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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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6가야
금관가야대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소가야고령가야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네.

비록 인륜(人倫)은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이 갈렸네.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봐 주었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네.
산 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속은 오히려 아득하고, 겉도 역시 컴컴했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 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나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치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텅 비었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 오리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선 이상한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네.
구경하는 사람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리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네.
왕위(王位)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맑아지려 했네.
궁전 구조는 옛법을 따랐고, 토계(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시행했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했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백성은 태평을 맞이했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했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일세.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사당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삼국유사》 가락국기

1 소개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원에 위치했던, 일명 금관가야[1]로 알려져 있던 가야연맹의 일원이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가락국기에 의하면 개국군주는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구형왕대에 이르기까지 490년(~532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10대[2]의 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10대 구형왕까지를 왕조로 보나, 김해 김씨 족보에는 11대 말왕이 마지막 왕으로 기재되어 있다.

4세기 중반까지 가야연맹의 맹주국이었으나 이시품왕 대에 이르러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는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벌 이후인 5세기 초반까지 국가의 위세가 기울지 않았다는 수정론도 있다.

금관가야와 관련된 주요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다

2 국가명

일반적으로 금관가야라고 불리우고 있으나, XX가야란 이름은 태조 왕건이 통일이후 행정 제도를 개편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이후 XX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했기에 그 당시 불리우던 정식 국명이 아니다. 이는 구야국 뿐아니라 여타 가야의 5개국들도 마찬가지.

사서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한 조) · 구야한국(狗邪韓國, 왜인조)이란 이름으로써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국(金官國), 일본서기와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기에서는 수나라(須那羅), 남가라(南伽羅) 등으로 등장한다.

특히 일본서기에는 가라(加羅)· 남가라(南加羅, ありひしからのくに, 아리히시카라노쿠니 - 앞가라?)[3]· 남만(南蠻) · 수내라(須奈羅) · 소내라(素奈羅) 등의 여러가지 이칭으로 등장하는데, 이 중 수내라(須奈羅) · 소내라(素奈羅)와 같은 이름은 금관(金官)이란 국명과도 연관이 있는데, 즉 '쇠나라'라는 뜻이며, 이것은 구야국이 당시 철의 주산지였음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임나(任那)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큰데, 삼국사기 강수전에서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고 했고, 진경대사탑비(924)에 '임나왕족(任那王族)'이 있다.[4] 400년 광개토왕릉비에서도 임나가라(任那加羅)가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 임나는 가야 지방을 통칭하는 표현이며, 임나일본부설으로 인해 이 표현에 대해서는 현대의 거부감이 심해졌다. 혐한초딩들도 안믿을 임나일본부설로 인해 영원히 고통받는 임나

책자마다 다르지만 전기 가야시대의 국명은 가락국으로, 후기 가야시대에는 금관국으로 통일해서 표기하는 책도 있다. #

현재 학계에서 '구야국'은 보통 초기 금관국을 지칭하는데 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서기의 기록은 일관적이지 않고 또 '남가라', '남만' 등의 표현은 스스로 자칭했을 가능성이 낮다. '임나'는 현재로서는 임나일본부설 문제로 인해 껄끄러운 표현이며, '가라' 등의 표현도 일대의 통칭인 '가야'와 통하므로 특별히 김해 가야를 가리키는 표현이 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현재 한국 고대 사학계의 주요 논거인 삼국사기의 '금관국'으로 항목 이름을 사용한다.

3 역사

2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4세기까지는 변한에서 독보적인 지역이었다. 그 전까지 교역을 담당하면서 위세를 떨쳤던 사천 늑도와 창원 다호리가 쇠퇴하는 가운데 초기에는 김해 양동리, 3세기부터는 김해 대성동을 중심으로 일국을 이루었다.또한 건국 초기 김수로왕이 집권 시절엔 근방 국가의 조율자 역할을 했고 신라의 침략을 번번히 격퇴했다.당시 신라군이 1만명이나 되었다는데 격퇴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강력했던 시기.[5]4세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부산을 아우르면서 낙동강 하구 유역을 장악해 막대한 교역 이익을 바탕으로 급성장했다. 실제로 4세기 무렵까지 이지역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의 질과 양은 장난이 아니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마한에서 '구야진지염(狗邪秦支廉)'이라고 부르며 특별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변한에서 났다는 철을 한 군현과 왜에 팔기에도 용이한 지역이고(낙동강 하구), 굳이 왜인조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왜와도 교역한 것으로 보이므로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가야연맹설의 논리대로 연맹체 같은걸 형성하지는 않은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독로국과는 그런 관계인듯 보이지만 그걸로 끝. 타 소국에 중국제 사치품이나 철을 팔아치운 흔적은 보이긴 한다.다만 신라 사서나 다른 기록상에서도 맹주국은 아니더라도 주도 또는 중재를 한것으로 보아 근방에 위상과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6]

