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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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국의 역대 국왕
4대 거질미왕 김거질미5대 이시품왕 김이시품6대 좌지왕 김질
왕호이시품왕(伊尸品王)[1]/기본한기(己本旱岐)[2]
시호명왕(明王)[3]
김(金)
이시품 / 기본
생몰년도? ~ 407년 4월 10일
재위기간346년 7월 7일 ~ 407년 4월 10일 (61년)

1 삼국유사 가락국기

김씨이다. 영화 2년에 즉위해 62년동안 다스리다가 의회 3년 정미에 붕했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인데, 왕자 좌지를 낳았다.

2 소개

금관국의 5대왕.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한다. 김해김씨 족보에는 명왕(明王)으로 기록되어있다. 성은 김씨로 왕비는 극정신이며 태자로는 좌지, 곧 좌지왕이 있었다. 일본서기의 기본한기/이본한기(己本旱岐/已本旱岐)로 보기도 한다. 이 때 한기(旱岐)는 가야소국의 왕을 지칭할때 쓰는 왕칭이기 때문에 본래 이름은 기본/이본일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이본한기의 왕자로 좌지왕 말고 몇명을 더 기록해 놓았으나 이시품왕의 아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346년 칠석부터 407년까지 무려 61년간 가야를 다스렸으나, 더불어 임기 내내 침공에 시달리던 불운한 왕이었다.

3 침략의 시대

3.1 백제의 침공

369년년에 백제의 리즈시절을 만든 근초고왕의 지시로 사백, 개로, 사사노궤등과 함께 가야연맹의 일부인 탁순국에 모였다가 금관국을 침공한 신라를 격파했다. 이내용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의 한국 사서엔 등장하지않고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3월에 아라타와 카가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와 함께 탁순국으로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다. 원군을 청하자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백, 개로가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화, 남가라[4],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했다.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심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다.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의류촌으로 와서 아라타와 목라근자 등을 만나자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항복하다. 백제왕과 치쿠마가 벽지산과 고사산에 올라 번국의 맹세를 하고, 치쿠마를 도읍으로 데려가 후대한 뒤 구저와 함께 보내다.

신라에게 얻어맞으면 항상 백제가 도와주는 식이었다. 이때 목라근자가 가야의 소국들을 평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론 외교적인 협상으로 협력국으로 만들었다는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3.2 왜의 침공

382년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파견되었다는 '가라'에 대해서는 금관국인지 반포국인지 이견이 있으나, 이 기록의 '기본한기'/'이본한기'를 '이시품왕'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만약 이것이 금관국의 기록이라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자세한 기록은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링크 참고).

"신라가 왜에 보내는 사신을 끊자, 일본은 소츠히코를 파견하였으나 미인계에 속아서 뜬금없이 금관국을 침공했다. 이 결과 가라의 왕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백제로 도망갔고,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가 나서서 겨우 도성과 땅을 되찾았다."

이를 되찾아준 것은 일본서기 상 천황이라고 되어 있는데, 백제 장수 목라근자가 활동한 것 때문에 백제로 보는 의견도 적지 않다.

3.3 고구려의 침공

하지만 여기서 외세의 침략은 끝나지 않았다. 신라 내물왕 시대인 400년 왜가 신라를 침공했는데, '왜가 신라성부터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들어찼다'고 하여 통설에서는 가야, 그리고 신라와 대립하던 백제의 지원이 함께 했다고 본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ㅁ新羅城ㅁ城倭寇大潰城ㅁㅁㅁ盡ㅁㅁㅁ安羅人戌兵新ㅁㅁㅁㅁ其ㅁㅁㅁㅁㅁㅁㅁ言

10년 경자에 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하였다. '安羅人戌兵' …[5] ㅁ 신라성 ㅁ성 ㅁㅁㅁㅁㅁㅁㅁ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ㅡ《광개토대왕비》제 2면

신라는 광개토대왕에게 "Somebody Help me!"를 외쳤고 이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편성해 남하해 왔다. 다만 여기에는 판독 불가능한 글씨가 많아 논란이 제법 있다. 이전까지는 임나가라(금관국)이 적극적으로 왜에 협조했다가 패배해 버리면서 이들이 가야 연맹의 맹주 자리를 내놓은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고구려 군대가 몰려오자 임나가라 종발성이 즉시 '귀복(歸服)'하였다는 점과 5세기 초반에도 대성동 고분군의 위세가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협조하여 크게 타격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금관국은 더 이상 신라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369년 기록부터 백제가 일본 교역의 창구로 금관국이 아닌 탁순국/다사진을 택하고 4세기부터 부산(독로국으로 추정) 지역에서 가야색과 신라색이 줄다리기를 하는 등, 4세기 후반 신라는 야금야금 김해 쪽으로 힘을 펴기 시작했다. 아마도 광개토대왕 때의 원정이 직접 타격을 주지는 않았더라도, 교역권이 5세기 초반이 되면 신라 주도로 완전히 넘어가는 상황에 영향을 일정 부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어찌되었건 금관국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기였고, 결과적으로 안 좋은 방향으로의 전환점을 경험했던 왕.

4 기타

곽재식의 소설 역적전에서 잠깐 한 번 등장한다. 별 하는 일은 없고 그냥 임금으로 상을 내리는 병풍스러운 역할.
  1. 삼국유사에 등장. 주검 시(尸)는 향찰에서 'ㄹ' 받침을 나타내는 표기에 사용되므로, 당시에는 '일품왕'으로 불린듯 보인다.
  2. 일본서기에 등장.
  3. 김해 김씨 족보에 기록된 시호이다.
  4. 일본서기에는 금관국이 남가라로 표현되어 있다. 이건 뒤의 기록에도 마찬가지.
  5.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안라(함안의 가야 소국)의 방위군',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인의 병사를 안치하여 …' 등으로 나뉘고 있다. 관련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