다가 광복 2년뒤인 1947년 사망했다. 이창훈의 자손들은 작위를 계승받지 못했기에 반민특위의 조사결과 풀려났으며 이후 교육계에 활발히 진출했다. 특히 이창훈의 손자들이 공주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들을 역임하며 영향력을 끼쳤다.
  • 이택주: 왕족인 자작 이완용의 작위를 계승.
  • 이충세: 이근명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종승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해국: 정미칠적인 이재곤의 작위를 계승.
  • 이홍묵: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인 이병무의 작위를 계승.
  • 임낙호: 정미칠적인 임선준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임선재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조대호: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인 조중응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조원흥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조중수: 경술국적인 조민희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조용호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4.5 남작

  • 김교신: 김춘희의 작위를 계승.
  • 김덕한: 김학진의 작위를 계승.
  • 김세현: 김종한의 작위를 계승.
  • 김석기: 김사철의 작위를 계승.
  • 김영수: 김영철의 작위를 계승.
  • 김정록: 김교신의 작위를 계승. 김정록은 학자였는데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중이던 1932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작위가 계승되자 중국유학생으로 감시받고 있던 자신의 처지 때문에 작위를 계승하고 매달 생활보조비를 받으며 살았다. 훗날 1948년 반민특위가 결성되었을 때 자수하여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조사를 받은 뒤 불기소처분되었다. 그는 작위를 계승한 후에도 자신이 작위를 가진 귀족임을 주변에 알리지 않아 아무도 그가 귀족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시인 김지하, 미술사학자 유홍준 등을 가르쳤다.
  • 남장희: 남정철의 작위를 계승.
  • 민건식: 고영희 고희경 부자처럼 아버지인 민영기와 함께 2대에 걸쳐 중추원에 소속된 친일집안. 1927년 아버지인 민영기의 죽음으로 작위를 계승했다.
  • 민영욱: 민상호의 작위를 계승.
  • 민철훈: 민종묵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민규현, 증손자인 민태곤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민태곤: 민규현의 작위를 계승. 위의 민철훈의 증손자인데, 조선귀족 신분으로 무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에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조선귀족으로서는 유일하게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 민태윤: 민태곤의 작위를 계승: 민태곤의 남동생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상황에서 영문을 모른 채 억지로 습작했다고 하며, 이 상태로 광복을 맞았다.
  • 박경원: 박용대의 작위를 계승.
  • 박서양: 박제빈의 작위를 계승. 독립운동가 박서양과는 동명이인이다. 아들이 없어 박승방을 양자로 들였는데, 박승방은 작위계승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기에 작위가 소멸되었다.
  • 박승원: 박기양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박정서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성주경: 성기운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성일용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규환: 이주영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경우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기원: 이봉의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강식, 증손자인 이홍재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능세: 이정로의 작위를 계승.
  • 이동훈: 이근호의 작위를 계승.
  • 이범팔: 이건하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완종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병옥: 이윤용의 작위를 계승.
  • 이원호: 이용원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창수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인용: 아버지인 이재극의 작위를 계승했다. 작위뿐 아니라 재산도 상당한 규모로 물려받았으나 방탕한 생활 끝에 탕진하고 부인과 재산문제로 소송에 휘말려 일제판 사랑과 전쟁을 찍은 뒤에 가까스로 승소했으나 이미 재산의 대부분은 중재역을 자처했던 박영효가 홀랑 까먹은 뒤였다.
  • 이장훈: 이근상의 작위를 계승.
  • 이중환: 이용태의 작위를 계승.
  • 이풍한: 이종건의 작위를 계승.
  • 이항구: 이완용의 차남. 일찍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았으며 대한제국시절부터 본격적인 관료생활을 시작했으며 한일합방 이후엔 구왕실을 관리하는 이왕직으로 이동했으며 고종실록 편찬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18] 이런저런 본인의 공로와 아버지인 이완용의 공로까지 합쳐 1924년 따로 남작작위를 받았다. 아버지가 나라팔아먹고 번 재산을 바탕으로 젊었을 때부터 놀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자란 모양이다. 참고로 1913년 한국 최초의 인명상해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가지가지 한다
  • 장인원: 장석주의 작위를 계승.
  • 정주영: 정낙용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정두화까지 작위가 계승되었다.
  • 정천모: 정한조의 작위를 계승.
  • 조중구: 조동윤의 작위를 계승.
  • 조중헌: 1921년 조동희가 박탈당한 작위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 최정원: 최석민의 작위를 계승.
  • 한상기: 한창수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한상억까지 작위가 계승되었다.
  1. 당연한 일이지만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의 혜택을 받은 자손은 그 혜택에 대해서 깔 수는 있어도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의 직접적 책임은 지지 않는다.
  2. 다만 이를 두고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1850~1927)선생은 김윤식의 자작 작위 박탈을 두고 왜 그럼 자작자리를 좋아라 받아들였냐며 깠었다.
  3. 이들 조선귀족 작위 받은 인물들 전부다 나라를 이끄는 정부 요인, 고위 관료,장관 급에 해당되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을때, 밤을 새워 큰 잔치를 열어 기쁨을 만끽했다고 한다.(제목: 敍爵者(서작자)의 喜悅(희열))
  4. 사실 조선 귀족의 후작 작위도 이완용과 그 후손을 제외하면 조선왕실 방계나 친인척에 한정되었다. 역시 조선 최강의 매국노다운 이완용
  5. 피를 이은 후손은 아니고 사도세자의 후손인 은전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6. 철종의 이복형 영평군의 양 증손자(!!)
  7. 1944년 민영휘의 증손 민덕기가 민영휘의 처 안유풍의 이름을 따서 풍문여학교로 설립
  8. 사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직후 부산에서 일본인과 조선 최초의 합작회사를 차리기도 했으나 분노한 군중들에게 가게가 개박살나 실패로 끝났다.
  9. 다만 고종 본인이 가지는 않고 아들인 순종을 대신 보냈다.
  10.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라고 발언했다고 전해진다.
  11. 언제 죽었는지는 불명확하나 1960년 한 잡지가 친일파의 현재행적을 조사하여 취재했을 때 서울 서대문구에 살아있었음이 확인되었다.
  12. 또 다른 후손인 이회영은 가산을 다 처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3. 이 사람의 손자가 그 유명한 이종찬 장군이다.
  14. 반민특위의 소환대상자 명단에서 김병익과 관련된 인물이 빠져 있다.
  15. 증편작업 자체는 1903년부터 시작되었다.
  16. 일부 친일행위로 보이는 일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급진개화파는 물론 친일세력과 깊이 관여하지 않았으며 갑신정변때도 소수의 급진적인 행동은 실패할거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17. 그래도 고종에게 말해 노병대에게 밀지를 내리게 하는등 간접적인 지원은 했다.
  18. 위원장은 일본인이었으며 이 때 편찬된 고종실록은 그다지 역사적 가치를 높게 쳐주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건 철종실록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