삼국사기 상으로 3세기 초 포상팔국의 난에 의해 다굴을 맞고 신라에 헬프를 치는 상황에 몰리게 되고, 이후 주도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이리저리 국제외교적으로 끌려다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 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十七年 春三月 加耶送 王子爲質

17년(212) 봄 3월에 가야(加耶)에서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신라본기, 내해이사금

하지만 최근 대성동 고분군에서 모용선비가 세운 삼연(전연, 후연, 북연)계통의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삼연 - 금관국 - 왜를 잇는 해상루트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보여서 그렇게 끌려다니는 위치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된 대성동 88, 91호의 시기는 4세기 중반이며, 대성동의 주부곽식 대형 목곽묘인 1호가 최후로 축조된 5세기 초까지 금관가야는 가야 연맹체 중 가장 규모가 컸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료는 위의 삼국사기 기사와 배치되는 면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또한 최근 들어 삼국사기 물계자전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아라(阿羅)'가 '가라'의 오기가 아닌 안라국이었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어, 이 때 금관국이 공격을 받았는지조차 의문점이 찍히는 상황에 돌입하고 있다. 사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모든 가야국이 금관가야인 것처럼 서술되고 있다는 중요한 지적이 있다. 그래서 532년 가야가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나오는데, 562년 (대)가야가 또 망하니까 신라본기의 편찬자는 "아, 가야가 항복했는데, 반란을 일으켰다가 또 멸망당했구나" 라고 생각하고 "가야가 반란을 일으켜서 멸망시켰다"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열전과 지리지에는 그렇지 않고 해당 소국의 이름을 분명히 전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이 포상팔국 전쟁에서 활약한 물계자를 다루는 열전 물계자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포상8국의 공격받은 주체를 "안라"라고 적고 있다.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捺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 (중략) …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그 때(209?)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아라국(阿羅國)을 치기로 함께 꾀하자 아라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捺音)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여 드디어 8국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 (중략) … 그 후 3년이 지나(212?)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의 세 나라 사람이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여오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패시켰다. - 《삼국사기》, 물계자전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편찬자는 다른 가야소국의 활동을 모두 '가야'로 치환하였다는 지적에서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을 참고하면 포상팔국이 공격한 주체는 '안라', 즉 함안의 '아라가야'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대성동88호분, 91호분의 존재에서 알다시피 금관가야는 4세기 대에는 시종일관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고구려군에 의해 패퇴함으로써 금관가야는 다른 가야 국가들과는 달리 고총이 등장하지 않고, 토기양식의 특색도 많이 쇠퇴하여 신라토기의 영향이 강력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위세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금관가야의 강력한 축이었던 부산 동래지역의 고분군인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은 확실한 신라화가 진행된 것도 이를 방증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사지비궤의 가라 공격 사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금관국의 왕실을 흔들어 놓은 사건으로 보는 의견도 많다. 이에 따르면 일본서기 상 262년(이주갑인상으로 382년으로 본다면) 사지비궤가 신라미인계에 넘어가 뜬금없이 금관국 왕실을 몰아내 백제의 목라근자가 복권시켜주는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아들 목협만치가 개로왕시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목라근자의 활동시기를 382년이 아니라 442년으로 보게 된다면 이 시기의 일로 볼 수 없다.(이근우 (2012), 고대의 낙동강 하구와 왜)

399년에는 신라가 국경에 왜가 들어차 있다고 하여 광개토대왕의 원군을 불러 왔는데, 이 때 왜군이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렀다'고 하여 400년 광개토대왕이 이를 쓸어버리면서 금관국이 휘청거리게 되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남정에 대해서도 직접 김해를 공격했다, 안 했다, 아니 오지도 않았다, 등 다양한 설들이 대립 중이다. 특히 5세기 이후에도 대성동 고분군에서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굴이 되기도 하였다. [1]

