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츠라기노 소츠히코

葛城 襲津彦(かつらぎ の そつひこ, 갈성 습진언)

사지비궤(沙至比跪), 증도비고(曽都毘古)(さちひこ)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야마토의 장군. 그러나 백제의 사씨(沙氏)로 보는 견해도 유력하다. 애시당초 백제의 사씨는 근초고왕 대의 '사백'이나 '사사노궤'에서 보이듯이 가야 방면으로도 활발히 활동한 가문이다. 어찌되었건 4세기 후반 ~ 5세기 초반 경의 사람으로 보인다. 일본어로는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라고 읽고, 사치히코라는 표기도 있으나 소츠히코 쪽의 표기가 더 자주 쓰이는 듯 하다. 이름에 박혀있는 '히코(比跪)'라는 말은 고대 한국, 일본 인명에서 자주 보이는 말 중 하나다.

첫 등장은 신공 5년(205)이지만, 이것이 하필이면 박제상이 미사흔을 신라로 귀환시킨 사건이라서 도저히 연대가 맞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 일본서기에는 205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418년이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425년이다. 연대야 어찌되었든 미사흔과 함께 대마로 파견되었다가 박제상에게 낚여서 미사흔을 보내주는 등 첫 등장부터 뭔가 안습하다.

이후 신공 62년(262)에 천황의 명으로 '가라'(금관국 설이 있고, 반포국 설이 있다)을 돕기 위해 신라를 공격한 것이 실질적인 첫 등장인데, 백제 측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도 중간에 신라 여자에게 코가 꿰여서 치라는 신라는 안 치고 오히려 백제 및 야마토와 긴밀한 우호관계에 있던 가야를 공격했다. 이 때문에 이본한기(己本旱岐)를 비롯한 가야의 왕실과 백성들이 백제로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금관국 사직은 [1]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에 의해 복권되었다.

六十二年。新羅不朝。卽年遣襲津彦擊新羅。〈百濟記云。壬午年。新羅不奉貴國。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新羅人莊餝美女二人。迎誘於津。沙至比跪受其美女。反伐加羅國。加羅國王已本旱岐。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等。將其人民。來奔百濟。百濟厚遇之。加羅國王妹旣殿至。向大倭啓云。天皇遣沙至比跪。以討新羅。而繩新羅美女捨而不討。反滅我國。兄弟人民皆爲流沈。不任憂思。故以來啓。天皇大怒。旣遣木羅斤資。領兵衆來集加羅。復其社稷。
一云。沙至比跪知天皇怒。不敢公還。乃自竄伏。其妹有幸於皇宮者。比跪密遣使人間天皇怒解不。妹乃託夢言。今夜夢。見沙至比跪。天皇大怒云。比跪何敢來。妹以皇言報之。比跪知不兔。入石穴而死也。〉
(신공)62년. 신라가 오지 않았다. 이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하였다. 《백제기》에 말하길〈임오년에 신라가 귀국[2]에 오지 않았다. 귀국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신라에서 미인 2명을 단정하게 꾸며 항구에서 마중하여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유혹하였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그 미녀를 받고서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 및 아들 백구질(百久至), 옥수질(阿首至), 국사이(國沙利), 이나마주(伊羅麻酒), 이민질등(爾汶至等) 등이 인민을 거느리고 백제로 도망갔다. 백제는 (이들을) 후하게 대했다. 가야국왕의 누이 희전질(旣殿至)이 대왜(大倭)를 방문하여 "천황은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미녀를 받고는 신라를 치지 않고 도리어 우리나라를 쳐서 멸망 시켰습니다. 형제, 백성들이 모두 유랑하고 있습니다. 이에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와서 여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냈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라에 이르러 그 사직을 되돌렸다 하였다.
일설에 이르기를,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감히 공공연하게 돌아오지 못하고 스스로 숨었다. 그의 누이는 황궁에서 은총을 입은적이 있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몰래 누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화가 풀렸는지 묻게 하였다. 누이는 (천황에게) 꿈을 핑계대어 "오늘밤 꿈에서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천황은 크게 화를 내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어찌 감히 오는가?"라고 하였다. 누이는 말을 전해주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용서받지 못함을 알고 동굴에 들어가 죽었다.」라고 했다.

