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국의 역대 국왕 | ||||
초대 수로왕 김수로 | ← | 2대 거등왕 김거등 | → | 3대 마품왕 김마품 |
왕호 | 거등왕(居登王) |
시호 | 도왕(道王)[1] |
성 | 김(金) |
휘 | 거등(居登) |
생몰년도 | ? ~ 253년 9월 17일 |
재위기간 | 199년 3월 13일 ~ 253년 9월 17일 (54년) |
금관국의 2대왕.
1 삼국유사 가락국기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황후이다. 건안 4년 기묘 즉위해 39년동안 다스리다가 가평 5년 계유에 붕하였다. 왕비는 천부결 신보의 딸 모정인데 태자 마품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길, '성은 김씨인데, 대개 이나라 시조가 금알에서 났으므로 김(金)을 성으로 삼았다'고 했다.ㅡ 삼국유사 가락국기
2 일생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인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중략)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己卯;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 (후략) …
금관국의 2대왕이다. 김해김씨 족보에는 도왕(道王)으로 기록되어 있고 재위기간은 199년부터 253년까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39년이나 재위했지만 별다른 기록은 없다. 김수로와 허황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천부결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을 아내로 삼았다. 모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마품왕이다.
재위한 그해 세상을 떠난 수로왕을 위해 편방(便房)을 설치하고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
3 정치
가야 건국초기엔 왕가를 배출하는 김수로일파와 왕비를 배출하는 허황옥일파가 있었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거등왕과 마품왕의 부인들. 모두 허황후가 데려왔다는 인물들의 딸들로 구성되어 있다.
김해 무척산에 있는 모은암(母恩庵)이 그가 어머니인 허황후를 기려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정자다. 물론 현재 건물은 가야시대 건물이 아니다. 모은암 뒤편에는 남근석이 존재해서 왕실의 번창을 기원하며 세운 건물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2]
4 외교
재위 직후인 200년, 신라에 화친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아마 이시기에 신라에게 어택땅을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9년 7월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났다. 8개의 연해 국가들이 금관국을 침공한 사건으로, 힘에 부쳤는지 신라에 도움을 청하자 신라에서 내해 이사금이 대자 우로, 이벌찬 이음, 물계자에게 6부의 군사들을 모아주어 8명 나라의 장군을 죽이고, 잡혀갔던 6천명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년 후인 212년 3월에 왕자 1명을 볼모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대를 신뢰할 경우에는 이러하나, 나주의 보라국/발라국 등 이 시기에 존재했다는 소국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보이지 않아 시대에 대해 회의하는 의견도 많다. 때문에 포상팔국의 난에 대해서는 3세기 초반(그대로 신뢰), 4세기 초반,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 6세기 초반 등 다양한 설이 있으나, 대개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하여 교역권이 흔들리게 된 4세기 초반을 유력한 시기로 본다. 만약 이러한 가설이 맞다면 이 부분은 거등왕의 연대기에서 소거해야 할 것이다.
5 전설
역사적 사료로는 근거가 되지 못하지만 김해김씨 족보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인 초선대(招仙臺)[3] 이 선인은 배를 타고 왔다고 전해진다.
首露王墓【在州西】招賢臺【在州東. 世傳, 駕洛國居登王 登此臺 招七點山旵始仙人 旵始乘舟而來, 因名焉】수로왕묘(首露王墓)【주(州)의 서쪽에 있다】, 초현대(招賢臺)【주의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가락국의 거등왕이 이 대(臺)에 올라 칠점산(七點山)의 참시(旵始) 선인(仙人)을 부르자 참시가 배를 타고 왔다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가 있다.
ㅡ《고려사》지 金州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옛 말에 이르기를, 가락국의 거등왕께서 칠점산의 담시선인을 초대했다. 담시선인은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와서 이곳에 바둑을 두며 즐겼으니 이때문에 이곳을 초선대라 하였다. 그때 왕과 선인이 앉아있던 연화대석과 바둑판 돌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칠점산은 양산군 남쪽 44리 바닷가에 있으며, 산이 칠봉인데, 칠점과 같으므로 칠점산이라고 이름하였다."ㅡ《신증동국여지승람》
참시선인은 거등왕에게 치국의 도(治國之道)를 가르치고 국가 운영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는 칠점산에서 왔다하여 "칠점선인"이라 불리기도 했고 거문고를 가지고 다닌다 하여 금선(琴仙)이라고 했다고 전해지는데 모습이 차가운 옥과 같고 말소리는 경을 읽는 소리 같았다고 한다.
거등왕이 그를 초대해 쇠고기로 만든 요리를 들였으나, 모두 사절하고 단풍나무 진과 도라지를 요구해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등왕에게 "임금이 자연스럽게 다스리면 백성이 자연스럽게 살게 된다"라고 일러주었고 이를 받아들여 거등왕이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적혀있다.
왕의 초선대는 도성에서 7리 정도 되는 넓은 들 가운데. 있는데 거등왕이 칠점선인의 이름을 부르면 선인들이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 와서 서로 기뻐하였다.ㅡ《김해김씨 족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칠성산에 왕이 앉았던 돌인 연화석이 있고 이 돌에는 바둑판 모양이 새겨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옆 바위에는 석불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거등왕 초상이라는 전설도 존재한다.[4]
김해 유하리 고분이 거등왕릉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나, 발굴 결과 7세기의 굴식 돌방무덤일 뿐만 아니라 발굴된 유해는 여성 5명, 아이 4명의 것이어서 전혀 틀린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