하지만 전쟁을 한 것과 유물이 출토되는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과거의 매장유구에 매납되는 유물들은 그 사회의 정체성을 반영하는것이 일반적인데, 전쟁 후에 전쟁 대상국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때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광개토대왕의 전쟁 수행 방식은 '지배' 아니라 '공격'에 방점이 찍혀있었으므로 고구려계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고 해서 고구려의 공격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군의 남정 이후 가야지역의 마구, 토기 등 수많은 변화양상을 볼 때 전쟁을 통해 크나큰 사회적 충격이 야기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인다. 뭐지? 여기 부산대분 다녀가셨나요? 그만좀 우깁시다 제발 그러나 이미 4세기대부터 삼연계 말띠드리개, 장식구 등과 심지어 오키나와산 청자고둥조개로 만든 운주 등 장식마구 문화가 등장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4세기대 영남지역에서 마구류등은 이제 차고 넘친다. 게다가 4세기 말로 편년되는 월성로 가13호분 출토 금동 장식 재갈부터 이미 고구려 남정 이후 마구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설은 논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월성로 가13호가 4세기대 고분이라는건 90년대 초부터 나왔다. 이미 이 학설은 30년 전에 논파됐다는 소리. 물론 신경철, 김두철 등 부산대 교수들은 월성로 가13호가 5세기 2/4분기 무덤으로 보고 남정 이후에 장식 마구등이 본격화됐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월성로 가13호 고배와 5세기 중엽 황남대총 남분의 고배가 단 1분기차이라는 말이 된다. 일본 스에키나 백제 마구 나아가 중국 기년명묘와의 교차연대는 차치하더라도 월성로 가13호랑 황남대총 남분 고배의 형식차가 엄청난데 그게 1분기라는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된다. 고고학도라면 양심에 손을 얹고 월성로 가13호, 황남대총 남분, 천마총, 금관총 고배 갖다놓고 비교해봅시다. 남분이랑 금관총, 천마총이 2분기 차이인데, 가13호랑 남분의 시간차가 1분기라는게 말이 되는지. 막말로 고구려 남정 이전에는 신라랑 고구려랑 교류안했습니까? 이미 4세기 후엽부터 전진 견사에도 신라가 고구려 사신 따라가서 전진왕 부견이랑 대화도 나눈 기록도 있고, 광개토대왕비에도 400년 이전에 신라와 밀접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설도 웃기는게 옛날에는 고구려 남정으로 장식마구 등의 본격적인 마구 문화가 '시작'되었다더니, 이제는 주요 고분들의 연대를 5세기로 다 밀어버리고 그래도 4세기 마구들이 많이 나오니까 이제는 '고구려 남정으로 마구문화가 본격화되었다'라는 둥 말을 바꾸고 있다. 제발 옛날 대성동, 양동리만 발굴한 그 시점의 학설은 제발 좀 폐기하자.

5세기 초반 이후 주도권은 반파국에게로 넘어갔으며 5~6세기에 이르러서는 '남가야', '남가라' 등으로 표기된다. 그 만큼 북쪽의 대가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진 모습을 호칭에서부터 반영하는 것이다[7]. 부산대 신경철 교수는 금관가야가 일시에 멸망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당치도 않다. 대성동 고분군에는 5세기 이후의 고분이 조사되었으며[8], 왕성인 봉황토성[9]을 방어하기 위한 북쪽 감제고지에 나전리 보루가 축조되었고 여기서 나온 토기가 6세기 전반 토기라는 점에서 금관가야가 계속 봉황토성을 중심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라에게 밀려 532년 11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고 멸망하였다. 다른 가야 국가들은 백제가 살려 보려고 애쓴 것과 달리 금관국은 백제가 그럴 틈도 없이 멸망했는데, 5세기 이후 이미 낙동강 서안에 신라의 교두보가 존재해 온 (백제 입장의) 원격지인 데다가 사비 천도 등으로 인해 백제가 정신이 없었던 탓이 큰 듯. 그러나 금관국의 멸망은 백제에 지리산 ~ 낙동강 동안 일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공식적으로 한국사 최초로 불교를 들인 국가이다.[10]
단,공식적인 기록으로만 따져도 늦게 잡아도 고구려,백제 다음으로 불교를 정식으로 수용한 3번째 국가다.[11]

