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개화를 주장한 정치세력을 일컫는 말. 조선말-대한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1 개화파의 태동
개화파의 기원은 박규수로 부터 비롯된다는게 대체적 견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효명세자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효명세자 사후 20여년동안 두문불출하다가 1840년대에서야 겨우 관직에 나아간 인물이었다. 박규수는 박지원,박제가,홍대용으로 대표되는 북학사상과 실학의 계승라인에 있던 인물로 서구문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1860년 애로호 사건으로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대패하면서 조선이 위문사행단을 파견했는데 박규수는 이 위문사행단의 부사로서 청나라를 다녀왔다. 베이징에서 서구 문명과 접한 박규수는 조선의 변화를 위해서는 문호개방과 서구문명 도입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박규수의 집안에 드나드는 이들로 부터 개화파가 태동하기 시작했는데 의원 출신의 대치 유홍기, 역관 출신의 오경석, 개화승이라고 불렸던 승려 이동인 등은 서구문명의 도입과 개항을 통한 국가발전을 모색하고 논의를 나누던 인물들이었다. 1870년대에 활동한 이들을 제1세대 개화파로 부른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집권기동안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들은 이런 자신들의 주장을 펴기 어려웠다. 고종대에 이르러 박규수는 출세가도를 달렸고 평안도 관찰사에 있던중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겪게되고 이후 다시 청나라에 사행사의 정사로 다녀오게 된다. 이때 청은 아편전쟁의 패배에 서구문명을 도입하는 양무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박규수도 개화사상을 더욱 공고하게 하게 된다.
2 2세대 개화파와 개항이후
박규수의 집에는 젊은 인사들이 드나들면서 박규수의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는데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등이었다. 이들을 제2세대 개화파로 칭하고 후에 소위 급진개화파, 개화당이라 부르는 인사들은 이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다.
1세대 개화파의 큰 차이는 이들의 출신 배경이다. 의원이나 역관 등 중인 신분이었던 1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대부분 정계 명문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가령 김옥균은 양아버지가 김좌근의 조카인 안동 김씨 일원, 박영효는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한 왕실 부마였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등으로 조선이 강제적으로 개항을 하게 되면서 조선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종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했는데 이 수신사들은 근대화된 일본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 필요성을 크게 절감하게 되었다. 김윤식을 주축으로 청나라에 영선사가 파견되어 근대무기기술들을 배워오도록 하는등 조선은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이런 개화정책에 반발하여 위정척사파들이 등장해 만인소를 올리는등의 저항도 있었으나 개화정책은 거스를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3 개화파의 분화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은 지속되었으나 개화파들 사이에는 노선의 차이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화정책에는 다들 생각이 일치했지만 개화정책 추진의 속도와 청과의 관계설정이 노선의 차이를 불러 일으키면서 갈등을 드러낸것이다.
김홍집,김윤식등은 청의 양무운동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유교질서 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것이 개화 추진의 이상적 방향이라 여겼다. 이들을 후대에 온건개화파라 칭한다. 그러나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등은 개화정책의 추진속도가 너무 느리고 무엇보다 청과의 사대외교 청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들을 후대에 급진개화파라 칭한다.
이들의 사이를 벌려놓은 결정적 계기는 1882년의 임오군란이었다. 개화정책 추진에 반발하던 구세력들의 저항은 결국 청군의 진압으로 막을 내렸고 이로인해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나라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러면서 청과 연계가 있던 온건개화파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되면서 급진개화파들이 반발하게 된것이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박영교, 서재창,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정병하, 신응희, 오세창, 권동진, 고영희, 안경수, 유길준, 윤치호, 윤웅렬, 박중양은 급진개화파에 속하며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김기수, 김종한, 이상재, 이시영, 김가진, 신기선, 우범선, 이두황, 조중응, 조희연, 장석주, 지석영, 민영익은 온건개화파에 속한다.
4 갑신정변과 급진개화파의 몰락
급진개화파는 일본과 손을잡고 적극적으로 급속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급진개화파 계열의 젊은이들은 일본에 유학을 가서 근대문물과 기술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박영효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고 급진개화파의 정책 선전에 앞장섰다. 그러나 근대화 추진을 위한 재정문제 해결을 놓고 온건개화파와 청나라는 화폐발행을, 급진개화파는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해 맞섰는데 일단 고종이 양측의 손을 다 들어주면서 김옥균이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애썼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김옥균을 비록한 급진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다.
이러던차에 청나라가 청불전쟁으로 인해 조선에 주둔한 청군을 빼내 베트남으로 보내게 되자 김옥균은 이틈을 노려서 명성왕후의 척족과 사대당을 제거하고 온건개화파를 뒷선으로 물러나게 해 정국을 장악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홍영식이 책임자로 임명된 우정국 연회를 기회로 사대당 요인인 이조연, 한규직,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윤태준 6인과 환관 유재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일단 주도권은 급진개화파가 장악하였으나 온건개화파인 김홍집, 김윤식을 여전히 조정에 두고 형식적으로는 연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3일만에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이 들이닥쳤고 결국 급진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죽으면서 몰락하게 된다. 이로인해 급진개화파는 조정에서 완전 축출되고 온건개화파도 명성황후의 척족들과 사대당에 밀려 개화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해 근대화는 상당기간 지체되었다. 갑신정변의 진압이후 급진개화파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청나라의 조선내 입지만 더 높아졌고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실권자가 되어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나 청나라가 조선을 포기할때까지 10년여 세월을 허송세월하는 결과를 낳았던것.
5 개화파의 이후 행보
10년여의 허송세월끝에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패배하고 조선을 포기하면서 일본의 세력이 조선에서 급성장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중 경복궁 습격을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통제하게 된 일본은 온건개화파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김홍집 내각을 탄생시켰다. 특이하게 이 김홍집 내각에는 온건개화파들뿐만 아니라 박영효,유길준등의 급진개화파 출신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일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탓이었다.그리하여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을 단행하는데 갑오개혁은 조선 500년 역사이래 내려온 관습과 제도를 근대적으로 바꾸었지만 일본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에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후속조치로 을미개혁이 단행되지만 소위 단발령으로 대표되는 정책들은 격렬한 반발을 부르게되었고 을미사변과 엮이면서 거센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아관파천등을 겪으면서 친일세력은 몰락하고 친미,친러세력이 득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고종의 칭제와 대한제국 선포, 광무개혁등이 일어나게 된다. 한편 급진개화파 출신 박영효와 서재필등은 독립협회를 구성해 갑신정변에서 한층 발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내부적인 한계로 독립협회 활동도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일본이 점점 조선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개화파들의 행보들도 엇갈려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한 이들[1]과 일본에 붙어 친일파가 되어버린 이들[2] 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