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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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김해님(金해님 / Hae-nim Kim)[1]
생년월일1975년 2월 7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학력홍릉초 - 청량중 - 한서고 - 인하대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7년 드래프트 9라운드 (한화 이글스)
소속팀한화 이글스(1997~2007)
지도자 경력서울 해치 투수코치(2010)
경북고 투수코치(2011~2013)
프런트 경력롯데 자이언츠 스카우트(2013~현재)

1 개요

김태양
한화 이글스투수이자, 現 롯데 자이언츠스카우트.

한서고등학교와 인하대학교를 졸업하고, 한화 이글스 역대 최악의 흉작이라는 1997년 드래프트에서 2차 9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여 2007년까지 10여 년 동안 한화 이글스에서만 활약했다.

140㎞/h 초반의 최고 구속과 커브로 맞춰 잡는 투수였기 때문에 크게 돋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소금같은 역할을 해 주었던 좋은 선수였다.

여담으로 한서고 야구부 출신 중에서 프로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2][3]

2 프로 생활

1997년 프로 입단 첫 해부터 가능성을 보이며 중간계투로 1군에서 활약했다. 이 시즌 성적은 41경기 60⅓이닝 3승 2패 1세이브 ERA 3.73. 1998, 1999년에도 중간계투로 계속 등판했으나 성적은 방어율 5점대, 4점대로 그렇게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1999년 한화 이글스의 첫 우승 때 유일하게 쓸 만한 중간계투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에 최악의 방어율인 7.86을 기록하며 군입대를 결심했다. 2000년 시즌 후 상무에 입대해 2003년 4월에 전역했는데 말년 때 살이 엄청 붙어 운동 능력이 확연하게 떨어졌고, 속구 구속도 130km/h대에 머물며 퇴물 취급을 받기도 했다. 결국 1군에 콜업되지 못했고, 2004년 정말 열심히 운동한 끝에 싱커를 익혔고 구속도 140km/h 중반대로 끌어올리며 부활을 알렸다. 이 시즌부터 선발 투수로 전향했고, 2004년 5월 26일 5⅓이닝 3실점으로 데뷔 첫 선발승을 따내기도 했다. 이 해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부정 선수로 출장을 했다. 이 때에 주심과 기록원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경기 종료후 적발.

2005년에 선발 투수로 큰 활약을 보이며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비록 10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이 시즌 성적은 1군 32경기 128⅓이닝 ERA 4.28. 이 활약을 바탕으로 준 플레이오프의 선발 투수로 나서기도 했었다.[4]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지연규의 투혼이 돋보였던 5차전에 등판하여 삼성의 젊은 중간계투진과 명승부를 펼치기도 했다.

2007년에 방출된 후[5] 일본 독립 리그 팀인 코리아 해치의 투수코치로 재직했다. 코리아 해치가 공중분해된 후에는 빙그레/한화 선수 출신인 강정길이 감독으로 재직 중이었던 경북고등학교 야구부의 투수코치로 활동했으며, 2013년부터 롯데 자이언츠스카우트로 재직하고 있다.

여담으로 성적과는 별개로 독특한 이름때문에 한화 팬들에게 인상적이었던 선수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7한화 이글스4160⅓32103.73433236
19983560⅓21005.07603534
19994192⅓35304.87934170
20002636⅔11017.85531925
2001상무 피닉스 야구단에서 복무
2002
2003
20042390⅓53035.581094543
200532128⅓68124.281524061
2006365513044.58671623
2007131400001.931277
통산(8시즌)247537⅓21235104.84589235299
  1. 당연히 해님은 한글 이름이다
  2. 한서고 야구부는 자체 야구장까지 보유할 정도로 재단의 투자가 강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프로에서 성공한 선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학교였다. 김해님 이전에는 창단 초기 에이스였던 김민국이 그나마 가장 많이 뛴 축에 속한다.
  3. 이후 어렵게 스카웃해 왔던 오승환, 채병용 등이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투자에 비해 성적이 나지 않으면서 재단의 관심이 점점 식어버린 가운데 2005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유일한 현역 선수였던 홍명찬마저 2015시즌을 끝으로 방출되어 한서고 출신 선수는 더 이상 남지 않게 됐다.
  4. 3차전에 선발로 출장했는데 1이닝 2실점하고 물러났다. 이후 등판한 최영필이 7⅓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면서 팀은 승리했다.
  5. 김인식 감독과의 불화가 있었다는 카더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