4 후대의 전래

다른 가야 여러나라들에 비해 구형왕은 항복한 뒤 신라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셋째(막내) 아들 김무력은 신라의 장수가 되어 진흥왕 대의 대대적인 영토 확장 시기에 활약했다. 특히 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를 확정지었던 관산성 전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형왕의 증손자이자, 김무력의 손자인 김유신은 삼국통일에 지대한 업적을 남겨 죽은 후 유례없는 왕으로의 추증(興武大王)을 받게 된다. 또한 신라 문무왕모계 쪽으로 금관국 왕실의 혈통을 잇고 있기 때문에 신라 중대왕실과도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문무왕 본인도 김수로왕의 능역과 제사 관리에 꽤 신경을 쓰기도 했다.

알려져 있는 역사서는 가락국기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 또한 현재까지 전해져 있지 않으며 삼국유사에 일부가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가야에는 왕명조차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이정도로 남아있는게 다행일 정도.

금관국의 김수로 왕과 왕후 허황옥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이다. 덤으로 김해 허씨에서 사성으로 인해 갈라진 인천 이씨 같은 뿌리이다. 그러므로 세 집안은 한 집안과 같으므로 동성동본과 같은 정도의 관습인 이성동본으로 처리하여 혼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이성 동본 혼인은 2000년대 후반 법이 위헌 판결로 개정되며 동성동본도 혼인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완고한 집안에서는 여전히 어렵다고 한다. 김해 김씨야 김유신 버프로 족보매매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지만, 허씨의 경우에는 능지처참 당한 허균이 있었기 때문에 이쪽 족보를 살리가 없고,인천 이씨의 경우에는 워낙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고려의 실권자였다가 반역자가 된 이자겸과 조선의 명장임과 동시에 반란의 수괴였던 이징옥이 있었기 때문에 이쪽 족보를 살리가 없다. 물론 그런거 안따지고 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액을 들여 사는 족보 속 조상이 반란 수괴가 껴있는 족보를 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즉 김해 김씨는 어떨지 몰라도 김해 허씨와 인천 이씨의 경우에는 나름 그 순수성 피의 순수성 따위 어차피 외가쪽이 계속 섞이니 의미는 없지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완고한 집안으로서의 발언이 가능한 것이다.

5 관련 항목

  1. 금관이라는 것은 신라가 532년에 가락국을 점령하고 후대에 생겨진 것임
  2. 혹은 11대이지만 같은 시기에 건국된 대가야는 16대라서, 대수를 비교해보면 비정상적이다. 따라서 여러명의 금관국왕이 모종의 이유로 수로왕의 비상식적인 재위 기간에 포함된 가능성이 있다.
  3. 가라는 한자 "韓"를 말하는 거다.
  4.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
  5.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금관가야 건국 전 100호에 약 75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군 1만의 침략이면 자그마치 국민 인구의 1/7~1/8 이나 되는 대군이라는 것이다.물론 그 이후 늘었을지 모르지만 그걸 건국 초기에 격퇴하고 동시에 근방 모든 국가의 준동을 중재할정도면 건국후 아주 급속한 성장을 이뤘다는 증거이다.
  6. 애초에 이런 기록들 때문에 연맹설이 주장된거다.
  7. 이 시기부터 금관가야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토기는 사라지며, 창녕계나 소가야계 토기, 그리고 이동양화된 지역토기들이 등장한다.
  8. 대표적으로 대성동73호분은 5세기 2/4분기에 해당하는 대형 석곽묘이다. 함안과 대가야에 비하면 중형급 고분인 점에서 5세기 중엽 금관가야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면서도 대가야나 아라가야보다 열세인 점을 알 수 있다
  9. 봉황대와는 다르다. 현재의 봉황대는 봉황토성 안의 내성이거나, 구릉으로 보인다.
  10. 인도 아유타(아요디아) 국에서 함께 온 허황옥의 오빠가 불교를 함께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관련 이야기도 있다.단,허황옥의 인도 출신 자체부터 논란이 있고 이후 불교를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했다는 주장도 많으니 공식적으로 받기는 힘들다.그래서 비공식적이라고 적은 거고....야사라고 생각하자.
  11. 질지왕 시절 허황옥의 명복을 빌고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기록한다.이때 당시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가 일어나기 전이다.왕후사를 세웠다는 기록이기 때문에 수용한건 최소 그 이전이다.
  12. 김해군 가락면. 명칭을 금관가야 가락국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