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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알려진 초상화
許黃玉
श्रीरत्न(Sri Ratna)
1 인물 소개
허왕후, 허황후라고도 불리며 대한민국의 성씨 중 하나인 허씨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는 그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만 등장하는 인물. 고향이 인도라고 추측이 있다
김수로 왕과의 사이에서 10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2명에게 허씨 성을 주어 허씨 성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첫 두 아들은 김해 허씨가 되었고 여기서 더 갈라져 나머지 본관들이 생긴 식. 허씨 성을 물려받은 두 아들과 태자 거등왕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아들은 모두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가문은 이후 가야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데 왕비는 모두 허씨 가문에서 배출했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자 좌지왕이 허황옥 집단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용녀 집단과 손을 잡았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깨갱 한후 허씨 가문인 도녕의 딸과 결혼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이후 질지왕이 허씨 일가를 달래기 위해 왕후사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매우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하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절 근처에 있는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해서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ㅡ 《삼국유사》 가락국기
경상남도 김해시에 수로왕비릉이 현존하며, 김해시는 이러한 이유로 인도의 아요디아 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아요디아 시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도 김해시가 속한 경상남도에 자매결연 및 교류협력을 제안한 적이 있는데 경남도 측에서는 미적지근한 듯 별 반응이 없다.
2 그녀는 어디서 왔는가?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하여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다. 애초에 가야사와 관련된 기록이 극소수일 뿐더러, 그나마도 부실하고 유적 발굴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기록 그대로 인도에서 왔을 것이라는 학설과 본래 토착민인 허황옥을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신성성을 부여시킨 것이라는 설과 인도혈통의 중국인이 다시 한국으로 건너온 것이라는 절충설 등이 있다.
이중 학계에서는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신성성을 부여한 것이라는 설에 무게를 싣고 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그 시기에 인도에서 한반도까지 올 정도의 항해술이 없었고[1][2] 인도에서 뭘 얻어먹을 것이 있다고, 머나먼 그것도 아직 힘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곳에 무작정 갔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허황옥은 왜 인도 사람이 되었고 쌍어문양처럼 신성시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텐데 박혁거세, 고주몽, 해모수 등 고대 국가의 개국에는 전설이 다 있다. 가야의 경우에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겠다." 라는 노래로 대표되는 건국 신화가 있다. 허황옥의 경우도 이런 건국 신화처럼 후대에 각색하고 신성시한 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좌지왕 시절에 허황옥 일가는 왕의 결정을 거부하고 이를 관철시킬 만큼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질지왕이 왕후사를 짓고 허씨 가문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등의 모습들도 보이는데 이러한 모습들을 보았을 때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것은 가야 왕실이 허황옥 집안을 높이기 위해 불교적 윤색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 출신이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곳은 인도 공화국의 아요디아(Ayodhya), 태국 지역의 왕국이었던 아유타야(Ayutthaya/Ayudhya)가 있다. 정확한 위치는 논란이 있으나 대체로 아요디아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 아유타국일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도 가락중앙종친회는 매년 아요디아를 방문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도 인도 공화국에 아요디아 왕족이 존재한다. 아요디아 라자의 궁전에 가면 허황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라자도 허황옥이 자기 집안 사람이 분명할 거라고 믿는다고. 이 라자 가문은 1999년에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김해 김씨 종친회와 공동으로 수로왕비릉을 참배한 적도 있었으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비의 만남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개최할 때도 마찬가지로 구경을 왔었다.
인도에서는 한국-인도 관계의 상징적 인물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도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당시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허황옥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이를 주제로 한 소설 '비단공주' 가 인도 현지에서 출간되기도 했고, 뮤지컬 제작 논의도 있었으나 현재는 감감무소식인 듯.전 인도 대사 인터뷰 그러나 중요한 건 인도 내에서도 또한 한국의 가야왕국에 공주를 보내어 혼인을 맺었다는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아유타국이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한국과 인도 양측 모두 역사적인 왜곡을 하고 있는 게 되겠지만 기록이 부실한 먼 고대의 일을 이렇다 저렇다 칼 같이 나눌 수도 없고, 양측 모두 믿어서 손해볼 사안도 아닌 만큼 기록된 대로 모두들 좋게좋게 생각하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인도 외교부 산하 단체인 인도문화교류위원회(Indian Council for cultural Relations, ICCR)에서도 허황옥을 주제로 2015년 7월 14~15일 간 컨퍼런스를 연 적이 있다. 사무총장 사티시 메타(Shri Satish C. Mehta) 사무총장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인도와 관련이 있는 분(김해 김씨·허씨, 인천 이씨 등 ‘가락종친회’ 회원)이 1000만명 가까이 있다는 것은 양국 관계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며 이번 컨퍼런스는 인도가 한국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고 했다. 여담으로 이때 준비 중인 가락국에 관한 ‘댄스 드라마’가 올해 내에 완성되기를 기대한다고 첨언했는데 이를 볼 때 현재 인도 내에서 허황옥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제작 중인 듯 하다.
2015년 9월에 김해시와 부산광역시는 허황옥이 배를 타고 인도에서 김해로 오는 과정을 재현한 허황후 신행길 축제를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앞으로도 매년 개최하여 특색있는 전통 관광상품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3 기록
허황옥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수 있다.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을 향하여 다가오므로 유천간등이 섬 위에서 먼저 횃불을 드니, 앞다투어 육지로 내려와 재빨리 달려았다. 신귀간 등이 이를 보고 대궐로 달려들어와 아뢰니 임금이 듣고 기뻐하면서 얼마 후 9간 등을 보내어 좋은 키를 달고 아름다운 돛대를 드날리며 가서 맞이하여 대궐 안으로 모셔오게 하였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ㅡ 《삼국유사》 기이 2권 가락국기 편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파신의 노여움을 사 실행치 못하고 돌아와서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와 정박하였는데.......탑은 사각형에 5층으로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며, 돌이 약간 적반색을 띄고 그 질도 좋아 이 지방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ㅡ 《삼국유사》 제 3권 탑상편 금관성의 파사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