이 연대는 이주갑인상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관련 기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건이다. 만약 '이본한기'를 금관국의 왕으로 보고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가락국기이시품왕으로 본다면 4세기 후반이라는 연대는 더욱 확고해진다. 때문에 이 기록은 대개 382년의 것으로 파악한다.

일본서기에서 언급한 일설에 따르면 소츠히코는 몰래 돌아와 숨어 있다가 후궁인 누이를 통해 천황이 화가 풀렸는지를 물었다가, 당연하게도 천황이 크게 화를 냈다는 걸 듣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소츠히코는 응신 14년에 또 등장하므로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아마 이 때문에 정식 기록에 넣지 않고 '일설'이라고만 했을 듯). 백제에서 일본으로 도망친 것일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제의 응신 14년(283) 기사에 따르면, 백제에서 건너오려다가 신라에 막혀 가야에 머무르고 있는 궁월군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파견되고 있는 것. 실력은 여전해서 3년이 지나도록 데려오지 못하다가 응신 16년(405) 추가 파병된 원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돌아왔다. 이 때의 기사도 대개 2갑자 내려 403년의 것으로 본다[3].

인덕 41년(353)에는 일본의 백제 인근 토지 조사에 맞선 무례한 백제 왕족을 천황 앞으로 압송했다는 기록도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기사의 경우 2갑자 내리면 473년이 되어 연대의 현실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일본서기의 기록은 5세기 중엽 ~ 후반이 되면 본래 연대로 복귀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355년의 기록 이후 5세기 후반까지 연대 조정의 축이 될 백제 관련 기록도 없다.

게다가 인덕천황은 313년부터 399년까지 재위하는, 장수왕을 뛰어넘는 수준의 재위 기간을 가지고 있는데, 257년에 태어났다고 하므로 399년이면 142세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갖게 된다. 따라서 중간의 연대 조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마침 에 조공한 기록을 보면 460 ~ 462년 사이 왕위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인덕천황의 기록은 60년 정도 소급된 것으로 보이므로, 1갑자만 인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조정하면 413년으로 어느 정도 말이 된다.[4]

정리하자면

  • 382년 미인계에 낚여 가야 공격
  • 403년 백제 이주민 이송에 참여했으나 지연
  • 405년 지원병에 힘입어 이주민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
  • 413년 백제 인근 토지 조사 사건
  • 418년/425년 박제상 사건

이렇듯 약 36년/43년에 걸친 활동이 기록에 남은 사람으로, 연대 조정을 거친 결과를 살펴보면 말이 안 되는 활동 기록까지는 아니다. 일본서기가 아무 기록이나 주워 모아서 이렇게 됐다기보다는 아무렇게나 흩어놓아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뒷이야기로 소츠히코의 가문은 딸들을 대대로 천황과 혼인시키면서[5] 그야말로 5세기를 상징하는 수준의 외척으로 자라난다. 하지만 본인이 죽은 후세에는 아들 다마다(玉田)[6]와 손자 쓰부라(圓/円)[7]가 모두 일본 천황가에 살해당하고, 손녀는 임나국사 다사에게 시집갔다가 웅략천황에게 NTR당하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인생 마음대로 안 풀리는 건 본인만이 아니었던 듯...
  1. 일본서기의 내용을 따르면 천황의 명으로 복권되었다고 하나, 백제를 왜의 속국 수준으로 묘사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이라 이를 인정하는 학자는 현재 없다.
  2. '귀한 나라', 즉 일본을 말한다. 일본서기 기록이기 때문에 일본을 높여 지칭하고 있다.
  3. 이 연대를 약간 조정하여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벌(399 ~ 400) 및 실성 이사금의 미사흔 일본 파견(402)과 연결 짓는 주장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정황 증거만 있으므로 확언할 수 없다.
  4. 문제는 그 뒤의 이중, 반정, 윤공 삼형제 천황을 어떻게 할 것이냐지만...
  5. 인덕, 이중, 웅략이 모두 소츠히코의 딸, 손녀, 증손녀를 왕후로 삼았다.
  6. 윤공 5년 7월 14일조
  7. 웅략 즉위전기. 그러니까 웅략은 쓰부라를 죽여놓고 정작 그 딸을 왕후로 맞은 것이 된다. 가학적 변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