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마드 나지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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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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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9월 6일 ~ 1996년 9월 28일

아프가니스탄대통령, 독재자. 고자
1987년 9월 30일부터 1992년 4월 16일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2 생애

무하마드 나지불라는 1947년 9월 6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한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 최대 공산주의 좌익계 정당이었던 인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75년 카불대학교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나지불라는 의사 일을 하면서 인민민주당 당원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던 1978년 인민민주당과 군부내 좌익계 군 인사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후 나지불라는 새로 수립된 인민민주당 공산 정권 아래에서 하위 관리직을 맡게 되었지만 부정부패 혐의를 받게 되면서 국외로 망명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나지불라는 다시 귀국했고 소련군의 침공 아래 새로 성립된 카르말 친소 정부 하에서 비밀경찰 국장 밑 정치국 고위급 관리로 승진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인민민주당 당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1987년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었던 바브라크 카르말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나지불라는 카르말의 뒤를 이어 아프간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나지불라는 9월 30일 정식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새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편 대통령이 된 나지불라는 국호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사회주의식 경제 체제를 버리고 일단의 시장 경제 체제를 아프가니스탄에 도입했다. 그리고 1978년 공산 정권 출범이래 사실상 내전 상황에 놓여있던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한 정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국내 여러 비공산 정치 세력들과 무자헤딘 반군 측에게 인민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치 철폐와 연합 정부 수립등 일단의 유화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무자헤딘 측은 이러한 나지불라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나지불라의 유화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던 1988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래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었던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 철수를 시작하면서 나지불라의 운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은 끔찍한 피바다가 될것이라며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아프간 철군 계획을 비난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더라도 현 아프간 정부에 대한 무기 지원등은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라고 나지불라를 달래는데 애를 썼고 198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군대를 철수시키자 나지불라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도 소련군 철수 후에 이어지는 소련의 지원 아래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련이 두고 간 전투기, 전차, 미사일 등 막대한 무기들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련의 지원 아래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에 대한 강력한 진압 작전에 나서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간의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편 무자헤딘 반군과 나지불라 정부군간 내전이 진행될 무렵 나지불라는 무자헤딘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갖가지 심리전을 벌였다. 이슬람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무자헤딘 반군들을 흔들고 국민의 민심을 정부 편으로 돌리기 위해 직접 이슬람 사원을 찾아가 예배하는가 하면 자신의 권력에 이슬람교 지도자들을 어느 정도 끌어들이는가 하면 자신은 이슬람교를 적으로 돌리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자국 내 이슬람교 세력들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자헤딘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 무력충돌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나지불라 정부에 불만이 있었던 일부 정부군 장교들이 1990년 3월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나지불라는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내전이 장기화되고 사회불안이 가중되자 나지불라는 군대의 힘을 빌어 강압적인 권위주의적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정부군의 민가 약탈과 무자헤딘을 잡기 위한 공군기의 지상공격으로 애꿏은 민간인들이 죽고 다치면서 국민들은 나지불라 정권을 비난하였고 민심을 얻지 못한 나지불라 정부군은 여러 전투에서 무자헤딘에게 패퇴에 패퇴를 거듭했고 정부군 내부에서도 군에서 탈영하거나 무자헤딘쪽으로 투항하는 탈영병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1991년 말 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이어져오던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지원마져 끊겨 나지불라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1992년 4월 무자헤딘이 수도 카불에 대한 대대적인 대공세에 돌입하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카불에 있는 국제연합(UN) 구역으로 달아나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나지불라는 국외로 달아나려고 해외 망명 시도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무자헤딘은 공산정부가 몰락한 후 서로 내전을 벌였고, 나지불라는 축출당했지만 공산주의 지지자들이나 관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으므로 카불 지역을 장악한 무자헤딘 군벌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나지불라를 보호했다.옛날 적이었던 사람에게 보호받다니[1] 그런데 탈레반 세력이 급성장하자 마수드는 카불을 내줄 수 밖에 없었고, 마수드는 나지불라에게 같이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 파슈툰족이었던 나지불라는 탈레반도 대부분 파슈툰족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고 카불에 남았다.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는데, 탈레반은 1996년 카불을 장악하자 유엔이고 뭐고 없이 나지불라를 보호구역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잔인하게 나지불라를 거세한후 거리에 끌고 다니다가 목매달아 죽였다. 뿌린대로 거두는 법이지만, 이런 처형은 이슬람권에서도 비난성명을 낼 정도로 잔인했고, 탈레반 내에서도 "저런건 알라의 뜻이 아니다"라고 인정했을 정도.[2]

  1. 그러니까 마수드가 대인배라는 소리다
  2. 당시 탈레반의 카불 점령을 보도한 국내 모 군사 잡지에 조리돌림당하는 나지불라의 시신 사진이 실린 적이 있다.